• 최종편집 2021-05-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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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7월은 재산세 납부의 달' 입니다
      7월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떠나는 달이다. 올해는 휴가를 떠나기 전 우편함을 한 번 들여다 보자. 왜냐하면, 우리 구 재정의 근간인 재산세가 고지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동산을 보유함으로써 여러 가지 세금을 부담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인 재산세는 7월과 9월 재산세(주택), 재산세(건축물), 재산세(토지) 등으로 나누어 부동산 소재지 구(군)청에서 과세한다.  이번 달 7월에는 재산세(주택)와 재산세(건축물)가 고지되는데 많은 납세자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재산세 과세방식과 편리한 납부 방법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 드리고자 한다. 먼저, 재산세는 주택, 건축물, 토지 등으로 구분되어 과세된다. 재산세(주택)는 주거용 부동산에 대한 과세로 건축물과 토지를 합산하여 산정한 주택공시가격을 기준으로 1년 세액을 산정한 후 7월과 9월 각각 2분의 1씩 같은 세액으로 나누어 1년에 2번 과세하고, 주거용 이외의 건축물과 그 부속토지에 대해서는 7월에 재산세(건축물)를, 9월에는 재산세(토지)를 과세하며, 지상에 건축물이 없는 나대지, 농지 등의 토지는 9월에 재산세(토지)만 과세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에 고지서가 한꺼번에 2장이 나왔다고 놀라지 마시고 먼저 과세구분을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다음으로, 재산세 과세기준일은 6월 1일이라는 점이다.  재산세는 자동차세와 달리 소유 기간을 날짜로 계산하여 과세하는 것이 아니고 과세기준일 6월 1일 현재 부동산 소유자에게 1년치의 세금이 과세되기 때문에 6월 1일 이전에 매매하였다면 매수자가, 6월 2일 이후에 매매를 하였다면 매도자가 그 해 재산세(7월, 9월)의 납세의무자가 되니 이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산세 납부는 수령한 고지서를 가지고 금융기관을 직접 방문해 납부할 수도 있지만, 무더운 날씨에 편리하게 납부할 수 있는 다양한 납부 방법이 준비되어 있다.  재산세 고지서상에 표기된 가상계좌번호로 손쉽게 송금할 수 있는 무통장 송금 방식이 있고, 고지서가 없더라도 위택스 홈페이지(www.wetax.go.kr)에 접속하여 회원가입을 하면 전국 모든 지역의 지방세 과세내역 확인 및 납부를 할 수 있으며, 또한, 본인의 신용카드를 이용하여 인터넷 납부를 하거나, 직접 은행 CD/ATM(현금자동 입출금기)를 통하여 납부 할 수 있고, ARS자동응답시스템(☎080-788-8080)을 활용해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지방세를 납부할 수도 있다.  주소지를 장기간 비우거나 고지서 수령을 원하지 않는 납세자들은 위택스, 금융앱 등을 통하여 전자고지를 신청하거나, 이용하는 금융기관에서 정기분 지방세의 자동이체를 신청한다면 종이 고지서도 없애고 개인의 정보도 보호하면서 편리하게 지방세를 납부할 수 있다.  이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우리 북구에서는 자동이체, 전자고지 1장당 각 300원의 세액 공제를 하고 있으며, 전자고지와 자동이체를 동시에 신청할 경우 700원의 세액 공제 혜택을 드리고 있다.  무더운 7월, 여름 휴가 떠나기 전 우편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납부기한을 놓쳐서 가산금을 부담하는 일이 없도록 재산세를 잊지 말고 꼬~옥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실한 납세가 행복한 북구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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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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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5]효와 청렴의 상징 조치우(曺致虞) 부부 옥비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지위고하 남녀노소 없이 이 세상을 왔다가 언젠가는 돌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인생길(道)이라 한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각종 기념일로 가득하다.   영어단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조사하였는데 1위가 Mother(어머니)이고 2위가 Passion(열정) 3위가 Smile(미소) 4위가 Love(사랑)인데 아버지는 10위 20위 안에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버이날은 1956년부터 5월 8일 ‘어머니날’로 해오다가 형평성의 원칙이 제기되어 1973년부터 ‘어버이날’로 제정되어 도시화 산업화 핵가족화 되는 사회에서 부모공경에 대한 제도적 장치로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어머니 덕택(!)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생각도 든다.   전통시대 부모상(父母喪)은 3년상(喪)이었지만 이제는 3일장(三日葬)과 5일장(五日葬)이 대세를 이룬다. 자신을 존존하게 해준 근원에 대한 보은의식(報恩意識)도 누구 없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 단 2기 뿐인 玉碑...경북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遺厚齋 / 창원시 지개동의 부인 昌原朴氏 慕先齋 玉碑   조치우(曺致虞, 1459∼1529)는 조선 중종(中宗) 때 효행(孝行)으로 널리 알려져 《소학 (小學)》 1질을, 대구부사(大丘府使)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사후 2년 뒤인 1531년(중종26)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 되었고, 옥비를 하사받았다.   그는 55세 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 70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복중(服中)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71세에 죽었다. 중종은 조치우 부부에게 옥비를 각각 하사하였다.   영천시 대창면 조치우 옥비(청옥)   창원시 지개동 창원 박씨부인 옥비(백옥)    원래 옥비 2기 모두 묘소(墓所) 앞에 있었으나 왕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비석을 풍화작용으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따라 100여년 전에 비각을 지어 옥비를 봉안하고 관리해오고 있다.   옥비의 내용은 《어사청백리 조치우 옥비 (御賜 淸白吏 曺致虞 玉碑)》라 되어 있고 비각의 편액에는 《내사옥비각 (內賜玉碑閣)》이라 되어 있다. 옥비와 비각의 두 내용이 어사(御賜), 내사(內賜)라고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국왕이 내렸다는 뜻으로 의미는 같다.   비의 형태와 크기는 가첨석 높이46cm 폭 50cm 두께20cm 비신94cm 폭34.5cm 두께14.2cm 좌대 높이32cm 폭74cm 두께64.5cm이다. 좌대는 익살스러운 거북형상이다. 경남 창원에 있는 부인(夫人)의 옥비는 숙인(淑人) 창원박씨지묘(昌原朴氏之墓)라 되어 있고 좌대는 없다.   높이118cm 폭47cm 두께19cm이다. 두 비석 모두 조선 초기의 일반적인 묘비형태로 가첨석(加檐石)과 비신(碑身)을 하나의 돌에 새겼다.   