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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100] 四物과 四勿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절에 가면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있다. 절에서 아침저녁 예불 때 치는 네 가지 불구(佛具)로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가 있다. 범종은 지옥 중생, 법고는 육지 중생, 목어는 어류 중생, 운판은 허공 중생을 제도한다. 아침저녁으로 사찰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는 소음에 찌든 중생들의 영혼을 위로해준다. 스님들이 심(心)자를 그리며 두드리는 법고 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남을 일깨워준다. 선비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네 친구가 있다. 서책(書冊), 차(茶), 조랑말, 양식 서너 말이다. 서책은 고인(古人)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을 성찰, 삶의 지혜를 터득한다.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의 ‘한가할 때 고인의 책을 보라(閒見古人書)’ 유묵(遺墨)은 그것을 대변하는 것 같다. 차는 무슨 차든 간에 그 향기로 하여 마음이 흐뭇해진다. 〈박현서, 다화의 서정〉 산 높고 물 맑은 나라/ 땅이 신령스런 인걸의 나라/ 고려의 늙은이가 산에 살면서/ 불로장생의 선다(仙茶)나 마시리 〈목은 이색,1328~1396〉 차는 서양인에게 이국 정서의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역설의 대가’ 칭호를 받은 영국의 소설가 체스터튼(Chesterton,G.K, 1874~1936) 은 ‘정(正)과 부정(不正)의 노래’에서 차는 ‘동양의 신사’라고 하였다. 조랑말은 힐링을 함께하는 신선의 도구이다. 자유로운 여행은 곧 자연과 일체 되는 순간을 만끽하기에 선비들은 말을 타고 산수를 유람하면서 입산 기록인 ‘유산록(遊山錄)을 남기기도 하였다. 북송(北宋)의 유학자 정이(程頤,1033~1107)가 지은 잠언(箴言, 교훈과 경계가 되는 짧은 경구)에 사물잠(四勿箴)이 있다. 보는 것(시잠, 視箴), 말하는 것(언잠, 言箴), 듣는 것(청잠, 聽箴), 행하는 것(동잠, 動箴), 곧 사물잠을 말한다. 사람은 이 네가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난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하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말라는 이 말은 현시대에 이르러 전설 속의 문구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사방이 닫혀있다. 언론이 닫혀있고, 국회가 닫혀 있고, 경제가 닫혀있고, 사람들 마음이 닫혀 있다. 개언론(開言論, 언론이 제자리를 찾아야 하고), 개국회(開國會, 국회가 초당적인 열린 자세로 환골탈태 해야하고), 개경제(開經濟, 경제가 회복되어야 하고), 개국민(開國民, 국민 마음이 하나로 열려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늘 위기를 기회로 돌파해 나가는 예지와 역동성을 가진 민족이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조순의 역사콘서트 '역사는 미래다' 연재를 마치며...]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미족한 글에 아낌없이 성원해 주신 대장금 님 이경국 님 등 애독자 여러분께 고맙고 송구한 마음 간직하면서, 2년간 매주 써온 100회 원고를 끝으로 일단 제 글을 마무리합니다. 앞으로 구상하는 기획으로, 여러분과 만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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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9] 태극(太極)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우리나라 국기를 태극기라 한다. 붉은색의 陽과 푸른색의 陰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음양의 상대(相對), 만물의 생성을 지속해 가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태극을 도상화(圖像化)하여 만들었기에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한다. 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천지가 아직 열리지 않고 음양의 이기(二氣)가 나누어져 있지 않은 때를 말하고, 이것이 나누어져 양의(兩儀, 음양)→사상(四象, 음양을 태음 태양 소음 소양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것이 하늘에 있으면 원형이정(元亨利貞, 역학에서 말하는 天道의 네 원리로 사물의 근본이 되는 원리) 이요, 때에 있으면 춘하추동(春夏秋冬)이요, 방위에 있으면 동서남북(東西南北)이요, 사람에 있으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태극의 신화적 배경은 모든 창조 신화에서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천지개벽 직전의 혼돈과 무정형(無定形)의 상황으로 우주란(宇宙卵, Cosmic Egg)이라 표현하며 이는 우주 및 사물의 근원을 상징한다. 태극이라는 용어는 역경(易經)의 계사(繫辭) 上에 나오나 문양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을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설'에서 문양화하고, 우주를 형성하는 음양의 두 원기(元氣)를 그림으로 풀어 만물의 발전 이치를 밝혔다. 그러나 태극의 도형과 관념은 그 이전부터 있었고 활용되어 왔다. 고구려의 벽화 사신도(四神圖)의 현무도(玄武圖)는 음양상화(陰陽相和)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며, 민간에서는 액막이의 부적으로 사용되었고, 경주의 감은사지(感恩寺址) 유적의 석각(石刻)에도 태극도형(太極圖形)이 보인다. 청동기 시대의 동경(銅鏡),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되는 둥근 거울은 그 자체가 태극이다. 고려시대 동경(銅鏡) 장식에도 용 2마리와 여의주가 각각 조각되어 있고, 여의주를 태극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독립문에도 태극기의 원형이 중심에 조각되어 있고 네 귀에 팔괘가 보인다. 하늘, 때, 방위, 사람은 각자 위치에 있을 때 조화를 이루며 상생한다. 하늘의 운기를 어지럽혀 기상이변과 재해가 끊이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구분 점이 없어 사람과 동식물이 고통과 변형되어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사람들이 날뛰니 세상이 조용한 날이 없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우주의 질서와 법칙을 어기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모든 것이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태극은 하늘이다. 한국인의 기상이 그 속에 있다. 가을 하늘을 쳐다보며 노래 불러보자.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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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8] 난초(蘭草)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수로왕(首露王)이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그 일행을 맞이할 때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로 대접했다는 기록에서도 보이듯, 난초의 청초함과 그윽한 향내는 오래전부터 시인 묵객 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가람 이병기의 '난초' 일부분이다. 사군자 중 하나인 난초는 대나무(竹)가 남성적이라면 여성적인 것에 많이 비유되어 왕비가 거처하는 곳을 '난전(蘭殿)' 미인의 침실을 '난방(蘭房)'이라고 한다. '蘭'자를 파자해보면 艸(풀 초)+ 門(문 문)+ 柬(고를 간)이니 향초 중에서 고른 명문의 귀녀(貴女)라는 뜻이 된다. 유교에서 "군자는 덕을 닦고 도를 세우는데 있어서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 『주역』에서도 마음이 착하여 나와 서로 잘 맞으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臭如蘭) 고 하여 난초를 군자의 덕과 선인(善人)에 비유하였다. 