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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빔웍스, 대구 1호 혁신의료기기 지정받아
      대구시는 지역의 유망 의료기기 스타트업인 ㈜빔웍스(대표 김원화, 칠곡경북대병원 영상의학과 의사)가 개발한 초음파 유방암 실시간 인공지능 진단 시스템 ‘캐디-B(CadAI-B)’가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캐디-B(CadAI-B)’는 세계 최초로 동적 초음파 영상으로 유방암을 진단하는 인공지능 기반의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로 차별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아 이번에 식약처로부터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받았다.   기존의 초음파 검사가 의사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해 경험이나 전문성에 따라 진단 편차가 크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방암 환자의 초음파 디지털 의료영상 50만 건 이상의 데이터와 최적의 인공지능 모델을 활용한 실시간 판독 영상을 제공함으로써 인공지능의 객관적이고 일관된 진단 환경을 구축해 국내 의료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되면, 인허가 시 다른 의료기기보다 우선해 심사하거나 개발 단계별로 나누어 동시에 심사하는 등 특례가 적용되며, 인허가 후에는 비급여 또는 선별급여로 신속하게 의료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어 혁신 기술 보급과 매출 실현을 앞당길 수 있다.   또한, 「의료기기산업법」에 따른 혁신형 의료기기 기업 인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앞으로 정부의 R&D/시장진출 지원사업에 참여하거나 정책적 지원 등에 있어서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혁신의료기기 지정제도는 「의료기기산업 육성 및 혁신의료기기 지원법」의 시행(2020. 5. 1.)에 따라 기술집약도가 높고 혁신속도가 빠른 분야의 첨단 기술의 적용이나 사용방법의 개선 등을 통해 안전성, 유효성을 현저히 개선했거나 할 것으로 예상되는 의료기기에 대해 지정기준의 적합 여부의 평가를 통해 지정하는 제도이며, 현재 전국에는 23개 제품이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돼 있다.   한편, ㈜빔웍스는 경북대학교 의학과, 컴퓨터공학 교수의 공동 연구를 통해 쌓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에 창업해 유망기술 창업 지원 등 정부 지원과 대구시의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특화지원사업’을 통해 ‘캐디-B(CadAI-B)’ 개발에 성공했고, 내년 상반기에 임상시험을 거쳐 인허가를 받을 예정이다.        이승대 대구시 혁신성장실장은 “이번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시발점으로 지역의 의료기업의 제품이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R&D부터 투자유치까지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 글로벌 선도기업 발굴·육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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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기고] '7월은 재산세 납부의 달' 입니다
      7월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떠나는 달이다. 올해는 휴가를 떠나기 전 우편함을 한 번 들여다 보자. 왜냐하면, 우리 구 재정의 근간인 재산세가 고지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동산을 보유함으로써 여러 가지 세금을 부담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인 재산세는 7월과 9월 재산세(주택), 재산세(건축물), 재산세(토지) 등으로 나누어 부동산 소재지 구(군)청에서 과세한다.  이번 달 7월에는 재산세(주택)와 재산세(건축물)가 고지되는데 많은 납세자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재산세 과세방식과 편리한 납부 방법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 드리고자 한다. 먼저, 재산세는 주택, 건축물, 토지 등으로 구분되어 과세된다. 재산세(주택)는 주거용 부동산에 대한 과세로 건축물과 토지를 합산하여 산정한 주택공시가격을 기준으로 1년 세액을 산정한 후 7월과 9월 각각 2분의 1씩 같은 세액으로 나누어 1년에 2번 과세하고, 주거용 이외의 건축물과 그 부속토지에 대해서는 7월에 재산세(건축물)를, 9월에는 재산세(토지)를 과세하며, 지상에 건축물이 없는 나대지, 농지 등의 토지는 9월에 재산세(토지)만 과세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에 고지서가 한꺼번에 2장이 나왔다고 놀라지 마시고 먼저 과세구분을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다음으로, 재산세 과세기준일은 6월 1일이라는 점이다.  재산세는 자동차세와 달리 소유 기간을 날짜로 계산하여 과세하는 것이 아니고 과세기준일 6월 1일 현재 부동산 소유자에게 1년치의 세금이 과세되기 때문에 6월 1일 이전에 매매하였다면 매수자가, 6월 2일 이후에 매매를 하였다면 매도자가 그 해 재산세(7월, 9월)의 납세의무자가 되니 이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산세 납부는 수령한 고지서를 가지고 금융기관을 직접 방문해 납부할 수도 있지만, 무더운 날씨에 편리하게 납부할 수 있는 다양한 납부 방법이 준비되어 있다.  재산세 고지서상에 표기된 가상계좌번호로 손쉽게 송금할 수 있는 무통장 송금 방식이 있고, 고지서가 없더라도 위택스 홈페이지(www.wetax.go.kr)에 접속하여 회원가입을 하면 전국 모든 지역의 지방세 과세내역 확인 및 납부를 할 수 있으며, 또한, 본인의 신용카드를 이용하여 인터넷 납부를 하거나, 직접 은행 CD/ATM(현금자동 입출금기)를 통하여 납부 할 수 있고, ARS자동응답시스템(☎080-788-8080)을 활용해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지방세를 납부할 수도 있다.  주소지를 장기간 비우거나 고지서 수령을 원하지 않는 납세자들은 위택스, 금융앱 등을 통하여 전자고지를 신청하거나, 이용하는 금융기관에서 정기분 지방세의 자동이체를 신청한다면 종이 고지서도 없애고 개인의 정보도 보호하면서 편리하게 지방세를 납부할 수 있다.  이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우리 북구에서는 자동이체, 전자고지 1장당 각 300원의 세액 공제를 하고 있으며, 전자고지와 자동이체를 동시에 신청할 경우 700원의 세액 공제 혜택을 드리고 있다.  무더운 7월, 여름 휴가 떠나기 전 우편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납부기한을 놓쳐서 가산금을 부담하는 일이 없도록 재산세를 잊지 말고 꼬~옥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실한 납세가 행복한 북구의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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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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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성 칼럼 24] 客窓寒燈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독일판, 클라라와 브람스의 음악같은 사랑' 청마(靑馬)유치환(柳致環)과 정운(丁芸)이영도(李永道)의 사랑이야기는 한국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아름다운 연애사건(?)이다.    이토록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놀음이 또 있을까? 청마는 그가 숨지기 전까지 20년 동안 무려 5,000통의 연서(戀書)를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정운에게 보냈다. 