조치우는 1472년(성종3) 14세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고 1494년(성종25)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고(丙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고, 연산군(燕山君) 초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으로 춘추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 (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전북금석학회 오초(吾超) 황안웅 선생 일행과 답사중인 필자(왼쪽에서 첫번째)   1498년(연산군4)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의 진언(進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이후 중종 때 대구부사, 사옹원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字)는 순경(舜卿), 호는 정우당(淨友堂)이며 자호(自號)이다. 이는 연꽃이 진흙 속에서도 깨끗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의 호(號)를 삼았던 것이다.   그의 4대조는 신충(信忠)으로 고려조에서 희천군사(熙川郡事)를 역임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창업 후 강계도병마절도사(江界道兵馬節度使)를 내려 조선의 조정에 참여를 바랐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영천지역에 낙향하였다.   고려말에 화약제조를 하고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한 최무선(崔茂宣) 장군은 그의 처종조부(妻從祖父)이다. 증조(曾祖)는 승지(承旨)를 역임한 상명(尙明)이며 조부(祖父)는 경무(敬武)로 중군부사직(中軍副司直)을, 아버지인 말손(末孫)은 한림(翰林)을 역임하였다.   조치우의 《묘갈명 (墓碣銘)》을 찬(撰)한 통정대부행동래도호부사(通政大夫行東萊都護府使) 이휘녕(李彙寧)은 공에 대해 배움에 독실하고 실행에 힘썼으며 玉(옥)처럼 일생을 살았던 사람으로 평(評)하였다. 또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치우(致虞)의 아들 효연(孝淵)의 묘명(墓銘)에 원정공(院正公, 조치우)은 성품이 지극한 효성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다가 복중(服中)에 졸(卒)하였다고 평(評)하였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옥은 5가지 덕(德)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 광택이 있고 밝으면서도 온화함은 인(仁) 둘째, 속의 빛깔과 결을 그대로 내비치는 투명함은 진(眞) 셋째, 두드렸을 때 생기는 음의 순수함과 낭랑함은 지(智) 넷째, 깨지더라도 굽지않는 것은 의(義) 다섯째, 각은 예리하지만 어떠한 것도 상하게 하지 않음은 공정(公正)함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옥은 인간의 고매함, 순결함, 아름다움, 영구함 등과 결부시켜 고귀하게 생각했다.   조선시대 청백리 중 옥비가 내려진 것은 조치우가 유일하다. 조치우의 옥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90호), 부인 창원박씨 옥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록의 계절 5월이다. 푸르른 잎사귀만큼이나 시원한 나무 아래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도 부모님이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오신 덕택이 아닌가!   지극히 작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볕 같은 어버이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선현들의 지극한 부모공경을 통해 오늘의 내가 서 있는 건 아닌지 생각에 잠겨본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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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5-07
  • [이경국의 투자이야기 35] 난방은 장작불로 조명은 등잔불로 !
    '이경국의 경제칼럼'을 집필중인 이경국 프리랜서 작가   인류가 최초로 불을 사용한지는 50만년 전이라 한다. 최초의 인류가 300만년 전이라 한다면 참으로 오랜기간 생식을 하면서 어둡고도 춥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없다. 불의 사용은 인간이 지구에 존재한 이래 가장 큰 변화가운데 하나였다고 본다. 음식을 익혀서 먹음에 따라서 맹장의 기능이 서서히 상실 되어 버린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초식을 할 때는 맹장에서 소화액이 분출되었으나 고기를 익혀 먹음으로 인하여 그 기능이 점차 퇴화되어 버린 것이다. 용불용설이 적용된 것은 인체에 3군데 정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맹장이 그러하다. 포경과 사랑니도 그렇다.  포경은 원시시대에 가시덤불을 다닐 때 성기보호를 해 주었으나 지금은 무용화 되었다. 그러나 진성포경 (완전포경)이 아니면 포경수술은 하지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 들여야 한다. 유아때 포경수술을 많이 하는데 이는 아이에게 치명적이라 한다. 그리고 사랑니도 먹이를 익혀먹는 화식(火食)을 하면서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게 되었다. 골치거리인 사랑니다. 그러나 이름은 가장 이쁘다. 불은 아무래도 장작불이 아름답게 보이며 인상적이다. 인체에도 좋다. 숯가마를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닥불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지니고 있을 것이다. '불보듯 한다'고 불은 인간의 가슴을 데펴주는 더운 기운을 말한다. 전기가 가장 편리하긴 하지만 쌀익는 냄새는 장작불인 가마솥의 냄새와 전기밥통의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난방은 장작불이 최고다. 분위기 자체가 시적이며 감흥을 자아내는 것이다. 장작은 자연이다. 반면 조명은 등잔불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마음속에 아련히 남아있다. 등잔은 오랜기간 어둠을 밝혀준 고마운 것이며 밤에만 사용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지금은 장식용으로 손색이 없는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설사 등잔밑이 어둡긴 하더라도 불꽃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인류는 돈벌이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서 달리했다. 화폐기능이 조개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에 이르고 있다. 물론 장작과 호롱불을 쓰던 시대의 화폐는 엽전이었다. 엽전은 기생집에서 효력을 발휘하였으며, 조선시대 육이전에서는 교환수단으로 많이 사용했다. 엽전꾸러미 보다는 마패(馬牌)의 힘이 세었다. 이는 자고로 금력보다는 권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불은 어둠을 밝히지만 밤의 어둠은 치부를 가리게 하고 사랑의 도수를 높혀주는 신의 묘약 역할을 한다. 인간은 어두운 밤의 시간에 생산을 하는 고등동물이다. 잉태의 시작은 낮시간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밝아짐에 따라서 돈벌이의 방법도 다양해져 나갔다. 지폐와 동전의 매력에서 카드로 긁는 시대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거래의 볼륨이 주식보다 비트코인이 두배인 경우도 있다. 지금 말썽이 많다. 세금은 거두어 들이면서 위험에 따른 책임은 회피한다. 이는 우리민족이 외상에 강한 민족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강원랜드를 방문하여 일행과 한컷을 남기다. 좌로부터 남홍만 에드원 회장. 필자. 권오춘한학자. 최순주여사. 류춘규 박사.    주식투자도 외상거래 (미수금이나 신용융자 등)를 즐기고 있으며, 당일 거래인 데이트레이딩에도 거래량이 엄청나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장사가 무려 2352개나 된다. 주식투자인구 1000만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투자도 즐기면서 하는 여유가 필요한 시대이다. 주식투자는 '돈놓고 돈먹는 곳'이란 천박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투자자는 분산투자에 약하다. 올해 삼성전자 주식만 20조원 넘게 사들였다. 이는 전체 매수한 금액의 절반에 이르는 액수이다. 