중국의 『본초경(本草經)』에도 난초를 기르면 집안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고, 잎을 달여먹으면 해독이 되며 오래도록 마시면 몸이 가뿐해지고 노화 현상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난초 그림을 벽사(闢邪)의 의미로 집안에 걸어두고 염원하였다. 난초는 자손의 번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는 '꿈속에서 난초가 대 위에 나면, 그 집에 식구가 늘어나고 자손이 번창하며, 난초 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 는 말이 전한다. 서양에서 난초의 명칭은 그리스어 'orchis'에서 유래 되었는데 남성의 고환(睾丸)을 가리킨다. 난초의 구근(球根)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난초는 여성과 호화로움을 상징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난초는 'long purples'도 남성을 상징한다. 난초는 동서양에서 남성 여성 모두를 나타냄과 동시에 정신적인 완성, 순결을 말하며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 오늘 아침에 때 묻은 나를 돌아보며, 베란다에서 향을 전해오는 난초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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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7] 호가호위(狐假虎威)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자신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complex)가 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소위 호랑이의 힘을 배경으로 여우가 위세를 부리는 것이다. 호가호위 고사(故事)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나라(楚國)의 재상(宰相) 소해휼(昭奚恤)에 대한 것이다. 당시 북방의 여러 나라가 소해휼(昭奚恤)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초나라 선왕(宣王)이 북방(北方)의 나라들이 왜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는지 강을(江乙)이라는 신하(臣下)에게 묻자, 강을(江乙)이 대답하기를 " 호랑이가 여우 한 마리를 잡았는데,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백수(百獸)의 왕(王)으로 임명(任命)되었는데. 만일 나를 잡아먹으면 하느님(天帝)의 명령(命令)을 어긴 것이 되어 천벌(天罰)을 받을 것이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나를 따라와 봐. 나를 보면 어떤 놈이라도 두려워서 달아날 테니, 어리석은 호랑이는 여우의 말을 듣고 따라갔습니다. 과연 만나는 짐승마다 모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짐승들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를 보고 달아난 것이지만, 호랑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즉 북방(北方)의 여러 나라가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사실 북방의 제국들은 소해휼(昭奚恤)의 뒤에 있는 전하(殿下)와 초나라의 강군(强軍)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꾀 많은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업고 가는 우화(寓話) 그림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부리듯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하는 사람들을 보면 주변인들을 비롯하여 사돈의 팔촌까지의 신분을 망라하면서 이른바 정치인, 단체장,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 등 유명인들을 들먹이고, 심지어 조상의 관직까지 내세운다. 권력의 끄나풀을 부여잡고 있는 무리들이, 천문학적인 나랏돈을 도둑질하고도 뻔뻔하게 나오고, 진짜가 아닌 가짜가 판치는 것은 뒤에서 봐주는 폐쇄적인 그들만의 카르텔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권력자들을 향해 기세도명(欺世盜名, 세상을 속이고 헛된 명성을 도둑질 함)하는 무리라고 비판한, 추상같은 꾸짖음이 이 시대에 더없이 필요한 것 같다.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가면(假面)으로 살아가면 도대체 누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처럼 내세우지 말고,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처럼, ~ 답게 살자. 그것이 진짜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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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6] 故宅과 古宅의 차이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세월의 무게는 연륜이라는 계급장이 따라 다닌다. 오래된 사찰건물이나 양반가의 고택은 세월이 지날수록 고색창연한 멋이 우러난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거주해야 오래 보존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 만큼 사람과 집은 서로 기운이 맞아야 하고, 주인의 행적에 따라 상호 간 수명이 좌우된다. 집의 역사는 선사시대 혈거 주거지가 우주의 모상(模像)이며, 일부 동굴주거지는 아기집과 원형성을 같이하고 있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500년간의 조선 역사에서 의․식․주를 나누어 지역별로 살펴보면, 기호지방은 옷으로(衣), 호남지방은 음식으로(食), 영남지방은 집으로(住) 멋을 뿜어내었다. 특히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이러한 모습은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기호지방은 권력을 잡았기에 관복(官服)으로 위세를 드러내었고, 영남지방은 벼슬길에 나가는 길이 거의 막혀 양반의 체면 유지는 자연스레 집을 통해 드러났다. 호남은 물산이 풍요로웠기에 음식문화의 발달과 예술을 하는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전국에서 고택은 영남지역이 여타지역보다 많이 남아있다. 특히 경주 안동 영주 등의 지역에서, 대표적인 건물들이 현재까지 문화유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청송 송소고택, 영조 때 만석꾼이었던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지은 집 안내판에 보면 고택(古宅)이라 쓴 곳도 있고, 고택(故宅)이라 쓴 곳도 있다. 고택(古宅)은 직접 살았던 집을 말하고, 고택(故宅)은 직접 살지는 않았지만, 연고가 있는 집을 말한다. 전국 명소의 고택은 그 집에 사는 주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나타난다. 경주 최부자집은 12대에 걸쳐서 만석꾼, 청송의 송소고택(松韶古宅)도 9대에 걸쳐서 만석꾼이 나왔다. 모두 적선(積善)을 통해 이웃이 어려울 때 함께 한 명문가이다. 반대로 적불선(積不善)한 부자는 모두 사회 혼란기에 피화를 당하여 흔적조차 없어졌다. 고택은 단지 오래된 집의 개념을 넘어 한국의 전통의 건축미학과 더불어 집주인의 역사적인 행적에 따라 빛과 그림자로 구별되었다. 지난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담긴 고무신 지나간 세월 속에 선조의 묵향(墨香)과 차향(茶香)이 함께하는 고택에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답사를 하면 얻는 게 없다. 주인과 하룻밤을 같이 묵으며 집안의 내력과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왜 이 집이 명문가로 존속 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저녁노을 연기 나는 굴뚝을 바라보며, 고택에서의 하루 쉬어감은 정신없이 살아온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힐링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사람이 너무 편한 것만 찾다 보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조금 불편함 속에 감사함을 배우는 고택체험을 통해, 선조들의 손때 묻은 서책과 책 내음은 영혼을 맑게 할 것이다. 