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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7] 권력과 아버지의 역할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15대 광해군(光海君)은 애초에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용상의 자리에 오른 군주이다. 선조의 생부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휘:초)으로, 중종과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 소생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방계승통(傍系承統)을 연 군주이고 광해군 역시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존의 자리에서 신분적인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역사에서 만약은 존재하지 않지만,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光海君)도 어머니인 공빈김씨(恭嬪金氏)가 만약 오래 곁에 있었다면 아버지로부터 덜 시달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명분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된 왕이다.   광해군의 비극은 아버지 선조가 물려준 불안정한 권력 때문이었다. 물론 선조 자신의 출생의 컴플렉스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선조 자신이 확고한 의지로 세자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주지 못한 것에서 발생했다.   또 전란 중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선조가 요동에 망명할 의도로 조정을 갈라 광해군에게 맡긴 소조정(小朝廷))로 인한 굴욕감은 선조에게 광해군에 대한 악감정을 주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선조는 인간을 대하는 도량은 그리 넓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어린 나이에 정통성 없는 즉위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이면서도 타고난 품성이 더해졌고, 이로 인해 선조의 신하들에 대한 불신으로 드러났다.     선조 어진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mgate9009/221641808035    이는 광해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이러한 선조의 태도는 광해군에게는 적잖은 상처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로 조선 역대 세자의 행적을 살펴보더라도 누구도 광해군에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물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부왕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임란 후 새로 맞이한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은 뒤에는 선조가 서자인 광해군을 대하는 태도는 세자 시절은 물론, 왕이 된 뒤에도 불안정한 권력을 유지하는데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청(鞫廳)이 열릴 때도 직접 심문에 참여하기도 했고, 무리하게 궁궐 공사에 매달리기도 했다. 부왕 선조가 민생을 염려해 궁궐 건축은 생각지도 않은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내면으로 다져진 권력의 힘이 약했던 광해군이 외면적인 면에 치중한 것도 왕의 권위를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도 형들의 생활을 극진히 살피는 등 우애가 깊고 왕실을 우대한 것과 달리 광해군은 왕실 사람들에게 대단히 차갑게 대했다.   이러한 점은 모두 선조가 누린 권력의 안정성과 광해군 권력이 가진 불안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만약, 광해군도 선조처럼 안정된 권력을 물려받았다면, ‘폐모살제’의 폐륜을 저지르고, 무모하게 궁궐 공사를 추진했을까? 광해군의 비극은 아버지 선조와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의 우유부단한 결정과 판단의 흐림이 역대 성군(聖君)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던 임금의 재목을 패륜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군권(軍權)을 자신이 가지고 뒤를 돌봐주었던 것과 달리, 용렬한 군주 선조는 국가의 안정과 아들의 선정(善政)보다 자신의 체면이 우선이었던 것이기에, 광해군은 권력의 칼날에 늘 노심초사(勞心焦思)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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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7-30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6]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의도와 중화주의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한국과 가장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중국은 1949년 공산주의화 이후 1992년 우리와 정식수교를 체결했다.   이후 양국은 모두 경제적인 면에서는 2.3위 교역 상대가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유사(有史)이래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전해받은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수난을 당해왔던 시절이 더 길고도 깊다.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한사군(漢四郡)의 설치, 고구려의 수·당 전쟁(隋·唐 戰爭), 고려· 조선의 공녀문제(貢女問題)를 비롯하여 가까이는 6,25 전쟁까지 우리와는 늘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국가이다.    한·중 수교 10주년이었던 해에 중국사회과학연구원(中國社會科學硏究院) 소속 변강사지연중심(邊疆史地硏中心)이 주관한 2002년 2월28일부터 2006년까지 5개년 계획의 프로젝트의 ‘동북공정’은 중국 정부의 승인하에 중국사회과학원과 랴오닝(遼東)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이 연합해 추진한 국책사업으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중국은 치밀한 계산하에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통일 후까지 대비하여 고대 우리의 영역인 고구려· 발해 ·고조선 부여 등을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해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등 세계 각국에 홍보해오고 있고, 중국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 소개란에도 고구려를 삭제시키는 역사적 왜곡과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구려를 고대 중국 동북지방에 있었던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출처:다음 백과사전)   중국은 '동북공정’ 작업 이전에, 현재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티베트 망명정부의 실질적 지도자이며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라마(Dali Lama, 14대)의 나라로 유명한 티베트를 ‘서남공정(西南工程)’이라는 명목으로 1950년 침공하여 1965년 서장자치구(티베트족 자치구, 西藏自治區)라는 이름으로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에 편입시켜 버렸다.   