대체로 손실을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정액은 삼성전자에 투자를 하고 다른 종목에도 어느 정도는 투자를 하여야 재산증식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일정액은 현금으로 남겨두는 것도 지혜로운 투자의 한 방법인 것이다. 이는 조명은 은은한 등잔불로 하면 좋다는 이치와 같다. 장작불은 화끈하지만 조명과는 거리가 멀다. 캠프파이어로 즐기는 대상이다. 반딧불과 눈(雪)으로 조상들은 책을 보았던 것이다.(螢雪之功)   그 덕이 얼마나 컸던가....   지금의 반도체산업은 그 당시의 두뇌사용으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너무나 편하다 보니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등산을 하면서도 주식매매가 가능한 시대이다. 그러나 쉽다고 돈이 벌리는 것은 아니다. 신경은 훨씬 더 쓰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싶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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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국의 경제칼럼
    2021-05-01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4]유학(儒學)과 향교(鄕校)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1980년대 노벨(Nobel, Alfred Bernhard)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석학들이 오늘의 인류 문제를 해결할 종교와 사상이 무엇인지 토론한 자리에서,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500년전 공자(孔子)를 찾아가야 한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하였다.   중국의 석학 모종삼(牟宗三) 교수는 기독교와 불교 유교의 특성을 기독교의 원죄의식(原罪意識), 불교의 고의식(苦意識), 유교의 우환의식(憂患意識) 이라고 설명하였다.   유교는 불교와 기독교처럼 내세(來世)에 대한 입장보다 현실적인 부분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은 기독교는 신을 근본으로 하고, 유교는 사람을 근본으로 한다고 항상 말한다. 이 말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유교는 결코 현실의 유한한 사람을 중심으로 삼고서, 천(天)을 단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사람의 깨우침을 통해 천도(天道)를 체현할 것인가를 중시한다.   사람이 깨우침을 통해 천도를 체현하는 일은 사람의 성을 극진히 다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으며, 기독교는 죄악을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 보지 않고, 사람의 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아 죄악을 극복할 수 없으며, 반드시 기도에 의지하여 上帝(하나님)의 은혜 베푸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구향교 대성전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는 국립대학인 성균관(成均館)이 있으며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서울에는 사학(四學), 지방에는 향교(鄕校)가 있다.   향교는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 서무(西廡)와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를 두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반면 사학(四學)에는 공자 이하 여러 유교 선현들을 제향하는 문묘(文廟)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향교의 운영을 위해 성균관처럼 학전(學田)을 국가에서 5∼7결(結)의 토지를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운영은 수령(守令)의 인사(수령의 七事)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書院)의 발흥으로 부진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쓴 것을 보면 관학(官學)의 쇠퇴가 극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이후 사학(四學)이나 향교 등의 관학이 쇠퇴하고 대표적 교육기관인 서원이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사상적으로 모든 계층에서 삼강오륜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고 때로는 강요하였다.   삼강은 정(貞) 충(忠) 효(孝)의 사상으로 세상의 중심인 부부, 국가 그리고 가정의 윤리이다. 오륜 역시 부모 자식 간의 인(仁), 군신간의 의(義), 부부간의 지(智), 장유 간의 예(禮), 붕우간의 신(信) 등 인간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덕목들이다.    유학교육이 중심이었던 교육기관도 관리양성을 위한 준비기관으로서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 준비를 위한 코스는 서당-사학·향교-성균관을 통하여 과거를 준비하였다. 지방의 중등 교육기관인 향교도 서원이 교육의 중심공간으로 자리 잡은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서원과 마찬가지로 선현들의 제사 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석전(釋奠)의 유래와 의미   석전은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석전은 선성과 선현들의 학덕과 사상을 단순히 이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숭모하고 존중히 여기며 스승을 높이 받들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기풍을 체득하기 위하여 문묘에서 거행하는 의식이다.   석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주례』·『예기』 등 유교 경전에 기록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은 묘사에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했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이밖에도 여러 제향(祭享)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석(釋)은 ‘놓다(捨也)’·‘두다(置也)’의 뜻이고, 전(奠)은 ‘그치다(停也)’의 뜻으로서, ‘제물을 올릴(薦饌)’ 따름이고 ‘시동을 맞이하는(迎尸)’ 등의 제사 절차는 갖추어 베풀지 않았다.   공자 동상    일설에는 소[牛]·양(羊) 등 고기를 제물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菜: 빈조류(蘋藻類)]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의식을 석채(釋菜)라 한다.   석채는 또 석채(釋采)라고도 쓰는데 이는 선사에게 채백(采帛)을 올려 폐백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전은 석채·석전(舍奠)·정제(丁祭)·상정제(上丁祭) 등의 일컬음이 있다. 정제니 상정제니 하는 것은 석전을 봄 2월(음력), 가을 8월(음력)의 상정일(上丁日: 첫 丁日)에 모시기 때문이다.   *(사액서원:賜額書院)- 中丁日, 일반서원-下丁日)   중국에서는 상대(上代)에 이미 산천·묘사에서 석전을 올렸으며[『주례(周禮)』, 「춘관(春宮)」], 때로는 출정하여 죄 있는 자를 잡아오면 학교에서 석전을 베풀어 선사에게 아뢰기도 하였다[『예기(禮記)』, 「왕제(王制)」]. 전자를 정기적(常時)인 석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부정기적(非時)인 석전이다.   학교에서는 봄에 시(詩)·서(書)·예(禮)·악(樂)을 가르치는 교관(敎官)이 선사에게 석전을 올렸고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라고 『예기』 「문왕세자」편에 기록되어 있다. 