유치환(1908~1967)은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고, 1931년 23살 때 '문예 월간'에 <정적>이란 시로 등단했으나, 일제의 검속 대상을 피해 만주로 올라가, 형의 농장일을 돕다가 해방이 되자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영도(1916~1976)는 경북 청도에서 군수를 지낸 부잣집에서 태어나, 21살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고 살던 중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홀로 살다 1945년 가을 통영여중에 가사교사로 부임하면서 유치환과의 운명적인 조우(遭遇)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서른 일곱과 스물 아홉의 나이로, 같은 통영여중에 근무하면서 서로에 대한 연정(戀情)이 뭉개구름 처럼 피어 올랐고,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의 청마였지만, 유교적 가풍( 家風)에 길들여진 청상과부(靑孀寡婦) 정운은 그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기에, 고통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는 가슴 앓이 사랑으로 살아가야 했다. 유치환은 부산 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인 1967년 2월 13일 저녁, 예총 일로 문인들과 어울린 후 집으로 돌아가다 시내버스에 치어 59세에 사망하면서 정운과의 20년간의 끝 모르던 사랑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만다. 두사람 간 수천통의 편지 속에 남겨진 가장 대표적인 시가 바로 청마의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어디 우리나라 뿐이었겠는가?   서양 음악사에 깊고도 아련한 선율로 남아 있는 '클라라와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도 마치 한 곡의 아름다운 음악 같다고나 할까. 이보다 더 멋진 세레나데(serenade)가 또 어디 있으랴! 브람스(Johannes Brahms : 1833~1897)가 클라라(Clara Schumann : 1819~1896)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클라라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고, 또한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의 아내 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슈만은 젊은 브람스를 만나보고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음악계에 소개했고, 클라라 또한 남편 곁을 지키면서 브람스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브람스는 클라라를 음악의 뮤즈(Muse: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9명의 학문과 예술의 여신)로, 삶의 등대로 여겼다고 한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클라라. 하지만 그 사랑은 음악 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클라라는 워낙 빼어난 미모와 기품 있는 태도에, 음악적 재능까지 특출했기 때문인지, 일찌감치 14살 무렵부터 9살 연상인 로베르트 슈만과 사귀기 시작했는데, 이를 눈치 챈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 하고 1840년 21살의 나이에 슈만과 결혼하게 된다. 이는  공교롭게도 시대는 달라도 정운 이영도 역시 클라라와 같은 21살의 나이에 결혼했던 것이다. 클라라와 브람스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음악과 인생을 나누게 되었고, 다만 어떤 순간에도 그 경계를 허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브람스는 독신으로 살았고, 클라라 역시 남편 슈만이 죽은 이후에도 브람스를 '영혼의 친구'로 간직하며 살게 된다. 브람스는 슈만이 양극성 장애(조울증) 로 입원해 있을 때도 슈만의 가정을 돌보면서 클라라와 아이들을 지원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브람스와 클라라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좋은 감정을 품게 되었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 면서 존경과 애정을 담았다고 한다. 그뒤, 슈만이 죽은 뒤 두사람은 수십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 공유하고 응원 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음악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두사람의 관계가 '깊은 우정이었는지, 연애였는지' 에 대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브람스는 클라라를 '내 영혼의 빛'이라고 부르 면서 애정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클라라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는데, 아쉽게도 슈만 사후 몇년간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는 불태워지고 없고, 일부만 남아 있는 편지에서 이들의 사랑이 깊은 신뢰와 애정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람스의 음악에는 클라라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그중 <인터메초 OP, 118-2>는 세간에서도 공공연하게 '브람스의 러브레터'라 할 정도로 클라라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나는 곡이다. 클라라 역시 브람스의 음악을 누구 보다 잘 이해했고, 곡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연주했다고 한다.   클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음악은 말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에 이르러 있군요! 당신의 마음이 그대로 흐르고 있어요!" 이들의 사랑은 끝내 닿지 못했기에, 더욱 절절했고, 가슴 깊이 음악인의 내면에 녹아 있는 듯하다. 브람스는 그의 63번째 생일에 베이스 성부와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änge>를 완성 했는데, 이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에서 가져 온 가사로, 모든 세속적인 일의 허망함을 다루면서 근심과 고통의 구원자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관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다. 다만,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가사를 따온 마지막 노래에서 브람스는 사랑의 힘을 열광적으로 찬양했는데, 이 작품은 병세가 심각해진 클라라 슈만에 대한 사려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무렵 브람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친한 벗(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인 그녀와의 만남은, 브람스에게 "가장 커다란 풍요와 가장 고귀한 만족을 가져다 준,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경험"이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녀를 잃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나 할까. 결국 1896년 5월 20일, 클라라는 죽음을 맞았는데, 브람스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무리하게 밤 열차로 가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열차를 놓치는 바람에 장례식 참석을 포기하고, 클라라가 남편 슈만과 나란히 묻힌 본(Bonn) 으로 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 이후 브람스 역시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을 자주 찾아야 했으며, 심각한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합창 전주곡 Eleven Chorale Preludes> 곡을 작곡했는데, 그 마지막 곡은 판타지아 <오 세상이여, 나는 그대를 떠나야만 하네, O, Welt, ich muss dich lassen>이다. 브람스는 그 이듬해인 1897년 3월, 연주회에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후 4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결코 표현될 수 없을 법한 두사람의 감정,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랑보다 더 진솔한 고백!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한번도 '사랑' 이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그 절제된 감정이입 그 자체가 오히려 더 숭고한 사랑의 결정체가 아니었을까? 