그동안 티베트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여왔지만 한번 무너진 국가는 다시 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음을 산교육으로 말해주고 있다.   중국은 북한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북한을 한국의 통일이후 북한지역을 중국 영토화하는 것부터 간도 귀속문제( 일본이 1909년에 청나라와 체결한 협약으로, 일본이 남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한 조약) 차단, 한국의 영향력 차단 등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치밀하게 추진하고 있다.   반만년 가까운 우리 역사를 그들의 야욕에 의해 우리나라의 역사 시간을 2천년 안팎으로 줄이고자 하는 야만적인 행위에, 모든 것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 저들은 우리가 강하게 대응할 때 눈치를 보고 조심하는 습성이 있다.   2013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이 제시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전략(2014년~2049년)도 세계 경제 중심을 중국이 차지하겠다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야욕이 깊게 깔려져 있기에 우리는 물론 참여한 주변국이 치밀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중국에 경제적으로 예속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중국은 그들이 세계중심이고 과거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듯한 오만한 자세로 중화주의에 사로잡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영역까지 세계를 제패(制霸)하고자 하고 있다.    ‘서남공정’ ‘동북공정’에 이어 ‘일대일로’는 신중화주의(新中華主義)의 시작이다. 지나간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우리 모두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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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7-23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5] 국민의 해(害)를 제거해준 최무선(崔茂宣) 장군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임진왜란(壬辰倭亂)의 3대첩인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진주대첩(晉州大捷, 1차1592년, 2차1593년)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년)은 우리 전사(戰史)에 길이 빛나는 전승(戰勝)이며 국민적 자긍심을 일깨워 준 쾌거였다.    이 역사적 사건은 국민 대부분이 역사의 기본지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0여년 전 한 위인의 피와 땀의 집념어린 노력이 뒷 받침이 되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 죄가 있을 시 용서함)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4월19일 임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원나라 화약기술자 이원(李元)을 통해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화약기술을 익혀 국산 무기화에 성공시킨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武人)인 그는 국가와 백성들이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로 고통당하던 때에 선견지명으로 화약을 무기로 제조하여 국가의 해(害)를 제거한 명장(名將) 최무선(崔茂宣,1325~1395) 장군이다.   그 위대함에 비하여 그에 대한 고려 시대의 기록은 미비하다 못해 불성실한 것이 사실이다. 정이오(鄭以吾)의 《화약고기(火藥庫記)》에 따르면, 최무선은 중국말을 잘했다고 하고 《세조실록》에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화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하는 등 단편적인 자료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빈 조선의 창업주(創業主)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되살아났다.     최무선은 1328년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마단리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는 관청)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 현 경북 영천)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다.      최무선 초상   1377년(우왕 3) 10월 판사(判事) 최무선이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화약 및 화기(火器)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였다.(이것을 설치할 당시 화약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대부분의 관리들은 반대와 시기, 비난을 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火石砲:화약을 사용하여 돌을 발사하는 포))·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인 주화(走火) 등을 사용하여 1380년(우왕 8) 가을에 왜선(倭船) 5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   고려군에게 화약이 있는지 모르고 있던 왜구들이 배를 한곳에 집결시키자 화포를 발사하여 배를 모두 격침 시켜 버리자 배를 잃은 왜구 잔당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였던 이성계가 여러 장수와 함께 모두 섬멸시켰다.   최영(崔瑩) 장군의 홍산대첩(鴻山大捷, 1376년, 현 충남 부여지역) 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 1380년 전라도 지리산 부근)과 함께 왜구격퇴의 3대첩으로 불리는 진포 전투 이후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1383년에 관음포(觀音浦) 전투에서도 120여척의 왜선이 침입하자 격퇴하여 우리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최무선은 1395년 4월 19일에 죽음을 앞두고 부인 이씨에게 유언으로 아들인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아들은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고, 이후 1401년(태종 1) 군기시(軍器寺)에 특채되어 화포 개발 실험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화통도감은 설치 10여년이 지난 고려 창왕 때(1388~1389) 없어지고, 군기시(軍器寺)에 흡수되었다).       