선사(先師)란 앞서간 전대(前代)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여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봄에 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대(周代)에는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을 선성(先聖)으로 모시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였다. 한(漢)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선성·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러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같은 제왕은 주공(周公)을 선성, 공자를 선사로 삼아 공자의 고택을 찾아 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魏)·수(隋)·당(唐)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明)나라에 와서 태학(太學)의 문묘를 대성전(大成殿)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太學: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봉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648년(진덕여왕 2)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 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10철(十哲: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국자감(國子監) 또는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쳐 불렀다]에 문묘[선성묘(先聖廟) 또는 문선왕묘(文宣王廟)라고도 일컬었다]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獻酌)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398년(태조 7)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四聖)·10철과 송조6현(宋朝六賢) 등 21위를 봉안하고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을마다 모두 330여의 향교가 있어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매년 두 차례씩 석전을 올렸다.   지금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남한에 있는 231개소)에서는 해마다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의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 결정으로 과거 동무·서무에 봉안하였던 112위 중 우리나라 명현 18위는 대성전(大成殿)에 종향(從享)하고 중국 유현 94위의 위패는 매안(埋安)하였다.    석전제 봉행절차    집례 및 묘사(廟司)가 먼저 섬돌 아래에서 4배(拜)를 올린 뒤 손을 씻고 자기 위치에 선다.   ① 창홀(唱笏):집례가 홀기를 부르기 시작한다. 전악(典樂)이 악사(樂士)와 무생(舞生)을 인솔하여 정해진 위치로 입장하면, 찬인이 대축(大祝)과 모든 집사(執事)를 인도하여 섬돌 아래서 4배하도록 한다. 대축과 모든 집사가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각각 자기 위치로 가서 선다.   묘사 및 봉향(奉香)·봉로(奉爐)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開櫝)한다. 알자와 찬인이 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정해진 위치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행사의 시작을 청하고 당하악(堂下樂)이 연주되고 문무(文舞)가 시작되면 헌관과 참례자 일동이 4배한다.   ② 전폐례(奠幣禮):폐백을 드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안자 신위, 증자 신위, 자사자 신위, 맹자 신위 순으로 세 번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당상악(堂上樂)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③ 초헌례(初獻禮):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으로 가면 당상악과 문무가 시작된다. 공자 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서서 꿇어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초헌관은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 신위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④ 아헌례(亞獻禮):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 아헌관이 공자·안자·증자·자사자·맹자 순으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堂下樂)과 무무(武舞)가 연주된다.   ⑤ 종헌례(終獻禮):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예로, 종헌관이 앞의 순서대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를 춘다.   ⑥ 분헌례(分獻禮):앞서 술잔을 올린 공자와 네 신위 이외에 종향(從享)되어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드리는 예이다. 동종향분헌관(東從享分獻官)과 서종향분헌관(西從享分獻官)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동종향 17위, 서종향 17위에 술잔을 올린다.   ⑦ 음복례(飮福禮):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먹는 예이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음복하는 곳으로 나아가 술과 포를 음복한다. 대축이 철상(徹床)을 한다. 당상악을 그치고 당하악을 연주한다.   ⑧철변두(撤籩豆) : 대축(大祝)이 변(籩)과 두(豆)를 거두는 의식이다.   ⑨망료례(望燎禮):제사가 끝나서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보는 예이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축문 사르는 곳으로 나아가면 대축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른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을 아뢰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감으로써 행사가 모두 끝난다.   *(위에서 종헌례가 끝나고 음복례로 바로 하는 곳도 있으며 음복례 후에 철변두를 생략하고 망료례(望瘞禮)를 하는 곳도 있다)   석전은 선성과 선현들의 학덕과 사상을 단순히 이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숭모하고 존중히 여기며 스승을 높이 받들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기풍을 체득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선성선사(先聖先師)들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였거나 가까이 도달한 사람들이기에 우리 선조들의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후학들은 위패 앞에서 성인이 되고자 다짐하는 의식이기에 기복(祈福)적인 종교의식과는 다른 교육적인 성격을 지닌 의식인 것이다.   오늘날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석전의식(釋奠儀式)이 가슴에 쉽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롤모델 이었던 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들의 삶을 조명해 자신을 돌아보는데 게으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 선현들의 예지와 실천정신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고 나아가 미래를 바라본다면 공자님 말씀처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 오피니언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4-30
  • [이경국의 투자이야기 34] 다리보다 고쟁이가 더 길면 !