작금의 세태에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고, 막장 드라마가 독버섯처럼, 마약과도 같이 공공연하게 번지고 있다. 이 모두가 사랑과 믿음이 없는 불신의 소산일 것이다. 성경에서도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다.   그렇다! 그 많은 사랑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랑은 역시 나라 사랑일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의 노래가사처럼, 오로지 나라사랑, 겨레사랑 애국심으로 해란강가를 누비던 고귀한 선열들!   올 한해 우리 사회 전반에 사랑의 향기가 이른 아침 물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나길 고대해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는 왜 또 그렇게 오버랩 되는지! '클라라와 브람스', 그리고 '청마와 정운의' 플라토닉하고도 절제된 종류의 사랑 또한 많아지기를 갈망해 봄은 필자만의 과욕일까?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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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9
  • [강호성 칼럼 23] 客窓寒燈 -후회는 결코 앞서지 않는다
      <후회는 결코 앞서지 않는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를 되새기자! 어느 고등학교의 교실 벽에 걸린 급훈! "후회는 앞서지 않는다!"   우리가 학창시절에는 늘 그러하듯, 무심코 지나칠 법한 글귀건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가지 선택을 해야 되고, 또 그에 대한 결과를 경험하다 보니, 이 급훈의 의미가 다시한번 무겁게 뇌리에 맴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이 말은 "돌아오는 빛이 다시 비친다!"는 뜻으로, 중국 고전이나 문학 작품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빛남'을 상징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석양(夕陽)이 지기 직전에 잠깐 반짝이는 하늘 빛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해질녘에 붉게 물든 석양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음이라.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이나, 신라의 경애왕 등은 국운이 기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쾌락과 허영에 탐닉하다 패망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이 말 또한 한마디로,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나부터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옛 선현들은 자주 이 사자성어로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과 같은 신독(愼獨: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 으로 삼았다고 한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  그래서 회광반조는 삶의 매순간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자신을 돌아 보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하겠다. 그리고 해질녘 노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또 불가(佛 家)에선 '밖으로 향한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라는 뜻으로, 옛 선승들이 제자를 가르칠 때, "세상 사람들은 눈을 뜨고 바깥 세상의 현상만 쫓느라 정신이 없구나!    그러니 번뇌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회광반조는 자아에 대한 성찰적 의미이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거나 세상의 문제를 비판하는데 익숙하던 것을, 자신을 돌아 보라는 의미로,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등 끊임없는 자기 질문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겠다. 조고각하(照顧脚下)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 때 '오조법연(五祖法演1024~1104, 중국 선종 제 47대 조사)'이 제자 셋과 함께 밤길을 걷는데, 갑자기 들고 있던 등불이 꺼졌다.    이때 오조법연은 세사람의 제자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첫번째 제자 曰, '채색 바람에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출 것이다."라고 했고, 두번째 제자는, '쇠뱀이 옛길을 건너 가네(?)'라는 답을 했다 하고, 마지막 제자가 바로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이 꺼져서 어두워진 김에, 이참에 자신의 과오를 천천히 되돌아 보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말 또한 불가(佛 家)에서 수행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나의 과오를 돌아보며 정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말이다. 필자도 한때 '국궁(國弓)'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는데, 활쏘기,  특히 국궁에는 집궁 8원칙(執弓8原則)이 있다. "선관지형(先觀地形) / 후찰풍세(後察風勢) / 비정비팔(非丁非八) / 흉허복실(胸虛腹實)   전추태산(前推泰山) / 발여호미(發如虎尾) / 발이부중(發而不中) / 반구제기(反求諸己)"라. "먼저 지형지물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바람의 방향을 살펴라.   자세는 고무래 정자도 아니고 여덟 팔자도 아닌  어깨 넓이만큼 적당한 자세를 취하라.   먼저 활 시위를 당길 때는 태산을 밀듯한 기세로 잡아 당기고,   화살을 놓을 때는 무서운 호랑이 꼬리를 내치듯 부지부식간에 놓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녁에 명중하지 않았다면,   네 자신에게서 그 잘못을 찾아 보라!"   이 마지막 구절의 반구제기(反求諸己)는 맹자(盟子)의 공손추(公孫추)편에 나오는 말이다. 또 우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수원수구(誰怨誰咎)'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도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스스로를 돌아 보며 책임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가톨릭에서도 이런 류의 글귀가 시선을 끌게 한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이 말은, 원래 가톨릭 미사(참회의 기도)에서 유래한 경건한 고백문으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사용하는 라틴어의 표현으로, 단순한 사과를 넘어 깊은 반성과 책임의식을 담고 있기에, 정치, 종교, 그리고 대중문화 등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정치인이든, 기업가이든, 상대가 비난 받는 일에 쌍수 들고 앞장설 게 아니라, 나부터 돌아 보며 자기 반성의 자세를 보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작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한 책임 전가나 위선(僞善)행위들이 도를 넘은 것 같아 심히 안타깝다. 또한 개인이나 조직  그리고 국가 또한 성공이나 흥함이 영원하지 않기에, 늘 경각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올해는 丙午年 붉은 적토마의 해이다. 석양 녘에 잠깐 반짝하는 삶이 아니라, 매순간을 마지막처럼 여기고, 돌다리를 건너듯 자신을 돌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후회함이 덜한 한해가 되길 염원해 본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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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성 칼럼
    2026-01-05
  • [강호성 칼럼 22] 客窓寒燈 - 조선시대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럽다?