최무선 과학관에 전시된 화포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있었으나 不傳)는 그의 아들 최해산을 통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기술로 전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조선군을 압도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화포 기술에서 앞서 있었던 것도 그의 화약제조 덕분이었다.   최무선은 고려조에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사후 조선왕조에서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최무선 가문은 아들 최해산(崔海山)· 손자 최공손(崔功孫)· 증손자 최식(崔湜) 등 4대에 걸쳐 국방관련 업무에 참여하여 국방의 기초를 다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명문가였다. 국가를 유지하는 중심축인 군사력(hard power)을 통해 구름이 드리워졌던 고려말과 조선(朝鮮)을 건재케 한 그는 위대한 경세가(經世家)였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국가운영의 중심인 경제문제와 국방문제에 자유로울 수 있는 상황인지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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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7-16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4] 조선 최초 통신사 박서생(朴瑞生, ?~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오늘날 세계에 많은 나라들이 존재하지만, 문을 닫고 살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을 비롯한 극소수의 나라들 밖에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무역을 통해서 생존이 좌우되는 나라이기에 외교 관계의 중요성이 숙명으로 수용해야 될 정도로 중차대하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과는 애증이 심하게 교차한다. 모든 면에서 일본에 뒤진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단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조선이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足利義滿) 장군도 책봉을 받자, 중국·조선·일본 간에는 사대·교린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交隣國)이 되고, 조선 국왕과 막부장군(幕府將軍)은 양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상호 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13년(태종13)이었으나, 이 사행은 정사 박분(朴賁)이 중도에서 병이 났기 때문에 중지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명칭을 가지고 일본에 파견된 사행은 1428년(세종10) 정사(正使) 박서생(朴瑞生) 이하의 사절단으로, 이들의 파견 목적은 장군습직(將軍襲職)의 축하와 전장군(前將軍)에 대한 치제(致祭)였다.   이후 통신사의 파견은 정례화되어 조·일 양국간에 우호교린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통신사의 파견 이유나 목적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의 경우 일본 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왜구 문제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막부장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禁壓)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조선 전기 일본 국왕사(國王使: 일본국왕 원씨(源氏)가 조선으로 보낸 사신)의 상경로가 임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로로 이용되는 등 피해가 심하자, 조선에서는 일본 국왕사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일본국왕사의 파견은 중단되고, 대신 막부장군에 관한 일은 차왜(差倭:외교적인 현안 문제가 있을때마다 임시로 파견된 외교사절)가 대신하게 된다.   조선최초 통신사인 박서생의 호는 율정(栗亭) 관향(貫鄕)이 비안(比安), 자(字)는 여상(汝祥) 이다. 그의 스승 길야은(吉冶隱)으로부터 밤나무 아래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배웠으므로 율정이라 호를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점(漸)이며 무관직 5품관 중랑장(中郞將) 벼슬을 지냈다.   박서생은 생몰년 미상으로 일부에서 제시하는(1371~1436) 것도 있지만 현재까지 박서생에 대한 자료는 병화(兵火)로 인하여 소실되어 생몰년이 부정확하다.   율정은 1401년(태종 1)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28년에는 통신사로 다녀왔다. 일본통신사로 갔을 때 배운 水車의 사용을 조정에 건의하여 농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박서생이 역사에서 유명하게 된 것도 최초의 조선통신사란 점이다. 통신사의 호칭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36년부터인데, 이러한 배경에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동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명·청의 세력 교체와 그에 따른 중화질서(中華秩序)의 붕괴는 조·일 양국에 새로운 연대감과 탈중화(脫中華)의 교린관계를 구축하게 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청(淸)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를 배제하고, 조·일 양국의 독자적인 대등 외교의 수립이라는 외교사적인 의미가 있다.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시문·글씨 등을 많이 남겼으며, 그것은 병풍· 회권(繪卷)· 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통신사 행로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 강홍중(姜弘重)의 ≪동사록(東槎錄)≫,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 조명채(曺命采)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기록들은 당시 통신사에 참여한 인물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겨 놓은 것으로, 당시 문물교류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외교로 생존해야 하는 우리 현실에서 국내용(?) 