    '이경국의 경제칼럼'을 집필중인 이경국 프리랜서 작가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고 끝이 없을 정도로 과욕을 부리면서 변신도 잘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욕심가운데 얼굴에 손을 자주 대다가 그만 성형중독자가 많이 생긴다고 한다. 중국에서 성형원정까지 온다고 하니 기가 찬다. 한때 미국으로 원정출산을 가던 모습이 떠 오른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은 관리만 잘하면 되는데도 마구 고치는 세상이다. 마음도 다스려 나가면 좋을텐데 얼마나 변덕을 부리고 있는지 칠면조마음이란다. 얼마나 여러 군데에 손을 대길래 견적이 수천만원이 나온다니 웃을 수 밖에 없다. 최근 사람들의 눈섭은 거의 비슷하게 일자로 그 모습이 같다. 문신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물려받은 몸(얼굴)을 그대로 유지하여야만 옛날에는 효였다.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도 지나치면 병이다. 자신감이 부족한데서 기인되는 것이다. 현대인이 돈에 대한 집착이나 성형중독은 거의 병적인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사회가 얼마나 타락을 했으면 장기를 떼어  매매를 하는지 인간사회의 극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허욕이 불러온 우리사회의 수치스러운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규모있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대다수 무리하다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기업도 문어발식 경영으로 문을 닫은 경우가 많다. 자고로 돈은 손님이 오면 대접할 정도면 족하다 했다. 빚을 내어 주식에 투자하여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요행을 바라는 자가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복권투자(?)금액이 사상 최고란다. 중독이 걸린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근검절약하면서 저축을 했던 가정은 IMF때도 거뜬하게 견디어 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정답이 없다. 그러나 절약이 밑거름이 되어 번성한 가정은 부지기수로 많다. 물신주의에 깊게 빠져버린 현대인들의 일그러진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주말에 삼각산의 도봉산 둘레길을 걷다가 전망이 좋은 곳에서 한 컷을 남긴 필자의 모습이다. 연두색 산이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광경이 마냥 좋기만 하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작은 야구공 크기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도 땅에다 금을 그어 내땅이네 하면서 등기하는 모습을 보면 여러 생각이 스치게 한다. 인류의 위대한 성인의 삶은 청빈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만 하여도 성철스님도 법정스님도 그렇게 사셨다. 김수환 추기경도 통장에 잔고를 남기지 않았으며, 등기된 땅은 한평도 없었다. 그러나 큰 울림을 남기는 것이다. LH사태의 정신나간 공직자의 허욕을 보라! 민주화로 포장된 자들의 돈을 밝히는 몰골로 입만 떼면 정의의 사자처럼 상대를 적폐로 몰아간다. 아무리 고쟁이의 길이가 길더라도 다리보다 더 길어서는 곤란하다. 고쟁이는 짧아야 실용적이고 또 생활에 편리하다. 욕심을 덜 내고 허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넘어진다 하여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거듭 밝힌다. 주식투자를 주식(主食, live- on)으로 하면 큰코를 다치거나 아니면 패가망신을 당하기 십상임을 곱씹어 보았으면 싶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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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국의 경제칼럼
    2021-04-24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3] 화랑정신, 삼국유사의 출발점, 청도 운문사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사찰의 새벽은 예불과 함께 사방의 정적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원광법사(圓光法師) 보양대사(寶壤大師) 일연선사(一然禪師) 등 시대를 초월하는 승려들이 머물다간 청도 운문사(雲門寺)는 원광법사에 의해 화랑(花郞) 추항(箒項)과 귀산(貴山)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전해지고, 일연선사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서술이 시작된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삼국유사》는 군위 인각사(麟角寺)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바로 그 시작은 운문사(雲門寺)였다.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호거산 자락에 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에 자리 잡고있는 이 사찰은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어느 신승(神僧)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풍수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가 기본인 건물의 배치에서 운문사는 특이하게 호거산(虎踞山)을 마주 보며 위풍당당(威風堂堂)하게  자리하고 있다.        운문사는 본래 다섯 개(동쪽: 가슬갑사, 서쪽: 대비갑사, 남쪽: 천문갑사, 북쪽:소보갑사, 중앙:대작갑사)의 갑사 중 하나로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하였다.   오갑사(五岬寺)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의 불교중흥과 삼국통일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때다.  주변에 화랑의 훈련장을 설치하여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던 화랑정신의 발상지로서도  운문사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양대사에 의해 2차 중창되면서 작갑사라 고쳐졌다.  후삼국 통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보양대사에 대한 공으로  왕건이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토지 500결을 하사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운문사 오백전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보양스님과 배나무이야기) 가운데  승려 보양에 대한 기록인 보양전에도 그의 고향과 성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의 신분이 분명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삼국유사 보양 이목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보양이 불법 공부를 하고 돌아올 때 서해의 용왕이 금빛 비단의 가사 한 벌을 주고  용왕의 아들로 하여금 그를 모시도록 하면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적병을 피할 수 있고 몇 해가 지나면 불법을 보호하는 임금(왕건)이 나와서 어지러운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 하였다.   이 이야기는  운문사가 왕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려주고 왕건이 지원한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운문사가 대찰로서 일어서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운문사라 이름 지은 것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나라 때의 고승 운문문언(雲門文偃)을 기리기 위함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면서 갈파했다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에 대하여 "자기 앞에서 다시 한번 그런 소리를 하면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한 괴짜 승려였던 그를 위해서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다간 선승들의 모습이 호방하다 못해 시공을 초월한 모습이 연상된다.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길은 도심의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어머니 품속 같은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경내에는 신라 말기의 석조여래좌상(보물제317호), 그 좌우에 있는 사천왕석주(보물제318호) 삼층석탑(보물제678호), 비로전(보물제835호) 등을 비롯하여 30여 동의 건물이 있다.     특히 나한을 모신 오백전은 영천 은해사(銀海寺) 거조암영산전(居祖庵靈山殿, 국보 제14호)에 모셔져 있는 오백나한과 음미해보면서 살펴보는 것도 관람의 묘미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    또 운문사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는 400여년이나 된 나이를 가졌으면서도 아직도 푸르른 청년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 소나무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인의 술인 막걸리 25말을 물과 섞어서 1년에 두 차례 마시면서 이 절의 상징적인 수호목(守護木)으로 서 있다.      운문사는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강원으로 해방 이후 한때 대처승(帶妻僧)이 거주하기도 하였으나 1950년대 교단 정화 이후 비구니스님들의 전문강원으로 개설,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교육 기관으로  국내 첫 승가대학원(僧伽大學院)으로 개설되어 비구니스님들이 공부에 정진하고 있다.    운문사는 원광법사에 의해 추항과 귀산에게 전해진 〈세속오계〉로 화랑정신의 발원지이면서, 고려 충렬왕이 일연선사를 1277년부터 81년까지  운문사 주지로 임명해 《삼국유사》의 집필이 시작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정신문화가 흐려지고 있는 이 시대에 유구한 역사가 살아있는 운문사를 다녀옴도 좋을듯하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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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4-23