필자는 현재 서원교육을 위해 경북 영천시 대창면에 있는 도잠서원(道岑書院) 주변 정비사업을 하고 있다. 향후 전국은 물론 외국인들에게, 선현들이 교육했던 그 공간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함께 고민하며 해결하고, 체험하는 장이 되길 염원하면서 2년 후 그날이 오길 기대하고 있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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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5] 팔, 구월의 세시풍속(歲時風俗)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농경사회의 풍속으로 해마다 농사력(農事曆)에 맞추어 관례(慣例)로서 행하여지는 전승적 행사 중 추석이 든 8월과 단풍놀이를 하는 9월은 어떤 달보다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이 깃든 달이다. 모든 곡식의 결실이 맺어지는 8월에는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음력 8월 상정일(上丁日)에는 각 지방에서 유생들이 문묘에서 봄에 이어 가을 석전제(釋奠祭,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모신 文廟에서 先聖, 先師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낸다.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에서 상정일(초정일)에 지내고, 사학(私學)인 서원에서는 중정일(中丁日)에는 사액서원(賜額書院)에서 하정일(下丁日)에는 비사액서원(非賜額書院)에서 묘우(사당)에서 배향(配享) 된 선사(先師)에 제사를 지낸다. 15일 중추절은 가을을 초추(初秋) 중추(仲秋) 종추(終秋)로 나누어 음력 8월이 중간에 든 데서 붙은 이름이다. 또 '한가위' 또는 '추석(秋夕)'이라 하여 절사(節祀)를 지내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한다. 『삼국사기』 「유리왕조」에 음력 7월16일부터 매일 길쌈을 하여 8월15일에 그 성과의 많고, 적음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 이긴 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를 '가배'라 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추석 행사를 가락국(駕洛國)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이 날은 송편·시루떡·토란단자· 밤단자를 만들어 먹는데 대표적인 음식이 '송편'이다. 송편을 잘 빚으면 시집을 잘 간다고 하여 처녀들은 손자국을 내어가며 예쁘게 만들었다. 현대는 대다수 가정에서 기계로 대량생산 된 송편을 사서 차례상에 올리니 예쁜 손길의 정성이 사라진 모습이다. 이래저래 후손들은 살기 바쁘다는 핑계와 경제적이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 조상의 존재를 자꾸 멀리한다. 한가윗날 밤에 마을의 부녀자들 수십 명이 넓은 마당에 모여 둥글게 서로 손을 잡고서 강강수월래 춤(196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추는데, 목청이 좋은 사람이 가운데 서서 '산아산아 추영산아/ 놀기좋다 유달산아'하고 노래 부르면'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라고 받아 부르며 춤을 춘다. 또 추석을 전후하여, 시집가면 보기 어려운 딸을 보기 위하여 시집과 친정집의 중간지점에서 어머니와 딸, 또는 안사돈끼리 만나서 가지고 온 음식과 선물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며 하루를 보내는 '반보기(일명, 中路相逢)'가 있다 9월 행사 중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라 하여 삼월삼짇날 강남에서 온 제비가 다시 강남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각 가정에서는 부녀자들이 제철 음식으로 '화채(花菜)'를 만들어 먹으며, '국화전(菊花煎)'도 부쳐 먹는다. 또 '풍국(楓菊)놀이'라 하여 선비들은 음식을 장만해 교외 산야(山野)에 가서 시를 짓고 자연의 기운을 받으며 하루를 즐긴다. 오늘의 단풍놀이는 시를 짓는 대신에 전국의 휴게소에서 전세 관광버스, 들로 산으로 울긋불긋한 남․녀등산복 색깔로 절정을 이룬다. 자연에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계절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온 우리 선조들, 먹을거리는 부족하였을지언정 여유와 풍류는 더없이 앞서간 위인들이었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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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0] 만취당기(晩翠堂記)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꽃이 활짝 핀 것은 먼저 시들고 소나무가 느리게 자라는 것은 오래도록 푸르다는 것을 깨우쳐 주니 조급하게 나가지 말라"는 뜻이다. 북송(北宋)의 재상인 범질(范質, 911~964)이 군자들에게 말하기를 사물도 사람과 흥함과 쇠함이 같은 이치라고 하면서 소나무에 비유하였다. 아! 활짝 피어나지도 않고 느릿느릿 자라 온 때문에 길이 푸르러 오늘에 이르렀고(영천 만취당기, 〈永川 晩翠堂記〉) 영천시 금호읍 오계1리(속칭 종동마을)에 가면 마을을 감싼 수령(樹齡)이 약 250여 년이 된 소나무가 약 800여 미터에 이르는 숲을 이루고 있다.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지낸 조학신(曺學臣, 1732~1800)이 조성한 숲이다. 소나무는 목(木)+공(公) =송(松)으로 구성된 글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공작의 벼슬을 주어 송(松) 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명명한 충북의 보은 속리산에 소재하고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도 어가(御駕) 행차 시, 밑가지가 올려져 벼슬을 내렸다는 설화가 있고, 이외에도 전설이 전국 각지에서 전할 정도로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이다. 조선 시대에는 소나무의 별채를 못하도록 송금(松禁), 봉산(封山) 금산(禁山) 제도 등을 시행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송진을 채취하여 연료로 사용하였다.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침엽수인 소나무는 여러 지역에서 천연기념물로 정해져 보호를 받고 있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곧게 뻗으며 자란 소나무(금강소나무) 일명 춘양목이라고 하는데 삼척, 봉화, 울진지역 등에서 자란 소나무를 춘양역에서 모아 기차로 운반하였으므로 이름이 붙여졌다. 가지가 처진 소나무, 아래부터 가지가 많이 치는 반송(盤松), 바닷가에 주로자라는 해송(海松, 곰솔) 600여 년전 중국에서 들여온 백송(白松), 광복(光復) 후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리기다소나무는 야산에 주로 심어졌다. 오래된 소나무는 궁궐과 사찰 등의 집을 짓고, 선박을 제조하였고, 솔잎과 꽃가루는 다식(茶食)을 만들어 먹는다. 소나무 아래에서 송이버섯이 자라나고 뿌리에서 외생근균과 공생하여 돋아난 복령(茯苓)은 귀한 약재로 쓰인다. 어린 날에 소나무에 있는 송충이를 잡고 껍질을 벗겨서 먹던 기억, 겨울철 학교 난방에 솔방울을 따서 선생님께 검사받던 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시에 이 몸이 죽어가셔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蓬萊)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서 백설이 만건곤(滿乾坤) 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소나무는 한결같음을 상징한다. 화려했던 화초들은 추운 날에 모두 시들어 버리지만 늦게 자라 오래도록 푸르름을 간직하는 소나무는 언제나 한결같다. 