도토리 키재기식 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판의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면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미래에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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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7-09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3] 용상(龍床)의 주인은 누구인가?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현실에서 꿈을 가지고 사는 일은 희망을 가지게 하는 행복한 일이다. 또 잠자리에 들면서 꾸어지는 꿈은 앞날을 예시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돼지꿈에 행운을, 태몽(胎夢)에 별똥별(유성,流星), 호랑이, 봉황(鳳凰), 용(龍), 위인(聖人) 등의 꿈을 꾸면 큰 인물이 날 징조라고 반겼다.   해동불교의 종사로 추앙받는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어머니 태몽에 유성이 들어오는 꿈을,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어머니인 사임당(師任堂) 신씨가 용꿈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어머니는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송시열의 고향으로 찾아온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꿈은 인간 세상에서 힘든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긍정의 효과를 가지게 하기도 한다.   동·서양에서는 신성시하는 동물을 통해서 이상세계(理想世界)에 대한 동경과 인간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양의 상상(想像)의 동물로 신수(神獸)인 기린(麒麟), 용(龍) ,신조(神鳥)인 봉황(鳳凰) 등이 있다.     기린·거북·용과 함께 사령(四靈)으로 불리는 봉황, 덕이 높은 天子가 나오면 나타난다고 한다.   용은 고대부터 문명의 발상지인 인도·중국·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에서부터 상상의 동물로 등장하고 있다. 순수한 우리말로 미르, 이무기, 이시미, 영노, 꽝철이, 바리 등으로 사용되어왔고 농경제 사회에서 주요한 물과 연관이 있는 동물이다.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長)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아(廣雅)』익조(翼條) 에서 1)머리(頭)는 낙타(駝)와 비슷하고, 2)뿔(角)은 사슴(鹿), 3)눈(眼)은 토끼(兎), 4)귀(耳)는 소(牛), 5)목덜미(項)는 뱀(蛇), 6)배(腹)는 큰 조개(蜃), 7)비늘(鱗)은 잉어(鯉), 8) 발톱(爪)은 매(鷹), 9)주먹(掌)은 호랑이(虎)와 비슷하다고 묘사해놓았다.   용은 남성 또는 남근을, 여의주는 여성의 체모(體毛)를 상징한다.   용은 왕을 상징함으로 왕이 집무하는 곳 지붕에 용마루가 있다. 최고 권력자인 왕은 한 명이기에 왕비가 거처하는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왕이 머무르는 평상이 용상, 왕의 얼굴을 용안(龍顏), 왕의 옷을 곤룡포(袞龍袍), 왕의 즉위를 용비(龍飛)라고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목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용은 크게 3종류로 나누는데 하늘에 살고있는 가장 강력한 용(龍), 뿔이 없고 바다에 살고 있는 여(蜧), 비늘이 달렸고 산속의 늪과 동굴에 사는 교(蛟)가 있다.   용은 신라시대의 기록에서 기우(祈雨)의 대상으로 용상(龍像)을 만들어 빌었다는 기록과 오해신(五海神) 즉 동·서·남·북· 중앙의 다섯 용왕에게 비오기를 빌고 토룡제(土龍祭) 등을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수신(水神)으로서 뿐만 아니라 최고의 능력자인, 왕이 용으로 상징되었다.   신라의 석탈해(昔脫解)는 용성국(龍城國) 왕과 적녀국(積女國) 왕녀(王女) 간의 소생이며,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아버지도 용건(龍建)의 설화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용과 왕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우리나라의 명승지에 용과 관련된 지명으로 용정(龍井) 용지(龍池) 용추(龍湫) 용담(龍潭) 등 용의 지명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용을 신성시하고 숭배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왕의 업무를 만기(萬機)라고 하는 것도 용처럼 만가지 기교를 부려야 된다는 의미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잠룡(潛龍)들이 많이 움직이고 있다. 국민들이 바라는 진룡(眞龍)이 나타나 실타래처럼 얽힌 국정의 난맥상을 만가지 기교를 부려서 대한민국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기회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길 학수고대(鶴首苦待)한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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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7-03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2] 최고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박연폭포 서화담(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로 유명한 조선 최고의 명기이며 시조 시인인 황진이의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 기명(妓名)은 명월이다.   황진이의 출생에 대해서는 황진사의 서녀(庶女)라는 설과 맹인(盲人)의 딸이라는 설이 있지만 전자인 진사의 서녀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황진사(黃進士)로만 알려져 있고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진현금(陳玄琴)이다. 그녀는 18세 때 개성의 병부교(兵部橋) 아래에서 여러 여자들과 빨래를 하다가 다리 위를 지나던 선비(황진사)와 눈이 맞아 황진이를 낳았다.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그녀가 기생이 된 동기라고 전해진다.   15세 때 이웃집 총각이  황진이를 보고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상여(喪輿)를 운구하는데 황진이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아서  황진이가 자신의 속적삼을 상여 위에 얹어주자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8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떼고 각종 《유교경전(儒敎經傳)》과 《열녀전(列女傳)》 등을 읽었으며 시와 그림 음악도 익혔다.   천하일색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시와 악기연주에 탁월했던 그녀는 명기(名妓)로서 조선의 선비들과 당당하게 대응했다.   