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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순의 '역사는 미래다' 25]효와 청렴의 상징 조치우(曺致虞) 부부 옥비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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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5.07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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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지위고하 남녀노소 없이 이 세상을 왔다가 언젠가는 돌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인생길(道)이라 한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각종 기념일로 가득하다.

 

영어단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조사하였는데 1위가 Mother(어머니)이고 2위가 Passion(열정) 3위가 Smile(미소) 4위가 Love(사랑)인데 아버지는 10위 20위 안에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버이날은 1956년부터 5월 8일 ‘어머니날’로 해오다가 형평성의 원칙이 제기되어 1973년부터 ‘어버이날’로 제정되어 도시화 산업화 핵가족화 되는 사회에서 부모공경에 대한 제도적 장치로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어머니 덕택(!)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생각도 든다.

 

전통시대 부모상(父母喪)은 3년상(喪)이었지만 이제는 3일장(三日葬)과 5일장(五日葬)이 대세를 이룬다. 자신을 존재케 해준 근원에 대한 보은의식(報恩意識)도 누구 없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 단 2기 뿐인 玉碑...경북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遺厚齋 / 창원시 지개동의 부인 昌原朴氏 慕先齋 玉碑

 

조치우(曺致虞, 1459∼1529)는 조선 중종(中宗) 때 효행(孝行)으로 널리 알려져 《소학 (小學)》 1질을, 대구부사(大丘府使)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달성서북(達城西北)에 청덕비(淸德碑)가 세워졌다 (중종7, 1512년).  사후 12년 뒤인 1541년(중종36)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 되어 부부가 옥비를 하사받았다.

 

그는 55세 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 70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복중(服中)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71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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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 대창면 조치우 옥비(청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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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지개동 창원 박씨부인 옥비(백옥)

 

 원래 옥비 2기 모두 묘소(墓所) 앞에 있었으나 왕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비석을 풍화작용으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따라 170여년 전에 비각을 지어 옥비를 봉안하고 관리해오고 있다.

 

옥비의 내용은 《어사청백리 조치우 옥비 (御賜 淸白吏 曺致虞 玉碑)》라 되어 있고 비각의 편액에는 《내사옥비각 (內賜玉碑閣)》이라 되어 있다. 옥비와 비각의 두 내용이 어사(御賜), 내사(內賜)라고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국왕이 내렸다는 뜻으로 의미는 같다.

 

비의 형태와 크기는 가첨석 높이46cm 폭 50cm 두께20cm 비신94cm 폭34.5cm 두께14.2cm 좌대 높이32cm 폭74cm 두께64.5cm이다. 좌대는 익살스러운 거북형상이다. 경남 창원에 있는 부인(夫人)의 옥비는 숙인(淑人) 창원박씨지묘(昌原朴氏之墓)라 되어 있고 좌대는 없다.

 

높이118cm 폭47cm 두께19cm이다. 두 비석 모두 조선 초기의 일반적인 묘비형태로 가첨석(加檐石)과 비신(碑身)을 하나의 돌에 새겼다.

 

조치우는 1472년(성종3) 14세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고 1494년(성종25)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고, 연산군(燕山君) 초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 典籍)으로 춘추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성종실록 (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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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금석학회 오초(吾超) 황안웅 선생 일행과 답사중인 필자(왼쪽에서 첫번째)

 

1498년(연산군4)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의 진언(進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이후 중종 때 대구부사, 사옹원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字)는 순경(舜卿), 호는 정우당(淨友堂)이며 자호(自號)이다. 이는 연꽃이 진흙 속에서도 깨끗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의 호(號)를 삼았던 것이다.

 

그의 4대조는 신충(信忠)으로 고려조에서 희천군사(熙川郡事)를 역임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창업 후 강계도병마절도사(江界道兵馬節度使)를 내려 조선의 조정에 참여를 바랐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영천지역에 낙향하였다.

 

고려말에 화약제조를 하고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한 최무선(崔茂宣) 장군은 그의 처종조부(妻從祖父)이다. 증조(曾祖)는 승지(承旨)를 역임한 상명(尙明)이며 조부(祖父)는 경무(敬武)로 중군부사직(中軍副司直)을, 아버지인 말손(末孫)은 한림(翰林)을 역임하였다.

 

조치우의 《묘갈명 (墓碣銘)》을 찬(撰)한 통정대부행동래도호부사(通政大夫行東萊都護府使) 이휘녕(李彙寧)은 공에 대해 배움에 독실하고 실행에 힘썼으며 玉(옥)처럼 일생을 살았던 사람으로 평(評)하였다. 또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치우(致虞)의 아들 효연(孝淵)의 묘갈명(墓碣銘)에 원정공(院正公, 조치우)은 성품이 지극한 효성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다가 복중(服中)에 졸(卒)하였다고 평(評)하였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옥은 5가지 덕(德)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 광택이 있고 밝으면서도 온화함은 인(仁) 둘째, 속의 빛깔과 결을 그대로 내비치는 투명함은 진(眞) 셋째, 두드렸을 때 생기는 음의 순수함과 낭랑함은 지(智) 넷째, 깨지더라도 굽지않는 것은 의(義) 다섯째, 각은 예리하지만 어떠한 것도 상하게 하지 않음은 공정(公正)함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옥은 인간의 고매함, 순결함, 아름다움, 영구함 등과 결부시켜 고귀하게 생각했다.

 

조선시대 청백리 중 옥비가 내려진 것은 조치우가 유일하다. 조치우의 옥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90호), 부인 창원박씨 옥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록의 계절 5월이다. 푸르른 잎사귀만큼이나 시원한 나무 아래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도 부모님이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오신 덕택이 아닌가!

 

지극히 작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볕 같은 어버이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선현들의 지극한 부모공경을 통해 오늘의 내가 서 있는 건 아닌지 생각에 잠겨본다.

 

 

:: 조 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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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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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가정의 달 5월!!
모든 사랑의 원천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근원 곳 바로가정이지요. 선조들의 효정신 깊이 받아들이며 실행해야 되는데 세상이 각박하다보니 효실천도 형제간에 우애도 점점 멀어지는듯 하여 씁쓸합니다.

감사합니다.
격조높은 글 감사히 마음담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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