만취당의 편액을 바라보며 그 뜻을 생각하고 성품을 정직하게, 그 조행(操行)을 청표(淸標)하게, 그 나아감을 조급하지 말게 하여, 송림(松林)과 더불어 자기를 완성한다면, 반드시 장송(長松)과 같이 세상에서 푸르러서 흥함은 있고 쇠함은 없을 것이니 힘쓸지어다. (영천 만취당기)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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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90] 만취당기(晩翠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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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9] 사화(士禍)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사화는 훈구파(勳舊派)로부터 사림파(士林派)가 화를 당한 것을 말한다. 사림파 자신들은 현사(賢士), 정인(正人)이라 표현하고,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훈구파들을 소인배(小人輩) 등으로 평가 절하하였다. 그러나 훈구파들은 사화를 난(亂)으로 규정하였다. 사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선조(宣祖) 즉위 후 사림이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사림파들이 처음 관직에 등장한 것은 세조(世祖) 때부터 이다. 유교적 명분이 취약한 세조가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신숙주(申叔舟) 권람(權擥) 최항(崔恒) 정인지(鄭麟趾)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세조의 불법 왕위찬탈에 동조하지 않았다. 세조 자신도 권력을 탈취하였지만, 측근세력에 갇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집현전 학자, 사림파들을 등용하였다. 4대 사화는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연산4)],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연산10)],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14)],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즉위)]이다.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청을 개설, 사초(史草)를 열람하는 중, 실록청 총재관(摠裁官)이던 이극돈(李克墩)의 비행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전라감사(全羅監司) 재임 시,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 국상 중에 근신해야 됨에도, 이극돈은 장흥기생과 파티를 한 것이 기록되어 당시 사관(史官) 이었던 김일손(金馹孫)을 찾아가서 삭제해줄 것을 사정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김일손을 제거하기 위하여 사초를 찾다가 김일손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것을 발견, 이를 단종에게 왕위 찬탈한 세조에 비유, 연산군에게 고한 것이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항우(項羽)가 불법으로 회왕(懷王)을 죽인 것을 비판한 내용으로 김종직이 지은 것이다.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김종직(金宗直)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였지만, 그는 세조 대에 정계에 진출하였다. 사림파들이 내세운 명분(名分)과 절의(節義)에 맞지 않는 처사에 대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명재(明齋) 윤증(尹拯), 교산(蛟山) 허균(許筠) 등 사림파 후배들은 이를 비판하였다. 왕의 일거수 일투족에 간섭하고 군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림파들에게 진절머리를 내던 연산군은 사림파들을 대거 사사 혹은 유배를 보냈다. 김종직의 문인들은 성종(成宗) 때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 삼사(三司) 등 언론기관에 진출, 훈구파를 비판하고 견제하였다. 성종은 사림파들을 중용, 국정 운영에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훈구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들을 적극 지원하여 훈구파 전횡을 견제, 정국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난 후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어머니 제헌왕후(齊獻王后, 폐비윤씨) 묘가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것을 이장(移葬) 하고자 하였으나, 사림파들이 반대하였고 부왕 성종이 죽고 나서 수륙재(水陸齋, 불교의식으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를 행하고자 하였을 때도 반대를 하였다.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도 반대한 것이다. 이는 부왕인 성종이 지나치게 언론권(言論權)을 키워서 성종 때부터, 국왕을 능멸하는 현상이 대두, 신권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연산군에게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반대를 하였다. 무오사화로 인하여 이극돈은 파직되고 사관인 김일손은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하였고, 그의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이후 연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廢妃尹氏) 사사사건(賜死事件)에 관련된 사림파, 훈구파 모두 피화를 당하여 연산군은 우군(友軍) 없는 군주가 되어 2년 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폐위, 왕이 아닌 군으로 강등되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아직도 부정의 기록으로 가득한 폭군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이 훈구, 사림파 두 세력을 제거했어도 백성과 함께한 위인이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재조명되었을 것이다. 권력은 늘 외로움과 독선(獨善)에 빠진다. 협치(協治)는 서로 상생하는 것이 아닌 권력자가 추구하는데 협조하라는 의미로 퇴색되어가고 있다. 국민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 궁민(窮民, 생활이 어렵고 궁한 백성)으로 몰아가지 않기를.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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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9] 사화(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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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8] 사자(獅子)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백수의 제왕 사자, 그 울부짖음에 모든 동물이 압도당하고 꼬리를 내린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과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사자'는 악과 무지를 근절하는 신의 에너지로 예수는 '유대의 사자'로 불렸다. 불교에서 '사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로 상징하며 진리의 동물을 상징한다. '사자'는 힘과 진리,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위엄을 나타낸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신라에 왕의 친위대(親衛隊)인 사자대(獅子隊)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자를 '산예(狻猊)'라고 하는데 사자의 탈을 쓰고 춤추는 가면극(假面劇)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방언으로 '사지' '주지'등으로도 불리고, '주지'는 별신굿에서 나쁜 짐승이나 사악한 귀신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씌우는 사자탈을 가리킨다. 