그녀는 뭇 남성들에게 사랑과 흠모의 대상으로 조선 제일의 기생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였고 또 격이 맞지 않는 인사들은 추호(秋毫)도 눈길을 주지 않은 도도함을 잃지 않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명성을 크게 떨쳤던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송순(宋純)의 어머니) 회갑연에서 노래를  불러 주변인의 칭송과 참석했던 소실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의 미인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황진이. 도도함, 당당함... 그녀만의 매력이었다. (사진, 연기자 하지원씨)   미모와 재기 넘쳤던 그녀는 당대를 대표하는 인사들을 희롱하고 시험했다.   당대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일컫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환속시켜버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허균의 《성웅지소록》에 지족선사와의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도 나에게 무너졌다는 황진이의 독백이 있는데 실제로 지족선사가 무너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당대의 최고 학자로 일컫던 서경덕(徐敬德 호는 화담)을 찾아가 그를 유혹했지만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이후 황진이는 서화담을 평생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벽계수(본명은 이종숙(李終叔), 거문고의 명수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가 황진이를 보고 만나고 싶어 안달하는 종친 벽계수를 이 한 수로 벽계수를 말 위에서 떨어지게 한 유명한 시조이다.   황진이는 고관이었던 소세양(蘇世讓, 호는 陽谷, 형조, 호조, 병조판서를 역임)과의 한 달을 같이 지내면서, 스스로 한 달만 같이 지내면 다시 그녀와 지내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소세양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마지막 날 아침 황진이가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을 노래하자  소세양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을 스스로 파기했던 것이다.   달 아래 오동잎 떨어지고 들국화는 서리 속에 누렇구나 다락은 높되 하늘과는 한 자 사이 사람이 취하는 것은 천 잔의 술이라 흐르는 물 거문고처럼 차갑고 매화 향기는 거문고 속에 스민다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뒤에 그리운 정 푸른 물결처럼 길으리   황진이는 요즘 세태로 봐도 파격적인 계약동거를 했다.   당시 사대부이며 명창이었던 이사종(李嗣宗)과 예술적인 교감이 통해 6년 동안 각자 집에서 3년씩 살기도 했고 재상의 아들이었던 이생과는 전국을 유랑하기도 하였다.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걸식하기도 하고 때로는 몸을 팔아 살아가기도 했다.   그녀가 죽고난 뒤 백호 임제(林悌; 1549(명종4)~1587(선조20), 조선 전기의 문신)는 그녀 무덤 앞에서 이 시로 노래하며   청초(靑草)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은 어디가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임제 또한 고리타분하고 좀상스러운 군상 속에 살아가는 시대에 술과 시로 호방하게 살다간 위인이었다.   황진이도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을 수 없듯이 죽음에 이르러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시신을 산에 묻지 말고 동문 밖 물가에 버려 새와 짐승의 밥이 되게 하여 자신을 모든 여성으로 하여금 경계로 삼으라고 한 것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그녀의 무덤은 장단의 변두리에 있다.   도도함, 당당함, 거리낌 없이 살다간 황진이, 그 시대 남성의 애간장을 태우며 멋있게 살다간 위인이었다.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기를 원했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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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6-25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1] 동학(東學)의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여성관(女性觀)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동학은 남녀평등의 모토를 제시함으로서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동학 교조(敎祖)인 수운(水雲) 최재우(崔濟愚,1824~1864)의 가화지순(家和之順)의 사상은 2대 교조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의 부화부순(夫和婦順)사상으로 이어져 동학의 근대적 여성관을 확립케 되었다.   부부(夫婦)가 화순(和順)함은 우리 도(道)의 초보(初步)이니 도의 통불통(通不通)이 도무지 내외(內外)의 화불화(和不和)에 있나니라. / 내외(內外) 화(和)하지 못하고 타인(他人)을 화(和)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집에 불난 것은 끄지 않고 타인의 불을 끄는 자와 같으니라. / 그러므로 부인(夫人)을 화(和)하지 못하면 비록 날로 삼생(三牲)의 용(用)으로써 천주(天主)를 위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감응(感應)할 바 없으리라. / 부인이 혹 부명(夫命)을 쫓지 아니하거든 정성을 다하야 배(拜)하라. 온언화순(溫言和順)으로서 일배이배(一拜二拜)하면 비록 도척(盜跖)의 악(惡)이라도 감화가 되리라.   도를 얻기 위하여는 가화(家和)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 남편의 도리를 강조한 것이며, 나아가 인간은 평등하므로 여성에 대해서도 지극해야 함을 도인들에게 효유하려고 《도수사(道修詞)》에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     동학의 창도는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보다 성숙되어 가고있던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삼아 민중들의 욕구를 집약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인간평등사상(人間平等思想)에 연원을 둔 동학의 여성관은 서구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아닌 우리 내부의 의식성장을 통해 나타난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으며 이는 근대적 여성관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세기 이후 서세동점의 민족적 위협에 대한 국가보위 의식과 국난극복의 민족구원사상으로서 외래 종교인 천주교의 도전을 민족적 주체와 자립, 자주의식으로 응전 극복하려는 주체적 민족의식의 구체화 시킨 것이다.   