      < 조선시대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럽다?  장애인도 당당하게 정승 반열에 올라! > 유교(儒敎)와 성리학(性理學)으로 길들여진 조선(朝鮮).   서얼차대(庶孼差待:서출자를 정실자와 차별)와 반상(班常)의 관계 등 신분 사회로 알려진 조선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러움을 자아낸다. 물론 이는 양반계층에 집중된 것이기는 하지만, 장애의 유형에 관계 없이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과거시험 을 통해서, 말단(末端)인 종9품에서 정승 벼슬인 정1품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례를 보면,   황희(黃喜:1363~1452)정승과 허조(許稠:1369~1439)정승은 조선시대를 통털어서 모두 세종을 섬기면서 정사를 도와 태평성대를 이룬 명재상들이다. 허조는 척추장애인(꼽추)으로,  오늘날 휠체어를 타거나 시각장애를 가진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은 드물게 있지만, 척추장애나 왜소장애를 가진 고위 공직자는 보기가 어렵다. <광해군 일기>1609년(광해1)2월 18일 기록에, "국가에서 정승을 두는 것은 오직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데 있을 뿐, 다리 힘의 강약은 본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보행장애(걷지 못하는)를 가진 심희수(沈喜壽:1548~1622)는 선조와 광해군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 그리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기까지한 장애인이었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심희수와 기생 일타홍(一朶紅:한떨기 꽃)의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이렇게 전한다. "기생 일타홍은 장애로 인해 방황하던 심희수를 학문에 매진하도록 해서 과거에 급제까지 시켰지만, 그녀는 일찍 죽어, 뒷날 심희수 부부 옆에 묻혔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심희수와 부인 광주 노씨의 쌍분(雙墳)좌측에, '일타홍금산이씨지단(一朶紅錦山李氏之壇)'제단이 있다. 심희수에 관한 기록으로는, <광해군 일기 중초본>1613년(광해5)5월 18일에, "심희수가 입시하였으나, 앉은뱅이 증세가 있어 왕이 중관(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오르내리도록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뒤 심희수는 장애를 핑계로 5차례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 때 소론의 영수였던 파평 윤씨 윤지완(尹趾完:1635~1718)은 한쪽 다리가 없어 '일각정승(一脚政丞)으로 불렸다. 그는 동상(冬傷)이 악화되어 다리를 절단했고, 걸을 수가 없어 사직을 원했지만, 그를 신임했던 숙종은 부축을 받아서라도 속히 입궐하라고 했다 한다.   <숙종실록>1694년(숙종20)윤5월 28일 기록에, 우의정 윤지완이 상소를 올려, "다리의 병이 심하여 대궐의 섬돌에 오르내리며 출입하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면직시켜 주소서!" 라고 아뢰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 "이미 출입할 때 부축받으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어찌 사양하기를 이렇게 까지 하는가? 경은 내일 아침에 나오라!" 고 재촉했다.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조부인 홍현보(洪鉉輔:1680~1740)는 말못하는 언어장애인(벙어리)이었다.   홍현보는 1718년(숙종44)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으나, 풍산홍씨 집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외손인 정조(正祖)와 맞섰고,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부친인 홍봉한 (洪鳳漢:1713~1778)과 숙부 홍인한(洪麟漢:1714~1775)은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극렬하게 반대하다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하자 처형 당했다. <영조실록>에는 홍현보를 낮게 평하고 있다.   1740년(영조16)윤 6월 10일 기록에, "홍현보는 젊어서 급제하였으나, 병을 앓다가 언어장애(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했고, 재능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전주 이씨 이민서(李敏敍: 1633~1688)는 정신착란을 일으켰지만, 벼슬에서 쫒겨나기는커녕 오히려 중용되었다. <현종개수실록>1670년(현종11)   10월 23일 기록에, "이민서를 고양군수로 삼았다. 옥당(玉堂:홍문관)에 근무할 때 여러날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미치광이 병이 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괴했다는 말을 들어 조정에 있다가 불안하여 외직을 맡았다!"고 했다. 지조가 곧고 문장이 탁월했던 그는 곧 다시 서울로 불려왔다.   <숙종실록>1688년(숙종14)2월 2일 이민서 졸기(卒記)에는,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던 자라도 정직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왕들도 장애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도 많았다. 숙종(재위1674~1720)은 시각장애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숙종실록>1717(숙종43)7월19일 기록에, "지금 왼쪽 안질(眼疾)이 더욱 심하여 전혀 물체를 볼 수가 없고, 오른쪽 눈은 물체를 보아도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   소장(疏章:상소)의 잔글씨는 마치 백지를 보는 것과 같고, 비망기(備忘記:임금이 명령을 적어 승지에 전하는 문서)의 큰 글자도 가까이에서 봐야 겨우 판별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분명히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소연 했다. 선조(재위 1567~1608)도 정신병으 로 고통 받았다고 한다.   <선조실록>1598년(선조31)2월 5일 기록에 선조는 비망기를 통해, "심질(心疾:정신병)이 더욱 심해져 전광증(顚狂症:조현병)으로 크게 부르짖으며, 사람과 사물을 살피지 못하니 놀라 탄식 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의 장애인은 자신만의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고 결혼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다만, 왜소한 신장을 가진 장애인이나 팔다리가 없는 지체장애인 그리고 신분이 낮고 재력이 없는 장애인은 혼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가족 부양을 원칙(자급자족의 가족사회) 으로 했으나, 국가 차원의 장애인복지 정책으로, 군역 등 국가의무 면제(독질 및 폐질자 신역 면제)와 장애인이 중범죄를 범했더라도 정상을 참작 (살인자도 형벌 등급을 낮추어 유배형으로 하고, 역모죄에 연루되더라도 처벌 면제)하도록 했다. 최근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시위로, 지하철4호선 혜화역 하행선이 무정차 통과'라는 뉴스가 뇌리를 맴돈다. 내용인즉 '장애등급제 폐지 촉구와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 촉구(예산 없이 권리없다)'를 위한 지하철 선전전 (宣傳으로 서로 자기편의 이익을 꾀하거나 주의 및 주장을 펴기 위한 경쟁)시위인데, 이날로 벌써 973일째라고 한다.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것은 결코 바람직 하진 않지만, 무대책으로 방관하는 당국의 자세도 또한 결코 온당하지 못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GDP 대비 장애인 복지예산이 OECD국가의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평생을 복지 전문가로 살아온 필자이기에, 더더욱 할말을 잃게 한다. 미국은 복지국가의 반열에 들지도 못하지만, 록키산 중턱에 장애인 전용 낚시터가 있다.   물론 장애인이 이곳에 와서 낚시를 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는 장애인의 니드(need)에 대한 접근권의 보장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도 심각한 수준이다. 언제까지 장애인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시위에 나서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조선시대로 돌아가 사는게 장애인들에겐 더 합당한 복지가 되지 아니할까? 범 국가차원의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장애인 복지대책이 시급하고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원문대로 옮기기 위해 장애인에 대한 용어를 비속어로 표기해서 유감임을 밝힙니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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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1
