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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21] 재주 많아 불행했던 최고 여류시인 허난설헌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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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4.0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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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후회 없이 산 사람이 있을까!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 명문가인 양천허씨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강릉김씨의 딸로 태어나 비교적 자유로웠던 친정집을 떠나 평탄치 못한 시집살이를 겪으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한 인생의 3대 후회를 하게 되었다.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름(楚姬)이 있다는 것, 호(號, 蘭雪軒)와 자(字, 景樊)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집안의 자유로움과 학문의 수준을 가늠하고도 남는다.

 

흔히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16세기 이후부터 서서히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지 그 이전에는 남녀균분상속(男女均分相續) 등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허난설헌이 태어났던 시기는 16세기 후반기이므로,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서서히 여성이 성리학(性理學)적인 질서에 의해 남성 중심적인 사회로 변화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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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초상

 

그녀는 오빠인 허성(許筬), 허봉(許篈), 동생인 허균(許筠)과 더불어 4허(許)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녀가 문장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 분위기와 아버지의 열려있는 세계관, 그녀의 영민함 등이 함께 어우러진 덕이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고, 특히 둘째 오빠인 허봉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오빠의 친구인 이달로부터 동생 허균과 함께 공부하였다.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 사람인 이달(李達)은 서얼(庶孼)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허난설헌이 나이 8세 때 신선 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백옥루(廣寒殿白玉樓)의 상량식에 초대받아 상량문을 지은 것을 내용으로 하고있는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의 한시는 그녀의 천재성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5세에 결혼했던 시가(媤家) 안동김씨의 김성립(金誠立) 집안 역시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였지만 그녀가 죽은 뒤에 김성립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허균은 훗날 자형(姊兄)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고 평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누님과 결혼생활이 원만치 못했던 것에 대한 감정도 실려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지나치게 영민하면 남편이 부담스러운 점도 있듯이 다음에 전해오는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남편 친구인 송도남이 있었는데 매번 그 집에 들릴 때마다

 

‘오 김성립 멍성립 덕성립 있는가? ' 라고 놀리면 김성립은 대꾸를 못하고 당하기만 하였다. 이를 보고 허난설헌이 ‘오 맨드라미 귀뚜라미 송도남이 왔는가? '라고 응대방법을  알려줘 응대하자 송도남이 대답을 못하면서, '자네 부인이 가르쳐 주었지? '라고 하자 김성립이 무안해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남매를 두었으나 일찍이 요절하였고,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죽어 어머니로서의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거기다가 친정의 아버지와 오빠의 객사, 동생의 피화로 친정집이 풍비박산이 되고, 남편과의 원만치 못한 부부관계 등 삶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神仙)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여성으로서의 가사에 충실치 못한 것에 대한 시어머니의 학대 등으로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지만 동생 허균은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蘭雪軒集》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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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작품 한견고인서 / 앙간비금도

 

1606년 허균은 그 시집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허난설헌집》이 발간되기에 이른다.

 

허난설헌은 중국의 문인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허난설헌의 시는 1711년 일본의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허난설헌의 시는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재평가되기도 하였으나, 다만 중국에서 발간된 그녀의 시들 속에 중국의 당시(唐詩)를 참고한 듯한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난설헌의 작품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그녀의 시집이 동생 허균에 의해 간행된 만큼 편집에 있어서 일부는 허균의 생각이 작용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탁월함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평범한 양반가의 부인으로 살았다면 그녀는  조선과 여자, 남편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유로운 이 땅의 여성들을 보면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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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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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닫네요.
시대가 여인들의 재능을 앗아 버렸지요.

그나마 허난설은 동생 허균에 의해 세상 빛을 보았으니
대행이긴 합니다.

지금은 작가도 시인도 넘치고 넘치니 글 다운 글을
접하기가 쉽지 않네요.

역사공부 잘 하며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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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늘 고맙습니다. 성원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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