신라 22대 지증왕(智證王)이 우릉도(于陵島, 현재 울릉도)의 오랑캐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512년(지증왕13) 이찬(伊湌) 박이종(朴伊宗,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사부(異斯夫)로 되어 있고 성은 김씨)을 시켜 토벌하였으며, 이종을 그 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우릉도에 거주하는 오랑캐들이 매우 거칠어, 쉽게 항복시킬 수 없어서 계책으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위협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으리라" 하였다 .이에 섬 오랑캐들이 두려워서 모두 항복하였다. '사자'는 네발 달린 짐승 중에서 독보적이고 겁이 없으며 일체를 항복시키는 존재이므로 부처나 보살이 주로 연꽃 위에 앉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사자 위에도 앉는다. 즉 불상의 대좌(臺座, 불상을 얹어 놓은 臺)에 사자가 등장한다. 불교에서 '사자'는 진리를 상징한다. 법주사(法住寺)에 쌍사자(雙獅子) 석등에는 두 마리의 '사자'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아),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함) 있다. '아'는 진리의 시작이고 '함'은 진리의 끝을 상징한다. 사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적과 유물이 무엇을 나타내고 상징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진정한 답사의 의미이지 않겠는가! 궁궐의 아문(衙門)이나 대문 옆 오른쪽에는 수사자(雄), 왼쪽에는 암사자(雌)를 배치한다. 수사자는 왼발에 1개의 공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권력을 상징하고, 암사자는 오른발에 새끼 사자를 한 마리 거느리고 있는데, 세자나 후손의 창성(昌盛)을 바라는 뜻과 태사소사(太師少師)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어미 사자는 태사, 새끼 사자는 소사를 상징한다. '사자'는 배가 나오면 탐욕을, 암사자는 태양의 동물로 웅변술을 상징한다.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배가 나온 '사자'인지, 세상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자'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을 가져봄도 유익할 것 같다. 세상에서 자신의 덕을 함양시키고 주변과 함께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겸양(謙讓)보다 더한 것이 무엇인가!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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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7]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더운 여름날의 필수품 향수(香水) 프랑스에서 향수(香水)가 유명하지만, 원래 향수는 목욕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 쓰여졌다. 인도에서는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하여 향을 사용하는 것이 성행하였는데, 도향(塗香)과 소향(燒香)이 있다. 도향은 명향(名香) 가루를 깨끗한 물에 섞어서 몸에 바른 것이고 소향은 향을 불을 살라 냄새를 없애는 것이다. 소향이 불교의식에 들어와 향은 마음의 때를 씻는 청정함으로 되었다. 유교와 불교 의식행사에 향을 향로에 피워서 의례를 거행하였다. 향로(香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향로가 있고, 절에서 불보살(佛普薩)에게 향을 공양할 때 사용되는 향로도 있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당시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체 금동제품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로 나누며 백제인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으로 빚어진 최고의 걸작품이다. 향로 높이가 64㎝나 되며 몸체 부분의 용(龍)과 뚜껑 부분의 봉황(鳳凰)이 눈에 띄게 강조되고 있다. 향로의 동체를 이룬 박산(博山)은 산악숭배, 무속(巫俗), 무위사상(無爲思想), 음양사상(陰陽思想), 불로장생(不老長生) 등을 다룬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배경이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박산(博山)을 봉래산(蓬萊山,중국 전설에 나오는 가상적인 三神山의 하나)으로 불러왔다. 봉황은 용, 기린 등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많이 표현되어 왔으며 향로의 꼭대기에 있는 봉황은 봉래산에 사는 상서로운 길조(吉鳥)로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출현한다고 한다. 용은 불교에서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용왕(龍王)으로 표현되며 강과 바다를 지키는 물의 신으로 천기(天氣)를 다스리는 힘이 있어서 가물면 용왕이 화가 나서 가뭄이 들고, 화를 풀어주어야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한국에서 용은 풍운(風雲)의 조화를 다스리는 수신(水神) 해신(海神)으로 여겨 민간과 왕실 농사(農事) 신으로 숭배하였다. 중국에서도 용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숭배하였다. 백제금동대향로 뚜껑에는 74곳의 봉우리와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사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39마리의 동물과 5인의 악사(樂師) 신선16인 인물상이 있으며 기타 연꽃과 수중생물 등의 문양이 표현되어있는 백제 금속공예의 최고 걸작품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 향로와는 다른 우리 한국 향로의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인간 세상은 언제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는 집착으로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가며 살아가고 있다. 금동대향로에 보이는 각종 조각구성은 현실과 이상을 담고 있다. '현실에 살되 이상(理想)을 가져야 할 것이며 이상을 가지되 현실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라는 어느 대학 총장의 졸업식 회고사는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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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7]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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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6] 하나(一)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임도 하나, 사랑도 하나 하나는 시작과 만물 모두를 포용하는 큰 수인 동시에, 최고의 神과 권력, 신성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숫자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의 이름을 하나라고 했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Allah, 이슬람교의 유일신)’ 일자이고 통일체로서의 신을 상징한다. 하나의 신은 전지전능한 완전한 존재로 하나의 神, 동양에서 왕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하나의 세계를 장악하기 때문에 하나는 하나이면서 전부를 상징한다. 즉 일이회만(一以會萬)은 하나가 일만(一萬)이고, 일만이 하나 라는 의미로,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음을 담고 있다. 하나는 시작을 의미하며 원(圓)으로 나타내어진다. 불교, 도교 등의 종교에서도 원을 진리나 완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도 원 안에 하나라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군왕의 옥좌나 뒷벽에 태양을 그려 놓은 것도 같은 의미이다. 성리학(性理學)에서 하나는 ‘허(虛)’이고 이 빈 것이 음양(陰陽)으로 나누어져 하나의 둥근 태극(太極)이 된다고 하였다. 