  • [이경국의 투자이야기 33] 가시나무는 아름드리 자라지 않는다
    '이경국의 경제칼럼'을 집필중인 이경국 프리랜서 작가   34억 축생(畜生)가운데 인간이 욕심이 가장 많다고 한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있으니 비교와 경쟁에 일생 동안 시달려야 하는 운명은 어쩔수 없다. 하루도 시름밭을 매지 않는 날이 없이 살아가는 거북스러운 존재가 인간이다. 모든 동물은 오직 먹고 번식만을 위한 본성에 충실히 한다. 그리고 번식이 끝나면 죽음이 빠르게 닥치고 만다. 인간의 본능은 다른 동물과 달리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단산(斷産)을 하고 나서도 살아온 세월만큼 더 살아간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살펴보면 효도의 길을 막게 하는 원인이다. 특히 병상에서 오래 버틴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장수가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은 경제력이 약하거나 몸이 병약한 경우이다. 부모의 부양기간이 너무나 길며 부담 또한 크다고 야단들이다. 노인에게 돌보아 줄 손주조차 없으니 그 존재의미마저 퇴색되어 버린 듯 하다. 농경시대에는 그나마 노동력으로 도움이 되었으나 지금은 유휴노동력으로 가치를 상실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전철의 경로우대석은 우대라기 보다는 고립된 섬같이 보인다. 노인석을 표시하는 그림도 볼품이 없다. 등굽은 노인의 모습에다 지팡이가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을 볼 때마다 노인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자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예쁜 할미꽃 두송이'로 표시를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고 노후가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외로움을 달래야 하고 소일거리도 있어야 할 것이다. 주식투자만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도 철이 들고부터는 라이프사이클 전체를 분산관리하여야 노후의 생을 잘 보낼 수  있다고 본다. 쪽방에 독거하는 노인의 모습도 비참하겠지만 공원마다 넘치는 노인을 보면 복지사회와 달리 현금 몇푼씩 쥐어주는 정책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형편이 좀 낫다는 경우는 기껏해야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거의 치매로 고생을 하고 있다. 어쩌다 한번 찾아 오는 자식을 생각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코로나를 핑계삼아 자식들은 아예 방문을 않는다는 것이다. 생지옥이 땅속 그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과 피를 나누어 주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키운 자식이다. 사실 잘살고 못살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5천년을 가난하게 살아온 민족인데 이 정도 살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孝心은 어찌하여 박물관이나 古書에만 있다는 말인지..... 주식투자의 목적이 돈을 벌어서 이웃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단순한 것이라면 사실 돈이 불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집중과 선택을 하여 타이밍을 기막히게 정하여 그 돈으로 부모님을 모신다고 작정을 하면 천지신명이 돕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죽어 나가는 경우는 절대 행복한 죽음이 아님을 대다수 사람들은 모른다. 살던 곳에서 가족의 음성을 들으면서 고종명에 이르는 것이 임종의 최고의 순간이다.   전시회 사진감상에 빠져 있는 필자. 연꽃이 두송이로 제목이 '동행'이다. 외롭지 않아 그 모습이 좋다.   인간은 생명이 있는한 고유한 존재이다. 천시당하거나 천박하게 보낼 대상이 아닐진데 우리사회는 부조리가 너무나 심하다. 자녀에게 쏟는 사랑의 일부라도 부모를 위하여 쓴다면 사회의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자식의 변은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모는 흘리는 침도 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다. 이런 마음인데 어떻게 주식투자로 증식을 바란다는 말인가? 세상은 인드라망 (그물코) 으로 연결이 되어 있기에 善業에만 善果가 열리기 마련이다. 동기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돈을 벌어서 애첩과 즐겁게 보내겠다고 작심을 하고 투자를 하는 행위는 허공에 헛발질하는 짓에 불과하다고 본다. 결과가 뻔하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조절이 되어가기 마련이다, 평생 선업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보고 주식투자에 매진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원금은 증가되어 있을 것이다.     가시나무의 일종인 아까시나무의 꽃과 줄기   투자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이 바로서길 기대하는  바람에서 이러한 칼럼을 쓰는 것이다. 크게 자라는 나무는 씨앗이 크지 않다. 가시나무는 아름드리 나무로 자리지 않는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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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국의 경제칼럼
    2021-04-18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2] 반정(反正)과 혁명(革命)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왕조시대에는 반정(反正), 현대에는 혁명(革命)이라는 구실로 정당화시키는 권력의 탈취는 시간이 지나면 그 정당성의 여부가 판가름난다.   왕의 기록을 《實錄》이라 하고 왕에서 축출된 군(君)의 기록을 《日記》라 한다.   《일기》에 기록된 두 명의 군주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 그들은 과연 《실록》에서 배제시킬 정도로 무능하고 권력을 남용한 것인가?   조선에서 일어난 두 번의 반정에서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줄을 알지 못하고 신료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은 능양군(綾陽君) 종(倧)이 차기 왕으로 기획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顏) 유순정(柳順汀) 등이 이끈 반정 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강화도 교동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장녹수(張綠水) 등 기생들과 사치 방탕한 생활을 하고 광폭한 정치를 했다는 것이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자들의 변명이었다.     연산군일기   흥청거리다는 말은 당시 궁중에 붙잡혀온 기생(妓生)들인 흥청(興淸)에서 유래되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유교정치에서 연산군은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을 비롯한 정치적 실정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병상에 누워 연산군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정치행태를 나무라던 할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죽자 3년 상(喪)을 치르지 않고 한 달 만에 장례를 끝내버린 역월지제(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3년 상을 25일 동안 복(服)을 입고 장례를 치름)를 행하여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孝)를 저버려 패륜아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이 죽자 수륙재(水陸齋)를 행하고자 하였고 생모인 폐비 윤씨 무덤의 천장(遷葬)을 하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는 종교의식으로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어왔다.   