동학은 신과 인간이 대립이 아닌 같은 의지(意志)로 묶여 있으며 인간은 한울님과 중개자(仲介者)가 필요 없이 직접 통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신인일체(神人一體)의 신관(神觀)·우주관(宇宙觀)· 인간관(人間觀)이요,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보는 통일원리(統一原理)요, 자유·민주와 평등·복지를 동시에 추구하고 양극의 사상이념을 극복하는 통일이념이었다.   서구의 역사관이 어둠의 과거에서 빛의 미래에로의 일직선적 진보를 가정하는 반면, 해월의 역사관은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에로의 무한 확장이라는 입체적이고 순환론적인 진보관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의 차이는 역사 주체인 인간관에 대한 차이를 낳는다. 서구적 모더니티(Modernity) 인간이 이성적 인격을 제시한다면 해월이 제시하는 근대인은 하늘적 인격체이다.    동학을 대중화 시킨 최시형     해월은 삼경(三敬)사상을 전개하면서 하늘, 사람, 사물에 대한 경외심을 일체화시킴으로 인간과 가까이 갈 수 없는 신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마음속에 한울님의 존재를 인간과 같이 있게 함으로써 현실적인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던 절대다수의 백성들로부터 크게 감응을 주었던것이다.   동학이 단시일 내 민족적인 종교사상으로서 백성들에게 뿌리를 내린 것은 타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내세관(來世觀) 보다는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민중들에게 다가감으로써 보다 현실화, 대중화할 수 있었다.   동학은 교조인 최제우의 인내천(人乃天)과 2대 교조인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인간존중을 극대화한 최고의 휴머니즘 사상을 가진 종교로서 인간의 피안(彼岸)을 요원한데서 찾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에서 찾음으로써 민족의 종교사상으로 정립할 수 있었고 조선의 봉건체제를 무너뜨리는 동력을 제공하였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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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6-19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30]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지장도량(地藏道場) 의성 고운사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경상북도 제일 중심부에 자리한 의(義)와 예(禮)의 고장인 의성은 마늘, 산수유, 홍화, 작약, 사과, 소고기 등이 유명한 곳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또 유불(儒佛) 등을 비롯한 대표하는 유적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조문국 사적지, 공룡화석 발자국, 빙계계곡, 유가의 향이 묻어나는 전통마을 사촌마을과 산운마을, 불향(佛香)이 머무는 전통사찰인 고운사(단촌면) 대곡사(다인면) 지장사(안사면) 수정사(금성면) 정수사(구천면) 만장사(비안면) 주월사(사곡면) 옥련사(안평면) 운람사(안평면) 등은 모두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고운사 전경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할 정도로, 지장보살님의 자비하신 풍모가 널리 알려진  신라 천년의 고찰 고운사.   고운사는 해동 화엄종의 시조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에 의해 신라 신문왕 원년(681)에 창건된 해동 제일의 '지장도량(地藏道場)'으로 명성에 비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고즈넉한 산사의 기운을 느끼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운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의상대사(義湘大師), 수월선사(水月禪師), 최치원(崔致遠, 857~?),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이 거쳐 간 곳으로 창건시에 고운사(高雲寺)에서 최치원이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한 후, 그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제 246호    약사전의 약사불, 지장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일반 사찰과 좀 특이한 것이 있다면 경내에 연수전(延壽殿)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는 1774년(영조20)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1887년 고종 때 중수되었다.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왼편에 있는 고불전(古佛殿)에는 옆쪽에 이 지역의 수령을 지낸 현령(縣令) 이용준(李容準)의 선정비(善政碑)가 있는데, 돌로 된 석비(石碑)가 아니라 쇠로 만든 철비(鐵碑)로 세심하게 살펴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사찰에서의 볼거리로서 흥미를 더해 준다.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46호) 고운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고운사 가운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연수전(보물 제2078호), 사적비, 사보(寺寶)로 전해지고 있는 오동학촉대(烏銅鶴燭臺) 등이 있다.   고운사의 지형이 풍수설에서는 연꽃이 반쯤 핀 부용반개형(芙蓉半開形)의 명당 터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해동 제일의 지장도량으로 사후세계와 유서가 깊은 곳이다.       고운사 延壽殿 편액 海士 金聲根 글씨    한때 우리 사회에 사후세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와 교훈으로 삼고자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탐욕 가득한 사람들에게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일깨워 준 시간이 되었다.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은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 버린다고 하고 또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고 하였다.   철저한 자기 수행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소유의 삶을 깨우쳐 준 스님의 말씀이 요즘 생각이 들게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그릇의 크기가 있다. 자신의 무게는 자신이 아닌 남들이 더 잘 안다. 마치 자기 이름을 자신보다는 남들이 더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 의성에서의 남다른 인연 >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인연복(因緣福)이라고 한다.   