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 위정자들로 인해 고통받는 민초들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최고 권력자와 관리들은 국리민복을 위하여 최선의 봉사를 해야 하는 자리이다.
고려말 문익점(文益漸 1331~1398년. 註: 출생년도에 대해서 《삼우당실기》에는 1331년으로 되어 있으나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자료에 1329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국가와 국민에게 이(利)로움을 선물한 위인이다.
오늘날에는 의복이 첨단화되어 마음대로 편히 입고 살아가는 시대이지만 당시에 의류의 원료는 삼베 모시 명주가 대부분이었고 귀족층들은 중국의 값비싼 비단 등을 구해서 입었다.
일반 백성들의 헐벗고 굶주림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에 1363년(공민왕12) 계품사(計禀使)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하여 추운 겨울날 견디기 힘든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장인인 정천익과 가져온 목화씨를 반씩 나누어 심었지만 장인이 심은 것은 수십배의 수확을 올려 주변에 나누어 주었지만 정작 문익점의 것은 싹트지 않아 실패한 아이러니한 일도 전해져 온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문익점의 공에 대해 '후직(后稷)'으로 칭했다고 한다. '후직(后稷)이란 당시 농경신(農耕神)으로 오곡의 신을 이르렀는데 그만큼 문익점의 공이 크다고 극찬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신농씨와 후직씨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쳤네, 충선공 우리에게 옷을 입혔으니, 그의 공로 옛날보다 더하다."라고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흔히들 문익점 하면 원나라에서 붓뚜껑 속에 목화씨를 몰래 들여온 것처럼 기정 사실화되어 있지만 실제로 붓뚜껑과는 거리가 먼 주머니에 넣어 왔다. 이는 목화 사건으로 문익점을 보다 극적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해 각색된 것이다.
문익점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으로 1331년(충혜왕1)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숙선(叔宣)이다.
삼우당이라는 그의 호는 첫째 나라의 운수가 부진한 것, 둘째 성리학의 발달이 부진한 것, 셋째 자신의 학문이 부족한 것을 근심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그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1360년(공민왕9)에 과거에 33명 중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포은 정몽주와는 과거합격 동기이며 나이는 문익점이 6살 위이다.
지방의 역사 기록관(사관)인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을 시작으로 성균관 교수직인 순유박사(淳諭博士) 좌정언(左正言)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고려말 인물인 문익점은 고려에서는 그렇게 조명받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에서는 서원(書院)에서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도천서원(道川書院)은 사액(賜額)을 두 번이나 받았던 곳이다.
흔히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은 조선 명종 때 이황(李滉)의 건의에 의해서 사액 되어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삼우당(三憂堂) 문익점을 제향하는 도천서원이다.
이 서원은 태종1년(1401년)에 건립되어 세조7년(1461년)에 사액을 받고, 임진왜란 때 불타서 광해군4년(1612년)에 중건되어 개혁군주 정조11년(1787년)에 또 사액을 받은 곳이다.
소수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향과 유생교육을 동시에 한 서원으로는 최초인데 비해 도천서원은 선현(문익점)을 제향한 최초의 서원인 것이다.
그의 우국충정과 애민정신은 현 시국에서 위정자들이 그림자라도 따라다니며 배워야 할 위인이지만 작금의 현실에서 그러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 괴로움을 민초들이 겪고 있다.
정권을 향하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 검찰총장을 장관이 직무정지시키고, 수많은 대책속에 서민의 보금자리 구하기가 더욱 요원해지는 오늘날의 상황들이 그 옛날 백성들을 걱정하고 몸소 실천한 문익점 선생을 더욱 생각나게 한다.
:: 조 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