하나는 상반된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군계일학(群鷄一鶴) 일점홍(一點紅) 백미(白眉) 등의 무리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와 구우일모(九牛一毛) 대해일적(大海一滴) 창해일속(滄海一粟) 등에서 미미한 존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하나는 외로움을 나타낸다. 뜰 앞에 잎새 하나 떨어지는데/ 마루 밑 슬피 우는 뭇 벌레 소리/ 훌쩍 떠나감을 잡지는 못하나/ 유유(悠悠)히 그대 홀로 어디로 가려는가.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 한밤중의 한 조각달/ 그 그림자 창에 들어 흐른다/ 저 서울에 외로운 나그네 있거니/ 부디 그 망향루(望鄕樓)에는 비추지 마라. 〈삼의당 김씨 추야월(秋夜月)〉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는 말도 원래 둘이 아닌 하나인데 하나의 마음(一心)이 아닌 다른데 마음이 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원효(元曉)의 일심사상(一心思想)은 반야의 지혜를 닦아 도달해야 하는 참된 마음으로 우주만법(宇宙萬法)의 수용처로 숫자나 양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무한대이다. 처음에 가졌던 초발심으로 한결같이 수행하면 그것이 바로 본래에 왔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회귀처가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마음인데 그 마음을 버리고 허상에 허둥대고 있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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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6] 하나(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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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5] 삼보사찰(三寶寺刹)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우리나라의 삼보사찰은 경남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경남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전남 승주의 송광사(松廣寺) 이다. 삼보는 불교 신자가 귀의해야 할 근본인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한다. 통도사는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석가모니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부처님이 입었던 금란가사(金襴袈裟)를 봉안하여 불보사찰,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大藏經)을 봉안하여 법보사찰, 송광사는 16명의 국사(國師) 등 큰스님을 많이 배출하여 승보사찰이 되었다. 삼보사찰의 명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 쓰여졌으며, 삼보사찰을 총림(叢林)이라고 부르는것도 전통적인 승려교육과정인 선원(禪院, 禪을 교육하고 교법대로 수행하여 교법을 어기지 않음), 강원(講院, 경학연구 전문교육기관), 율원(律院, 불교의 율사를 양성하는 전문교육기관)을 두었기 때문이다. 불보사찰인 통도사의 명칭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의 영취산(靈鷲山)의 모습과 통하기에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설, 만법을 통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설이 있다.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802년(신라 애장왕3) 순응(順應)과 이정(利貞) 두 승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의 본래 이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우주의 참다운 모습이 물 속(海)에 비치는 인(印)의 경지인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시작은 신라말에 혜린(慧璘)이 창건하였다고 《송광사지(松廣寺誌)》 에 전한다. 송광사의 명칭은 ‘松’자를 ‘十八(木)+公으로 풀이하여 16명의 국사가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廣) 편다는 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절터를 잡을 때 전설과 연관된 설, 송광산(松廣山)의 이름에서 전해졌다는 설 등이 전해온다.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진흥왕(眞興王) 등의 왕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불교를 흥성하게 한다는 칭호를 사용, 이 땅에 불국토를 건설하여 왕의 권위를 더 높이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추구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통도사는 신라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여성으로서 왕이 되었기에 불교국가인 신라에서 현세보살로 위신력을 공인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왕의 근친인 자장율사에 의하여 통도사를 창건한 것이다. 이는 선덕여왕이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통도사의 불보(佛寶)도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약탈당하였으나 동래(東萊) 사인(士人) 이었던 옥백거사(玉白居士)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이를 목격, 되찾아서 1603년(선조36)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해인사는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 주불로 모셔진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비롯하여,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쓴 일주문의 편액,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가 절을 찾는 이들을 평온함을 주고 있고,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우리문화유산의 자존감을 더해주고 있다. 송광사는 부처님 당시 1,250명의 비구(比丘)들을 모신 승보전(僧寶殿)은 송광사가 승보사찰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 승보전, 대웅보전(大雄寶殿) 등의 전각이 유명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불일암(佛日庵)에서 수행하다 입적(入寂)한 법정(法頂) 스님의 유해가 묻혀있는 곳으로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사찰로도 유명해졌다. 삼보사찰 외에도 고색창연한 산사를 거닐면 내 안의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인연을 맺는다. 어느 곳을 가도 문화유산인 우리나라, 진정한 문화강국(文化强國)이 아닌가!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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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5] 삼보사찰(三寶寺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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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4] 계보(系譜)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우-리가 물 이라면 새암이-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나라를 건국한 것을 노래한 ‘개천절’ 의 첫 구절이다. 개천절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이다. 우리 역사는 서기전 2333년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古朝鮮)을 기준으로, 현재 2022년을 더하면 4355년이 된다. 