의성에서 유적조사를 할 때 향토사학자이신 해암 김재도선생, 소암 강상문 선생, 회보 김종우 전 의성문화원장 등의 어른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김재도 선생은 〈독도 사진전〉을 비롯하여 의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역사를 사진 속에 담아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게 활동하신다. 현재는 가업으로 이어온 금성 탑리 버스정류장 옆에 ‘해암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교직에 오랫동안 몸 담으신 강상문 선생은 늘 따뜻하신 말씀으로 사람들을 대하시는 분이며 태고종(太古宗)인 학림사(鶴林寺)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이 집의 별미는 사모님께서 내어주시는 다시마튀각으로 그 맛이 일품이다.   김종우 전의성문화원장은 문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의성문화발전에 노력하시다가 몇년전에 고인이 되었다. 현재 이 지역 문화를 신승업, 김홍배, 신두철, 박금숙 선생 등 제씨(諸氏)들과 함께 의성의 향기를 이어가고 있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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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6-12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9] 김삿갓이 주는 여유와 해학의 멋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 흰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 /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 술 한 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      조선 철종 때 방랑시인 김삿갓의 삶을 유행가 가사에 담아 현재까지도 공허한 남자들 가슴 한켠에 애잔하게 다가와 사랑을 받고있는 노래이다.    또 이 노래는  한 전직 대통령이 개사해서 구수하게 부른  최고 애창곡이기도 하였다.   천재시인이며, 제도권에서 벗어난 일탈자이며, 방랑자로 일생을 살았던 김병연(金炳淵, 1807~1863).   당시 서민들은 그의 시에 울고 웃었다. 그는 1807년 3월13일 경기도 양주에서 김안근(金安根)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며, 일명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이라 불렸다. 그의 운명은 1811년(순조11)에 일어났던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당시 그의 조부였던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죄로 멸족을 당하다시피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김병연이 강원도 영월에서 치러진 백일장에서 장원급제 하였으나, 당시 백일장(白日場)의 시제(試題)가 홍경래 난 때 투항한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을 꾸짖고, 그와 반대로 결사 항전하여 죽은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의 충절을 찬양해 장원급제하여 집으로 돌아왔으나, 과거시험의 시제를 묻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그의 조부라는 말을 듣고 그 충격으로 인해, 조상을 욕하고 급제했던 자신을 죄인이라 하여, 붓을 꺾고 일생동안 삿갓을 쓰고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했다고 전해지는 사실인데, 위의 내용은 주로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병연 묘   그러나 1925년에 간행된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기록 등을 담은,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이와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김삿갓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 평안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시인 노진(魯禛) 이라는 사람이 김삿갓을 조롱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삿갓이 22세부터 방랑의 길을 걷는데, 백일장 시험을 치를 때는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당시의 나이로는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또 김병연은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당시 서울의 세도가 집안의 인물들과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어울리다가 나중에 자신의 신상이 탄로 나서 그들로부터 배척당하자, 더 이상 자신의 신분 상승이 불가함을 깨닫고, 한동안 고뇌하다가 방랑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아들 익균(翼均)이 아버지를 찾아서 몇 번 상봉하여 귀가를 애원했지만, 그때마다 아들을 따돌리고 전국을 유랑하다가 전라도 동복(화순)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묘소는 강원도 영월에 있으며 1987년에 시비가 세워졌다.   김병연은 시를 짓는데 있어서도 천재적 자질과 함께 당시의 한시의 격식을 깨뜨린 시를 많이 지어 조선의 한시가 김병연에서 망했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사십촌중오십식(四十村中五十食, 망할 놈의 마을에서 쉰 밥을 주네)     인간기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다 있는가)     불여귀가삼십식(不如歸家三十食, 집에 돌아가 설익은 밥 먹는 것이 낫겠네)     집 떠나면 고생이고 서러움이 많은 것인데, 어느 고을에서 푸대접당한 것을 숫자를 가지고 절묘하게 시를 지어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양반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시사를 풍자, 조롱하고 또한 객수를 달래기 위해(?) 기생 가련(可憐)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과의 로맨스도 풍류남아의 멋을 더해준다.   학생들과의 답사는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다. 점선 속 얼굴이 필자다.   단천(端川)에서의 곱단이와 하룻밤의 정을 나누면서 처녀의 그것을 의심스러워 허탈한 마음으로 곰방대를 물고 담배연기를 뿜으며 시를 지었다.   모심내활(毛深內闊) 털이 깊고 속이 넓으니 필과타인(必過他人) 필시 타인이 지나갔구나   영민한 곱단이가 김삿갓의 어깨너머로 보며 자신의 순결을 의심하는 김삿갓에 대응하여   후원황률불봉탁(後園黃栗不蜂坼) 뒷동산의 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벌어지고   계변양류불우장(溪邊楊柳不雨長) 시냇가의 버드나무는 비가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   곱단이가 위의 시로 천하의 김삿갓에게 KO패(?)를 안겨줬다.     은근과 끈기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그 속에서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 주변을 감동시키고, 언어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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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순의 역사 콘서트