  • [강호성 칼럼 21] 客窓寒燈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에비타, 그녀는 聖女인가, 惡女인가?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 곡은, 뮤지컬 에비타(Evita)의 대표곡으로, 1996년 마돈나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에비타>의 사운드 트랙을 통해서 그녀의 목소리로 재해석된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제목에서처럼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에게 전하는 '에바 페론'의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있어, 감동적인 멜로디와 진정성 있는 가사가 특징이라 하겠다. 지금도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로, 성녀(聖女)로 추앙 받고 있는 에바 페론! 그녀의 본명은 "에바 두아르테 페론(1919~1952, Eva Duarte Peron)"이다. 에바(에비타)는 1919년 유부남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사생아 중의 넷째이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고, 사생아 신분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5살 때 배우의 꿈을 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출한 후,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연극배우와 성우 등의 연기 생활을 하다, 1944년 아르헨티나의 '산후안'에서 1만명이 사망한 대지진 현장에서 지진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행사에서 이재민 구호기금을 마련하고 있는 운명의 남자인 '후안 페론(당시 노동부장관)'을 만나게 된다. 당시 후안 페론은 첫번째 아내와 사별 한 상태로, 25살의 에비타에 반해 1945년부터는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안 페론은 노동부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이듬해인 1946년 6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에바는 그후 6년 동안 영부인으로서, 주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발언을 통해, '친페론주의' 노동조합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에바는 영부인이 된 후에 후안 페론 대통령 못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는데....., 그녀는 노동부와 보건부를 통해 자선단체인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학교와 병원, 양로원 등을 세우고 각종 자선사업을 실시하면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그녀는 병원을 직접 방문하여 나병 환자와 매독환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성녀(聖女)로 추앙 받게 된다. 사실 에바 페론은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성녀형 카리스마 유혹자'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모와 함께 처세술 또한 탁월했던 것 같다. 에바는 종교와 드라마를 활용한 '성녀형 카리스마'를 가진 유혹자임이 여기 저기에서 드러난다.   드라마 전문 작가를 고용하여, 드라마틱한 포퓰리즘적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능수능란한 연설에서, 또 자신이 실제로 빈민층에게 보여지는 구제 활동에서 전문 촬영작가들을 대동하여 영상화 하고, 나병 환자나 매독 환자의 뺨에 입맞춤 하면서 성녀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는 등의 퍼포먼스가 그녀의 가려진 진면목 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부금을 거두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죽어가면서도 성녀의 이미지를 잃지 않고, 독재를 이어가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에바페론 재단은 1940년 대 후반에 약 300억 패소(한화 2,363억원)의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자금으로 14,0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매년 40만 켤레의 신발과 50만개의 재봉틀, 그리고 20만개의 냄비를 구입하여 빈민가에 나눠주는 등 이른바 '에바 시티'를 건설하기 위한 구상을 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유럽 여행을 핑계로, 스위스에 은행 계좌를 개설하여, 페론 재단의 기금은 모두 스위스 은행 계좌로 들어 가게 했고, 에바 페론은 이를 개인 계좌처럼 사용하면서 사치를 즐기게 된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여성 참정권 옹호에도 앞장 섰으며, 여성 정당인 '여성페론주의당'을 만들기도 했다. 드디어 1951년,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페론주의' 를 발표하게 된다. '페론주의(Peronism)'로 잘 알려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부부정책은, 중산층을 육성하고, '개혁을 추구한 선구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페론주의는 그녀의 정치 기반인 저소득층과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또는 "셔츠 없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때의 산스쿨로트와 유사) 페론주의는 남미대륙의 포퓰리즘의 원조격으로,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a'vez 베네수엘라 제64대 대통령)'같은 지도자들도 페론주의에 학습된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그녀는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의 반대와 건강이 악화되자, 결국 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후안 페론은 1951년 연임에 성공하게 되나, 애석하게도 영부인 에바 페론은 이듬해인 1952년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후안 페론의 첫 부인인 '오렐리아'도 36살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후안 페론이 자궁경부암 유발 바이러스로 알려진, HPV(인유두종 바이러스)보균자였다고는 하나, 그 상관관계는 밝혀진게 없다. 후안 페론은 에바 페론이 죽기 전에 주치의로부터 자구경부암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으나, 부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유는 성녀로 추앙 받는 에바 페론이 자신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1955년, 아르헨티나는 경제 사정이  악화됨으로 인해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후안 페론은 실각되었고, 그는 망명 생활을 전전하다 만난, 세번째 아내인 마르티네스 이사벨과 스페인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거듭되는 정정 불안과 경제난에 허덕이던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다시금 페론주의의 향수를 불러 오게 되었고, 이런 분위기 덕분에 후안 페론은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973년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974년 79세로 사망하자, 당시 부통령이던 그의 세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다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페론주의에 편승한 에바 페론의 성녀화는 계속되었고, 그녀가 사망한지 60주기이던 2012년에는 에바 페론이 들어간 100페소짜리 한정판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그뒤 2018년부터는 아르헨티나의 100페소 지폐에 에바 페론의 얼굴이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같이  에바 페론의 행적이나 정치 이력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성녀로, 국모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음이 너무나 놀랍고도 부러움을 자아낸다. 우리는 언제쯤 영부인 얼굴이 들어간 지폐를 얄팍한 내 지갑에서나마 볼 수 있게 되려나!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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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 [강호성 칼럼 20] 客窓寒燈 - 고려보다 노국대장공주 왕비를 더 사랑한 공민왕