단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환인(桓因) 환웅(桓雄)의 ‘환’은 하늘 또는 빛(光明)으로 천신(天神) 천왕(天王) 태양신(太陽神)을 의미한다. 천신(天神)의 계보를 이은 우리 민족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바탕으로 반만년에 가까운 역사와 문화를 이룩하며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고 있다. 하늘과 불가분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은 그만큼 자긍심 더 높은 문화민족으로의 우월감도 크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함)은 정치 교육 문화에서 최고의 이념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이 되는 사상이다. 통치 이념으로 제세이화(濟世理化, 세상으로 나아가 도리로 교화함) 이화세계(理化世界, 하늘의 이치로 다스리는 세계)의 큰 뜻이 담겨있다. 역대왕실에서는 선원록(璿源錄, 역대왕조 왕과 왕실의 직계 子孫錄), 일반 사가(私家)에서는 족보(族譜, 譜牒, 系譜)를 통해 계보를 밝히고 아울러 일종의 우월의식도 담겨있다. 왕실에서는 종묘(宗廟), 유림에서는 문묘(文廟), 양반가에서는 가묘(家廟)가 존재한다. 자신을 존재케 한 부모, 그 위에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등으로 이어져 가문이 존재한다. 한국인의 뿌리 의식은 때때로 자긍심을 넘어 상대와의 목숨 거는 것도 불사한다. 조선의 역사를 주도해왔던 사림파 역시 강한 뿌리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세조 때 처음 등장한 사림파(士林派)는 호학 군주인 성종 때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이후 선조 때 사림의 시대를 열어 조선의 역사를 사림의 시대, 붕당의 시대를 열어 정치를 주도해왔다. 그들은 학통(學統) 가통(家統) 등을 바탕으로 세력을 형성, 서원 문중 등을 통한 집단세력화하여, 그들의 이해와 상반되면 소인배(小人輩),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고 공격하여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그들의 공화국을 마련하여 군림하였다.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조식(曺植)으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성혼(成渾)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는 사화(士禍) 붕당(朋黨)이라는 정쟁(政爭)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소위 사림파들은 훈구파와의 대결에서 사화를 당하고 이후 선조 때 정권을 장악하여 사림끼리 분열 대립, 붕당을 지었다. 훈구파(勳舊派)를 소인배, 자신들을 군자라고 자처했던 사림파들도 권력과 이해(利害) 앞에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자기들과 사상, 이념이 다르다고 5년 내내 상대 당을 적폐세력으로 선동 공격하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힘들게 했던 문정권(文政權)도 20년 집권, 100년 집권 등을 장담했지만 대선 패배, 지방선거 패배 등을 당하였다. 또 현 집권당도 권력을 잡자마자 권력 쟁탈에 혈안이 돼서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의 큰 정신은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가장 위대한 사상이요 실천 해야 될 큰 덕목이다. 왜 정치인들은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를 모를까! 아니면 알고도 그들의 떡을 더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일까!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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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4] 계보(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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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3] 신분과 계급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제가 충무공(이순신) 후손이라서 그나마 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지, 웬만한 유명 성씨가 아니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모 학술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의 푸념 어린 고백이다. 전통사회의 신분제도에서나 있을법한 일이 21세기에 와서도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특히 양반의식이 강한 지역일수록 이러한 현상이 많이 남아 있다. 훌륭한 선조를 둔 가문의 후손들 자긍심이야 누가 나무라겠는가! 문제는 후손이 마치 그 시대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기득권에 사로잡혀 배타적인 사고와 우월의식에 빠져 타성(他姓)을 얕잡아보고 비하하는 것에서,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위인, 명문가가 어디 있는가! 오랜 세월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공을 쌓아서 생긴 결과물이 아닌가! 또 주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 어린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혼자서 감당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양반은 과거 시험에서 3대에 걸쳐서 백두(白頭, 벼슬하지 못한 사람)가 되면 토반(土班)으로 신분이 하락하였다. 즉 양반 가문도 3대에 걸쳐서 과거에 낙방하면 양반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을 나타내는 ‘인(人)’자도 상대방에게 예를 표하는 공수(拱手) 자세이듯이, 상대방을 높이고 존경해야 자신이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욕존선겸〈欲尊先謙〉 존경을 받으려면 먼저 상대방을 높이고 겸손해야 됨)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이 어느 날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흑인(黑人)이 인사를 하자 자신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같이 가던 친구들이 왜 인사하냐고 나무라자, 워싱턴은 ‘내가 이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해서야 되겠는가!’ 라고 반문하였다. 명문가 후손일수록 겸양의 미덕을 더 가지고 솔선수범해야 존경을 받을 수 있지, 일부 종가의 후손 중에서 선조의 빛나는 업적을 오히려 훼손시키는 행동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은 수유후곤(垂裕後昆, 훌륭한 도를 후손에게 전해줌)의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신분은 전통사회에서 사회적 차등, 계급은 경제적인 차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납세, 군역, 혼인, 주거, 형벌, 의복 등에 엄격한 차별을 두고 신분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을 때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차등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다원화, 다국적화된 사회에서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고에 빠져 사람 간의 소통을 방해하는 조상의 신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속칭 이 시대의 꼰대가 아닌가!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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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3] 신분과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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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2] 궁(宮)과 대(臺)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권력의 최고 정점 청와대(靑瓦臺)!