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조순의 '역사는 미래다' 43] 조선 최초 이혼 군주 성종(成宗), 정치적 결단으로 왕이 되다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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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9.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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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저널의 기획 연재 '조 순의 역사 콘서트'의 집필을 맡은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부부가 일평생 풍파 없이 살아가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서로 오랜 생활을 같이하다 보면 그렇게 신선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무디어지고 남녀가 아닌 가족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좋아서 선택해놓고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하였을까! 라고 후회한다.

 

조선 제9대 왕 성종, 그는 조선의 문운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아 묘호(廟號)를 성종으로 정해졌다.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서 할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와 장인(丈人)이었던 한명회(韓明澮)의 정치적 결단으로 왕이 된 인물이다.

 

할아버지인 세조(世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유교적인 명분론에서 그는 자유로울 수 없었고, 가족사에서 고통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요절하였고, 둘째 아들 예종(睿宗, 해양대군) 또한 재위 1년여만인 20세에 죽었다. 왕위찬탈은 많은 생명을 죽인 인과응보(因果應報)로 이어졌고 그 역시 과도한 스트레스로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생하였다.

 

예종이 급서(急逝)하자 후계 구도 대상은 3명으로 압축되었는데 첫째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과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었으나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으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신속하게 왕으로 내정하였다.

 

당시 제안대군은 5세의 나이(형인 인성대군(仁城大君)은 3세 때 요절)로 어려서 제외된다고 해도 당연히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16세)을 지목하지 않고 자을산군(성종, 13세) 즉위시킨 것이다.

 

성종은 미성년이었으므로,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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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어진 https://blog.naver.com/eunhaenara

 

성종은 3명의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한명회의 딸인 첫 번째 부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와 혼례를 올렸으나 한씨는 17세에 죽었다.

 

두 번째 부인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폐비윤씨(폐비윤씨(廢妃尹氏, 1445~1482)이다. 세 번째 부인은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이다.

 

폐비윤씨는 1473년(성종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로,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연산군을 출산하였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고, 검소하며, 대비(大妃)의 마음에 들어서 왕비로 책봉하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왕비에 책봉된 지 3년 만에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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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유달리 질투가 심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아 성종과 잦은 갈등을 빚어 문제를 일으켰다. 1479년(성종10)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어 폐비(廢妃)되어 친정으로 쫓겨나서 3년 후 사사되었다. 《성종실록》에 폐비에 대한 기록이 성종 10년(1479) 6월 2일 정해 조(丁亥條)에 나온다.

 

"궁곤(宮壼, 중전)의 일을 여러 경(卿)들에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이 매우 중대(重大)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 입직(入直)한 승지(承旨)와 더불어 이를 의논하고자 하였으나, 생각하니 대사(大事)를 두 승지와 결단할 수 없으므로 이에 경들에게 의논하는 것이다.

 

지금 중궁(中宮)의 소위(所爲)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생략)"

 

이때 대신들은 대부분 폐비는 안된다고 반대하였다. 그것은 원자(元子)를 낳은 생모이고 중국으로부터 왕비로 승인받았고, 향후 등극했을 때 불어닥칠 피바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종은 끝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3가지 이유(질투, 불순, 말이 많음)를 들어 폐비를 강행, 그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훗날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10년(1504))의 피의 숙청이 이루어졌다.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여 참신한 정치를 지향하고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 성군으로 칭송받으며 조선의 유교 정치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가정사(家庭事)에는 성공하지 못한 군주로 남았고, 지나치게 언론권(대간권,(臺諫權))을 키워 아들 연산군의 정치적인 입지를 좁게 만들어, 아들을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킨 폭군의 대열에 세웠다. 

 

 

:: 조순 문학박사, ()지산학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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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

  • 80938
대장금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자기의 본분만 다 한다면
파란만장한 아픈 마음으로 폐출되고 사사되는 일은
없었겠지요.

그놈의 사랑이 무엇인지...

지나치게 많은 욕심이 화른 부른다걸 모르고 권력을
휘두르고 심한 질투로 명예롭지 못한 사사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역사를 반복하며 읽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추석명절 가족과 함께 풍요롭고 웃음가득한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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