숭유억불 (崇儒抑佛) 국가인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는 1395년에 견암사(見巖寺)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왕씨(高麗王氏) 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수륙재를 행하였고, 강력한 왕권국가를 지향했던 태종 이방원도 국가에서 행하는 수륙재 폐지상소문에 대해 오래된 유풍이라 폐하지 않고 시행하였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 10년(1515)까지 계속된 수륙재를 연산군 때 신료들이 유독 심하게 반대한 것은 부모를 위하여 효를 실천코자 했던 연산군에 대한 신료들의 반감이 작용한 태도로 보인다.    《연산군일기》에 대한 기록은 재위 3분의 2 기간은 성군의 길로 되어있다가 마지막 부분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인 것도 반정(反正)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승자의 역사기록이기 때문이다.   또 부왕인 성종이 대간권(臺諫權) 등 신권을 확대하여 왕을 업신여기는 능상지풍(凌上之風)이 곳곳에 나타나 연산군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상황에 도달하여 강력한 전제왕권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에게는 우군(友軍)이 없었고, 독점한 권력은 민본정치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신의 권력에 치중함으로써 정당성과 정통성을 잃어버린 만고의 폭군으로 전락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부정하고 반정으로 등장한 인조(仁祖)의 세력들도 명나라에 치우친 편협한 명분론을 세우다가 그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淸)에게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두 번의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반정은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의미이고 혁명은 급격하게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이다.   반정이나 혁명의 정의(定義)는 정도(正道)로 역사의 원칙(原則)과 순리(順理) 그리고 사명(使命)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현 정치도 마찬가지다. 촛불 혁명을 내세워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지선주의(至善主義)의 자아도취에 빠져 패거리 정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금배지를 누가 달아줬는데 배신을 하나!'  오만의 극치 언어가 난무한다.    4.7 보궐선거가 대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  금배지, 그 권한, 국민이 달아줬다. 권력은 유한하고 역사는 영원하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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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4-17
  • ‘이 금배지를 누가 달아줬는데 배신을 하나!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왕조시대에는 반정(反正), 현대에는 혁명(革命)이라는 구실로 정당화시키는 권력의 탈취는 시간이 지나면 그 정당성의 여부가 판가름난다.   왕의 기록을 《實錄》이라 하고 왕에서 축출된 군(君)의 기록을 《日記》라 한다.   《일기》에 기록된 두 명의 군주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 그들은 과연 《실록》에서 배제시킬 정도로 무능하고 권력을 남용한 것인가?   조선에서 일어난 두 번의 반정에서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줄을 알지 못하고 신료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은 능양군(綾陽君) 종(倧)이 차기 왕으로 기획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顏) 유순정(柳順汀) 등이 이끈 반정 세력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강화도 교동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장녹수(張綠水) 등 기생들과 사치 방탕한 생활을 하고 광폭한 정치를 했다는 것이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자들의 변명이었다.     연산군일기   흥청거리다는 말은 당시 궁중에 붙잡혀온 기생(妓生)들인 흥청(興淸)에서 유래되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유교정치에서 연산군은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을 비롯한 정치적 실정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병상에 누워 연산군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정치행태를 나무라던 할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죽자 3년 상(喪)을 치르지 않고 한 달 만에 장례를 끝내버린 역월지제(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3년 상을 25일 동안 복(服)을 입고 장례를 치름)를 행하여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孝)를 저버려 패륜아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부왕인 성종이 죽자 수륙재(水陸齋)를 행하고자 하였고 생모인 폐비 윤씨 무덤의 천장(遷葬)을 하고자 하였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   수륙재는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는 종교의식으로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어왔다.   숭유억불 (崇儒抑佛) 국가인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는 1395년에 견암사(見巖寺)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왕씨(高麗王氏) 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수륙재를 행하였고, 강력한 왕권국가를 지향했던 태종 이방원도 국가에서 행하는 수륙재 폐지상소문에 대해 오래된 유풍이라 폐하지 않고 시행하였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 10년(1515)까지 계속된 수륙재를 연산군 때 신료들이 유독 심하게 반대한 것은 부모를 위하여 효를 실천코자 했던 연산군에 대한 신료들의 반감이 작용한 태도로 보인다.    《연산군일기》에 대한 기록은 재위 3분의 2 기간은 성군의 길로 되어있다가 마지막 부분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인 것도 반정(反正)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승자의 역사기록이기 때문이다.   또 부왕인 성종이 대간권(臺諫權) 등 신권을 확대하여 왕을 업신여기는 능상지풍(凌上之風)이 곳곳에 나타나 연산군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상황에 도달하여 강력한 전제왕권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에게는 우군(友軍)이 없었고, 독점한 권력은 민본정치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신의 권력에 치중함으로써 정당성과 정통성을 잃어버린 만고의 폭군으로 전락하였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부정하고 반정으로 등장한 인조(仁祖)의 세력들도 명나라에 치우친 편협한 명분론을 세우다가 그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淸)에게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두 번의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반정은 정통으로 돌아가거나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의미이고 혁명은 급격하게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이다.   반정이나 혁명의 정의(定義)는 정도(正道)로 역사의 원칙(原則)과 순리(順理) 그리고 사명(使命)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현 정치도 마찬가지다. 촛불 혁명을 내세워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지선주의(至善主義)의 자아도취에 빠져 패거리 정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금배지를 누가 달아줬는데 배신을 하나!'  오만의 극치 언어가 난무한다.    4.7 보궐선거가 대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  금배지, 그 권한, 국민이 달아줬다. 권력은 유한하고 역사는 영원하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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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4-17
  • [이경국의 투자이야기 32] 웃음보다 우는 기간이 길다