         <고려보다 노국대장공주 왕비를 더 사랑한 공민왕>   그러나 그는 지도자로는 낙제점이었다! 세계사적으로 경국지색(傾國之色:임금이 미혹되어 나라가 위기에 빠져도 모를 정도로 미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은 많았다.  하지만 대개는 군왕이나 임금이 일시적으로 여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거나, 뒤늦게 깨닫고 위기를 극복 또는 모면해 왔다. 그런데 500년 역사의 고려가 멸망하게된 단초가 되었던, 공민왕(제31대,1330~1374)과 원나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1330~1365)와의 혼인은 고려와 원나라와의 '통혼정치(通婚政治)'의 일환이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국가 간의 외교관계에 의한 통혼은  빈번했지만, 원나라와의 경우는 원이 고려를 침탈하여 무려 80년 동안이나 세자나 왕족들을 볼모로 원나라 수도에 잡아 두고, 원나라 공주들과 혼인시켜서, 부마국(駙馬國:사위의 나라)으로 삼았기 때문에, 상호간 침략이나 전쟁 방지 차원인, 일종의 안전장치로 작용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1341년 11살 때(당시 강릉대군 신분)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이때, 강릉대군(후의 공민왕)은 원나라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원나라 공주들은 고려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서 백성들에게까지 하대(下待:낮추거나 함부로 대함)해서 민심을 잃었지만 노국대장공주는 강릉대군을 진심으로 아꼈다고 한다. 그리고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과 함께 고려로 귀국한 뒤에도 남편의 정치개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조력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정략 결혼의 차원을 넘어, 진심어린 애정과 동반자적 관계로 보여지는 부분이다. 공민왕은 즉위 초 원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이른바 친원(親元)세력들을 숙청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특히 몽골풍의 복장과 변발(辮髮)을 금지시켰고, 빼앗겼던 북방의 영토 수복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이와같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변함없는 지지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공민왕은 성격면에서 매우 우유부단했던 탓에, 결정적인 순간에 우물쭈물 하거나, 흔들릴 때가 많았다. 때문에 또한 의심이 많아서 신하를 함부로 죽이거나 숙청을 자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는 단순한 내조에 그치지 않고 남편 공민왕이 흔들릴 때마다 따뜻한 조언과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원나라 출신이었음에도 고려의 자주성을 지지하고, 고려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왕비의 태도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도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후 공민왕 재위 15년차인 1365년, 개혁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던 때, 노국대장공주가 난산(당시로는 왕비의 나이가 30대라, 노산이었다) 끝에 태아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15년간 공민왕비로, 그리고 고려인으로 살다 간 것이다. 사관(史官)이 기록한 고려사에 의하 면, 《공민왕은 즉위 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功臣)과 현신(賢臣)이 참살되거 나 내쫓겼으며,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건설같은 무리한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 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後賜)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嬖臣아첨 잘하는 신하)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자를 죽여 입을 막아 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공민왕의 운명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1374년 9월 22일, 환관 최만생이 후궁 익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누가 아비라더냐?"   "홍륜이라 하옵니다."   이에 공민왕은 절대로 발설해선 안될 계획을 말했다.   "내일 창릉을 배알할 때 짐짓 주정을 부려 홍륜 무리를 죽여 입을 막겠다. 너도 이를 알고 있으니 면치 못할 것이다!" 몽진(蒙塵)을 결정하고 절치부심 결전을 준비하던 공민왕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었다. 판단력마저 흐려졌던 그날 밤 최만생과 홍륜은 침전으로 들어가 잠자는 공민왕을 흉기로 내리쳤다. 이때 뇌수(腦髓)가 벽에까지 튀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고려국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고, 18년 뒤인 1392년 고려는 패망하고 말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마땅히 아내 사랑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인(公人)이거나 일국의 왕이라면, 아내 사랑도 중요하지만, 나라 사랑과 백성 사랑에 우선 방점을 두어야 한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려를 자멸(自滅)로 이끈 공민왕의 허망한 죽음과 말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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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4
  • [강호성 칼럼 19] 客窓寒燈 - 드라마틱한 삶을 산 안톤 체호프
      <드라마틱한 삶을 산 안톤 체호프>   의사로서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괴짜! 우리 속담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이말은, 아마도 남의 일은 현명하게 잘 해결하면서, 정작 자기 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을 빗댄 말일게다.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大文豪)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러시아의 항구도시인 '타간로그'에서 식료품가게 를 운영하는 농노 출신의 아버지 '파벨'의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농노(農奴)출신이 었으나, 할아버지 대(代)에 자수성가 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체호프가 16살 사춘기가 한창이던 무렵인 1876년 아버지 파벨은 체호프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야반도주 (夜半逃走)하였다.   왜냐하면 사기를 당해 파산했기 때문 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악성 채무자는 범죄자로, 감옥에 가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피신한 것이다. 체호프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을 마무리하게 하기 위해 남았는데, 어린 체호프는 이때부터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 파벨은 평소에도 폭력을 일삼는 가장으로, 아내에게는 수시로 소리를 질러 대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체호프의 뺨을 때리기도 했으며, 스프가 짜다는둥, 집 청소가 안되어 있다는둥, 집안이 온통 혐오와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곤 했다. 그럼에도 그의 부친은 그림과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어, 지역 러시아정교회의 교회성가대를 조직하고 지도하였는데, 체호프는 7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 산하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형제들과 함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때의 경험이 훗날 체호프가 저술한 많은 작품세계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안톤 체호프에겐 이 고등학교 시절이 힘든 시련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한다. 공부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노동현장 에서 노동자들과 부대끼면서도 즉흥적 으로 떠오른 콩트를 신문사에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가기도 했다. 