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그곳을 떠나 용산에 대통령실을 만들었다. 1948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정(美軍政) 사령관 관저로 사용되던 구 조선 총독관저를 이양받아 경무대(景武臺)로 하다가, 윤보선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 명칭을 사용하고, 노태우 대통령 때 현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들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하늘의 신이 사는 황궁의 방은 1만 칸이고,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중국 고궁은 9999.5칸이다. 궁(宮)은 종묘(宗廟), 지존(至尊, 임금을 공경하는 칭호) 이 기거하는 의미를 가지며 대(臺)는 관청 고관 사람을 부르는 존칭 등의 뜻이 담겨있다. 신이 사는 공간은 제외하고라도 인간이 사는 공간을 너무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집을 나타내는 漢字 옥(屋)의 모습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옥의 글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죽음(尸)에 도달한다(至)는 의미이다. 사(舍)는 사람(人)이 길하게(吉) 되는 검소한 형태의 집을 상징한다. 집이 크고 화려하다고 정치가 더 잘되면 얼마나 좋을까!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의사당, 시와 도, 군, 구청, 행정복지센터 등을 보면 세계의 어느 부자나라가 이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울까 싶다.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 청와대 나라의 빚은 천문학적으로 늘어가는데 공직자들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를 잊어버린다면 나라의 앞날에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직자들에게 솔선수범과 검약(儉約), 봉사 등의 정신이 없다면 공직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가장 잘 개선, 실천한 대정치가이다. 애물제인(愛物濟人,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을 구제하라), 이식위천(以食爲天, 백성들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안민익국(安民益國,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을 대동법(大同法, 조선시대 특산물(貢物)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법으로 관리와 아전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수탈이 가장 심하였다 ) 등을 통해 실천하였다. 그동안 청와대 권력의 무게는 늘 그들 주변인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민의가 철저히 무시되던 시절을 뒤로한 채로 이제 그 어둠을 떨치고 새로운 용산대통령실 시대가 열렸다. 모든 이목이 청와대와 용산대통령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지켜보고 있다. 어려운 것은 없다. 오로지 국민을 주인답게 받들고,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했던 위선들을 철저하게 묻어버리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전문성을 가진 인재를 잘 활용해 나가면 된다. 역사의 위인이 되느냐 죄인이 되느냐는 오로지 어떤 길을 가느냐에 달려있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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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2] 궁(宮)과 대(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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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1]산신(山神)
- 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산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뚝하게 서 있다. 산은 만물을 산출하고 천상과 교통하는 공간이요 사자(死者)들의 혼백이 들어가 쉬는 곳이다. 산을 최초로 신격화시킨 것이 단군왕검이다. 아사달(阿斯達, 단군이 개국할 때 수도로 평양 부근의 백악산 또는 황해도 구월산) 들어가 산신이 되고 신라의 석탈해왕(昔脫解王)이 동악(東岳)의 신이 되어 국가를 수호하였다. 단군조선, 가야, 신라, 고구려 등 개국신화는 모두 하늘에서 하느님(天神)이 높은 산에 강림하여 산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국가를 보호해주는 호국의 신으로서의 산신관(山神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역의 신으로서 동신제, 서낭굿, 별신굿, 당굿 등에서 주신(主神)이 되고, 민간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인식된다. 고려 이전에는 산신의 여성(女性)적인 성격이 강하여 선도성모(仙桃聖母, 신라의 선도산 신모), 치술신모(鵄述神母,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 등 여신들이 있었으나 유교가 도입된 이후로는 여성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산악숭배와 왕조의 번성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대체되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산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의 일면을 보여준다. 호랑이와 노인으로 등장하는 산신은 불교의 본뜻과는 다르게 신도들에게 수호신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산신각에 있는 신선풍의 백발노인이 호랑이를 동반한 상은 산신의 주인이 백발노인이고 호랑이는 이제 백발노인을 시종하는 자로 변모되었음을 나타낸다. 무속에서 산신은 여러 신 중에서 상위에 속하며 무조(巫祖) 전설에는 지리산 신인 성모천왕과 법우화상(法雨和尙)이 혼인하여 낳은 8명의 딸이 8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올림포스산은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의 장소로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우주산(cosmic mountain)의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고, 《구약성서》에서는 산은 여호아의 권능의 상징이고 현시(顯示)의 장소였다. 중세 유럽의 산신관은 인간들에게 가해하거나 유혹하는 자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마녀와 요정들이 사는 공간으로 여겼다. 현대 서양에서는 산은 숭배의 대상과 악령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아메리카 인디언, 멕시코인들은 산을 숭배하여 밤새도록 불을 피우고 밝히며, 마사이족의 킬리만자로에 대한 산신숭배도 그러한 경우다. 반대로 산에는 악령신(惡靈神)이 있어 접근을 금지하는 시에라리온의 맘바산, 우간다의 엘곤산은 악령과 야수들의 죽은 혼이 산다고 믿어 그 지역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동서양 구분 없이 산은 사람들로 인하여 신격화, 인격화, 악령화 된 장소로 그려지고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性徹) 스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허상에 늘 끌려다니다가 산으로 돌아간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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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81]산신(山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