    '이경국의 경제칼럼'을 집필중인 이경국 프리랜서 작가   인간의 일평생 웃는 시간의 총합이 70 여일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는 시간은 자그마치  7배인 16개월이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자꾸만 웃으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뇌는 거짓으로 웃어도 속는다고 하니 이런 행운이 어디 또 있다는 말인가! 웃거나 운다는 시간의 총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란 본래 '고해의 바다'임을 알고 있어야 마음을 다스려 낼수가 있다는 의미이다. 생존이란 어차피 생각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 생각이 시름밭에 자꾸만 뛰어 든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개인마다 일상의 習을 잘 들이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본다. 힘든 일이 생기면 자기최면을 걸거나 아니면 몇 년 뒤 오늘을 생각하는 버릇을 지니고 있다면 고비를 수월하게 넘길수 있다는 것이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매입즉시 며칠간 상한가로 오르면 좋다는 환상에 젖는다. 일종의 희망영역이긴 하지만 공상에 가깝다. 지속적이면 망상이다. 인간의 희망영역을 끌여 들이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위험투성이인 주식시장의 지뢰를 보지 못하면서 분산투자에도 지극히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외국인에 비하여 일반투자자는 수익율에 있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는지 종합주가지수는 바위처럼 엎드려 있다. 3000P를 축으로 목운동만 하고 있다. 매수한 종목이 움직이지 않으면 투자자는 속이 터진다. 심하면 천불이 난다. 인간은 누구나 참는데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진득이 보유하지 못하고 종목을 갈아 타고 마는 것이다. 강건너 풀이 더 푸르게 보이는 이치에 따르고 만다.   해공 신익희선생이 살던 종로구 효자동 옛집앞에서 한컷을 남긴 필자. 이 집은 해공이 국회의장직을 그만두고 대통령에 출마하여 전주 유세차 가던중 열차안에서 급사하기까지 살던 집이다.   올 1분기 순매수 '빅10' 추정수익률을 보면 소위 말하는 동학개미는 마이너스  7.3%지만 외국인은 플러스  11.3%의 성적표다. 만인이 좋아하는 삼성전자 주가는 8만원 대에서 깊은 잠속에 빠져있다. 場이 침체되어 전종목이 엎드려 있으면 포기를 하겠지만 다른 종목이 상승하고 있으면 견디지를 못하고 갈아타는 액션을 취해 버린다. 주식은 귀신같게도 그때부터 매수한 종목은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하고 매도한 종목은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기본적인 분석에는 맹탕이면서 그래프에 의한 주가의 기술적인 분석에만 치중하면 크게 낭패를 당할 우려가 있다. 어차피 인간세상은 평화는 짧고 전쟁은 길다. 그리고 웃음보다 7배나 더 울면서 살다가 떠날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주식투자로 낭패를 당하여 목숨을 잃은 주부투자자가 있지만 심각하게 보도조차 하지를 않고 있다. 생계에 의한 일가족 집단자살이 의외로 많이 발생하고 있다. 개인부채가 자그마치 세계1위가 되고 말았다. 현금살포는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사탕발림의 효과다. 인간이 태어나 내집마련 한번 하지를 못하고 생을 마치는 세태가 목전에 다가와 젊은 이들은 초조해 한다. 발등의 불은 뜨거운줄 알지만 앞으로 닥칠 화마(火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주식은 움직이기 때문에 위험신호가 닥치면 이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글까 하겠지만 여유돈으로 투자를 하지 않고 빚을 내어서 투기를 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의미이다. 이에 주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일언을 드리는 것이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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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국의 경제칼럼
    2021-04-10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1] 재주 많아 불행했던 최고 여류시인 허난설헌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후회 없이 산 사람이 있을까!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 명문가인 양천허씨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강릉김씨의 딸로 태어나 비교적 자유로웠던 친정집을 떠나 평탄치 못한 시집살이를 겪으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한 인생의 3대 후회를 하게 되었다.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름(楚姬)이 있다는 것, 호(號, 蘭雪軒)와 자(字, 景樊)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자유로움과 학문의 수준을 가늠하고도 남는다.   흔히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16세기 이후부터 서서히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지 그 이전에는 남녀균분상속(男女均分相續) 등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허난설헌이 태어났던 시기는 16세기 후반기이므로,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서서히 여성이 성리학(性理學)적인 질서에 의해 남성 중심적인 사회로 변화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허난설헌 초상   그녀는 오빠인 허성(許筬), 허봉(許篈), 동생인 허균(許筠)과 더불어 4허(許)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녀가 문장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 분위기와 아버지의 열려있는 세계관, 그녀의 영민함 등이 함께 어우러진 덕이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고, 특히 둘째 오빠인 허봉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오빠의 친구인 이달로부터 동생 허균과 함께 공부하였다.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 사람인 이달(李達)은 서얼(庶孼)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허난설헌이 나이 8세 때 신선 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백옥루(廣寒殿白玉樓)의 상량식에 초대받아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있는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의 한시는 그녀의 천재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5세에 결혼했던 시가(媤家) 안동김씨의 김성립(金誠立) 집안 역시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였지만 그녀가 죽은 뒤에 김성립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훗날 자형(姊兄)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고 평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누님과 결혼생활이 원만치 못했던 것에 대한 감정도 실려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지나치게 영민하면 남편이 부담스러운 점도 있듯이 다음에 전해오는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남편 친구인 송도남이 있었는데 매번 그 집에 들릴 때마다   ‘오 김성립 멍성립 덕성립 있는가? ' 라고 놀리면 김성립은 대꾸를 못하고 당하기만 하였다. 이를 보고 허난설헌이 ‘오 맨드라미 귀뚜라미 송도남이 왔는가? '라고 응대방법을  알려줘 응대하자 송도남이 대답을 못하면서, '자네 부인이 가르쳐 주었지? '라고 하자 김성립이 무안해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남매를 두었으나 일찍이 요절하였고,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죽어 어머니로서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거기다가 친정의 아버지와 오빠의 객사, 동생의 피화로 친정집이 풍비박산이 되고, 남편과의 원만치 못한 부부관계 등 삶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神仙)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여성으로서의 가사에 충실치 못한 것에 대한 시어머니의 학대 등으로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지만 동생 허균은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蘭雪軒集》을 펴냈다.   허난설헌의 작품 한견고인서 / 앙간비금도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이 발간되기에 이른다.   허난설헌은 중국의 문인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허난설헌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허난설헌의 시는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재평가되기도 하였으나,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唐詩)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작용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탁월함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평범한 양반가의 부인으로 살았다면 그녀는  조선과 여자, 남편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유로운 이 땅의 여성들을 보면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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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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