체호프의 삶은 마치 거친 드라마와도 같았다고 할까.   그의 문학성은 그의 거친 삶의 궤적 과도 닮아,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라기 보다는, 야생에서 자란 들풀에 가까운, 즉 바람과 비, 그리고 햇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자연 그대로의 문학이라고 하겠다. 체호프는 명문 모스크바 의과대학 입학과 동시에 러시아의 유명 신문인 '노보예 브레미야'사(社)의 사주(社主) 인 "수보린"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체호프의 삶은 의사(醫師)로서의 삶과 작가(作 家)로서의 삶이 구분되지 않았다.   환자의 몸과 인간의 심리를 보듬고 있기 때문에, 이 양자의 직업이 서로 내통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할까? 그가 펜을 들었을 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냉철한 의사였고, 하얀 가운(gown)을 입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약자(弱者)를 보듬고자 하는 문인(文人)이었다. 특히, 체호프의 여성에 대한 표현은 마치 현미경을 든 의사마냥 모든 문인들이 드러내길 주저하던 여성의 욕망이 그의 원고지 위에서는 적나라하게 그대로 구현되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약사의 아내'나 '아가피아', '불행' 등이 이런 부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러시아 문학계가 그의 작품을 놓고, '외설적이다, 소설이 아니다.' 라고 비난하자, 체호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예술문학의 사명은 절대적이고 거짓 없는 진실에 있다!"  즉 진실하기만 하다면 문학은 더 이상 도덕적 판단의 영역이 될 수 없다고 항변한 것이다. 의사로서의 체호프는 어린 시절 생활전선에서 마주한 동료들과의 연민 때문엔지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어디든지 기꺼이 찾아가 무료로 진료해 주는 등 문학인의 여리고 섬세한 감성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체호프는 1897년부터 결핵으로 인한 각혈로 고생하게 된다.   의사로서의 체호프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증상을 자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다가 점점 상태가 악화되자, 스스로 병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같이 그는 과로한 삶으로 인해, 결핵으로 죽은 그의 형처럼 결핵에 걸렸지만, 글쓰기와 진료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노보예 브레미야'사의 사주인 후원자 '수보린'이 진료를 멈추고 글쓰기에만 집중할 것을 권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의료는 저의 아내요, 문학은 저의 애인입니다!"  이말은 둘 다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절묘한 농담이었다. 이런 가운데 체호프는 1901년, 자신의 연극에 출연했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자녀는 생기지 않았다.  아내인 크니페르는 결혼 후에도 배우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었고, 체호프는 요양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는데, 그 시기가 오히려 그에게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시기였다. 1904년 5월!   결핵은 끈질기게 체호프를 괴롭혔다.  그리고  1904년 7월 2일 밤, 체호프가 고열 등의 증세를 보이다가 벌떡 일어나서 독일말로, "나죽네!(Ich sterbe)"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며칠 뒤 결핵은 기어이 그를 삼키고 만다.  독일 바덴 바일러에서 독일인 의사가 그를 진료했으나, 얼마 안가서 의사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하기를, "마지막 가는 길에 샴페인을 주도록 하세요!"   이 말에 아내인 '올가'가 울음을 터뜨리며 샴페인을 따랐고, 샴페인을 입에 머금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얼마만에 마셔보는 샴페인인지!"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만44세!   러시아의 소설가로, 극작가로, 의사로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문호로 불리면서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체호프가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불가(佛 家)에서는 업장소멸(業障消滅)이란 말이 있다.   이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을 때, 그 사람들과 전생, 전전생에 얽혀 있었던 악업의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원리'를 말한다고 한다. 11월 13일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미래를 좌우할 '대학입학수학능력검정시험'이 있는 날이다. 조기교육 광풍(狂風)에, 부모세대의 허리를 휘게 하는 사교육에 우리의 귀한 꿈나무와 젊은이들이 너나없이 내몰리고, 휘둘리고 있다. 언제쯤이면 우리 자녀들이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공부해서 남주는(?) 멋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그런 때가 오기를, 학(鶴)의 목은 아니지만, 없는 목이나마 한껏 길게 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련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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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 [강호성 칼럼 18] 客窓寒燈 - 운명(運命)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라이너 마리아 릴케! 운명이란 무엇인가? 스토아철학자들은, "세상은 보편적 법칙인 로고스(logos)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인간은 정해진 본질이 없이 태어나기에,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불가(佛 家)에서는 업(業)과 인과법 (因果法)에 따라 삶이 전개된다고 하면서도,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서 '업'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유가(儒 家)에서는 하늘이 내린 명(命)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실천과 수양으로 그 길을 넓힐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가(道 家)에서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곧 운명과 조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심리학자인 '프로이트(S.Freud)는 무의식과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반복되는 삶의 패턴을 만든다고 했다, '융(K.G.Jung)은 인간 내면의 원형이 특정 패턴을 형성하지만, '개성화 과정'을 통해 운명을 초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모름지기 가을이다.   난 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기도로 시작하는 시인 ''가을날''을 좋아 한다.  Rainer Maria Rilke  Herr: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ss,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ss die Winde las,   Befiehl den letzten Freuchten voll zu sein;   gieb ihnen noch zwei suedlichere Tage,   drae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Tage die letzte Suess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aetter treiben.    -aus:Das Buch der Bilder(1902)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녘에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감미로움이 스며 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깨어나 책을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 길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스럽게 헤맬 것입니다.   (가을날은 릴케가 1902년 27살에 파리에서 쓴 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Rainer Maria Rilke)   그의 본명은 Rene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이다. 