    2021-06-05
  • [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8] 공정(公正)과 적폐(積弊) 사이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 방송, 신문 등 각 언론매체의  최고의 화두는 이명박 대통령이 말한 공정(公正)이었다.   공정한 거래, 공정한 처사 등 공정이란 말에 대해 사전에서는 공평하고 정대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항상 이런 말이 떠도는 때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공정보다는 그 반대였음을 방증한다.   고금의 역사에서 지도자들이 민본주의(民本主義)와 정의(正義)를 외치지 않았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광복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사(政治史)를 살펴보아도 수 많은 정당(政黨)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난립해있었던 때도 당(黨) 이름을 한국, 민주, 새 정치, 정의 등 신선한 용어들이 난무했지만 국민들의 정서를 읽고 실천한 정치인들은 드물었다.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만큼이나 언제나 그들만의 잔치가 변함없이 지속되어 오고 있다.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되던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이 일어나자 왕을 비롯한 관리들과 관군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명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선조(宣祖)는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명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해외 망명이 무산된 것은 어떻게 보면 명나라가 선조의 체면(?)을 세워준 것인지 모른다.   임진왜란 하면 우리 국민들 대부분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하였다는 어느 조사에서처럼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 것은 그나마 우리 민족에게 큰 복이었다.   바다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재해권을 장악해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 못지않게 전쟁이 일어나고 한달도 방어하지 못한 관군과는 달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창의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국가와 백성들을 구하였던 것이다.   충익공(忠翼公) 곽재우 초상   최초의 의병장(義兵將)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비롯해 정인홍(鄭仁弘, 1536~1623), 조종도(趙宗道, 1537~1597), 김면(金沔, 1541~1593) 등 의병장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호남의 곡창지대를 보전시킬 수 있었다.   만약에 육지에서 의병의 활동이 없었다면 우리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는지 모른다. 또 그들의 활약에 힘입어 전란 후 복구사업을 통해 민생이 그나마 빠르게 안정되었던 것이다. 호남의 곡창지대는 조선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전란 후 선조 임금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전란 승리의 공을 명(明)나라에 최우선으로 하였고,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올바른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위정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 자신의 행동이 치부(恥部)와도 같았기 때문에, 의병들의 활동상을 평가절하하고, 목숨을 담보로 하고 국가를 지킨 전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선무공신(宣武功臣)이 18명에 지나지 않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그러나 선조 임금을 호종(扈從)한 관리들에게 준 호성공신(扈聖功臣)이 86명이나 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주변에 있어야 떡고물(?)도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창의한 의병장 곽재우에 대해서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천을 받았지만 살아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을 비롯한 당시의 위정자들은 이들이 향촌세력을 통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해 그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임란의 영웅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장들이 대체로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은둔을 위주로 하였기에 그들은 온전한(!) 삶을 마칠 수 있었다.   곽재우가 도가적(道家的)인 삶을 살았던 것도 당시 국왕 그릇의 크기를 알고 미리 현명하게 대처(?)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임진왜란의 영웅들에 대한 홀대는 국가의 근본이 무엇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자신과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왔던 전쟁의 영웅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 봉사해온 독립지사의 영혼 앞에 우리가 과연 공정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겠는가?   대통령들이 한정(限定)된 관리자의 입장을 망각하고 사정(司正), 적폐(積弊) 청산 등의 독선으로 정치, 경제가 울고 있다.   대통령의 공정, 적폐라는 말 한마디에 촉각을 세워 부산을 떠는 것이 아닌, 법의 잣대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정한 법률적 잣대가 공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정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그 사회가 건강한 선진국이다.   협치(協治) 없이 다수의 힘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불공정의 전횡이 바로 적폐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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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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