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37] 권력과 아버지의 역할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15대 광해군(光海君)은 애초에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지만 용상의 자리에 오른 군주이다. 선조의 생부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휘:초)으로, 중종과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 소생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셋째아들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방계승통(傍系承統)을 연 군주이고 광해군 역시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존의 자리에서 신분적인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역사에서 만약은 존재하지 않지만, 선조(宣祖)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光海君)도 어머니인 공빈김씨(恭嬪金氏)가 만약 오래 곁에 있었다면 아버지로부터 덜 시달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명분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된 왕이다.
광해군의 비극은 아버지 선조가 물려준 불안정한 권력 때문이었다. 물론 선조 자신의 출생의 컴플렉스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선조 자신이 확고한 의지로 세자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켜주지 못한 것에서 발생했다.
또 전란 중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선조가 요동에 망명할 의도로 조정을 갈라 광해군에게 맡긴 소조정(小朝廷))로 인한 굴욕감은 선조에게 광해군에 대한 악감정을 주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선조는 인간을 대하는 도량은 그리 넓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어린 나이에 정통성 없는 즉위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이면서도 타고난 품성이 더해졌고, 이로 인해 선조의 신하들에 대한 불신으로 드러났다.
이는 광해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이러한 선조의 태도는 광해군에게는 적잖은 상처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로 조선 역대 세자의 행적을 살펴보더라도 누구도 광해군에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물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부왕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임란 후 새로 맞이한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은 뒤에는 선조가 서자인 광해군을 대하는 태도는 세자 시절은 물론, 왕이 된 뒤에도 불안정한 권력을 유지하는데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청(鞫廳)이 열릴 때도 직접 심문에 참여하기도 했고, 무리하게 궁궐 공사에 매달리기도 했다. 부왕 선조가 민생을 염려해 궁궐 건축은 생각지도 않은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다.
내면으로 다져진 권력의 힘이 약했던 광해군이 외면적인 면에 치중한 것도 왕의 권위를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도 형들의 생활을 극진히 살피는 등 우애가 깊고 왕실을 우대한 것과 달리 광해군은 왕실 사람들에게 대단히 차갑게 대했다.
이러한 점은 모두 선조가 누린 권력의 안정성과 광해군 권력이 가진 불안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만약, 광해군도 선조처럼 안정된 권력을 물려받았다면, ‘폐모살제’의 폐륜을 저지르고, 무모하게 궁궐 공사를 추진했을까? 광해군의 비극은 아버지 선조와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의 우유부단한 결정과 판단의 흐림이 역대 성군(聖君)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던 임금의 재목을 패륜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군권(軍權)을 자신이 가지고 뒤를 돌봐주었던 것과 달리, 용렬한 군주 선조는 국가의 안정과 아들의 선정(善政)보다 자신의 체면이 우선이었던 것이기에, 광해군은 권력의 칼날에 늘 노심초사(勞心焦思)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 조순 문학박사, (사)지산학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