난 학창시절 릴케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그가 여성인 줄 알았었다.   왜냐하면 서양사람들의 이름 중에 중간 이름(middle name)은 대개 종교적인 세례명을 쓰게 되는데, 릴케의 중간 이름인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에서 따온 이름이기에, 당연히 여성인 줄 오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아마 릴케의 어머니가 외아들을 유별나게 키우고자 했던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누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죽게 되자, 릴케는 여자 이름에, 여자 옷을 입고 7살때까지 인형처럼 여자아이로 길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미들 네임이 마리아로 비정해 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그의 유년시절은 고독했고, 그때의 경험들이 훗날 릴케 시의 중심 세계인 '고독'으로 자리매김했을 수도 있다. 그가 9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져, 황제의 궁 가까이에 있으려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살았다. 그 뒤에도  릴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독일, 프랑스, 러시아, 체코, 이태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떠돌며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조각가인 로댕(Auguste Rodin)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때 로댕에게 사사한 브레멘 출신의 조각가인 '클라라 베스토프(Clara Westhoff)'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그해 말에 헤어져 각자 서로의 길을 갔다고 한다. 이와같이 방랑시인이자 고독한(?)시인 릴케는 고독과 허무와 싸우면서도 1910년 일기 형식의 소설인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를 발표했는데,   이는 덴마크의 젊은 시인 말테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파리에서의 죽음과 불안에 대한 생각들을 기초로 하여 쓴 일기형식의 산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그의 몸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던 것 같다.    백혈병에 걸린 것도 모르는 사이 몸은 점점 원기를 잃어 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말테의 수기'를 읽고 그를 흠모하여 찾아온 이집트 여인에게, 평소 그가 좋아하고 가꾸던 장미꽃을 꺾어주려다가 그만 장미 가시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말았다. 급기야 릴케는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스위스의 어느 호숫가 외딴집에서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나이 51세! 릴케가 장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의 '묘비명'만 봐도 짐작이 간다. "Rose, oh reiner Win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ndern."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운(運)은 사람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나야, 좋은 운이 만들어 진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직감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또한 운명을 스스로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좋은 운명으로 키워갈 수 있겠다. 릴케는 그의 시 <가을날>을 통해 우리의 삶에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이 가을에 어떤 열매를 익히고 있느냐고!' 운명은 우리의 가을을 여물게 하기도 하고, 또 후회로 남게 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 앞에 맞서서 묵묵히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 나간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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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7
  • [강호성 칼럼 17] 客窓寒燈 - 인간수명(壽命)150歲 시대의 유혹
      <인간수명(壽命)150歲 시대의 유혹>   "영원한 꿈일까, 현실이 될까?"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열병식과 함께 거행된 중국의 제80주년 전승절 (戰勝節:제 2차 대전 승리 기념일)에 세계 각국 26명의 국가 원수와 정부 수뇌들이 참석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탄바 있다. 이날의 으뜸 화두(話頭)는,  중국의 시진핑(XiJinping, 習近平 :1953. 6. 15)주석과 러시아 푸틴 (Vladimir Putin :1952. 10. 7) 대통령의 대화 내용이다. 물론 두사람은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사실은 hot mic:발언 당사자가 마이크가 켜진 사실을 모른채 나눈 사담이나 발언이 방송을 통해 그대로 공개되는 상황), 사적(私的)인 대화를 이어 갔다는 데....., (시진핑)"과거에는 사람들이 70세 이상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70세가 되면 여전히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푸틴)"인간의 장기는 지속적으로 이식될 수 있습니다. 오래 살수록 젊어지고 (불멸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시진핑)"어떤 사람들은 금세기에 인간이 최대 150세까지 살 수 있다고 예측합니다." 위 대화 내용이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다고 했지만, 핵심 내용은 '불멸과 영생'에 관련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대화의 키워드는 "장기 이식과 장수, 그리고 불멸"이었다고 한다.   푸틴은 바이오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수명과 젊음을 유지하게 만들 것이라 고 강조했고, 시주석은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며 "150세"라는 숫자를 언급 해서 화제가 된 것이다. 두 나라의 정상인 이들은 만(滿)으로는 동갑인 72세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이자 욕구이다.  그러나 이들은 왜 하필 이 중요하고도 짧은 행사 시간에 이런 류의 대화를 했을까? 이는 단순한 친교적인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두 정상이 나이와 권력을 동시에 의식한 듯한 진지한 태도가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시주석은 2012년 이래 13년째 1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고, 푸틴 대통령 역시 2000년에 집권한 이래로, 지난 해 5연임을 확정지어, 현대판 '차르'로 군림하고 있다. 전 세계인의 평균 수명은 2023년 기준으로 72.6세인데, 중국인의 평균 수명은 2024년 기준 78.6세(남성76,0세,여성81,4세)이고,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약 70.0세 (여성77세, 남성 62세)에 불과하다.   두 나라의 평균 수명은 우리나라 83.0세(남성80,0세, 여성86,0세)는 물론 선진국들(80세이상)보다는 훨씬 못미치는 수치이다.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최장수 기록 (기네스 북 공식 기록)은 프랑스의 잔 칼망(Jeanne Louise Calment: 1875~1997)여사로, 그는 122세 까지 살았다고 한다. 물론 , 구약 창세기 때의 '므두셀라'는 백팔십칠세에 '라맥'을 낳았고, 라맥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내면서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69세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성경상으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평균 수명은 의료기술의 발전과 영양수준의 향상, 그리고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각국에서 '수명연장연구' 또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구글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그들이 세운 바이오 기업인 '칼리코(Calico)'에서 벌거숭이 두더지쥐(학명Heterocephalus glaben)실험을 통해 유전자를 변이시켜, 인간 수명을 12년 연장할 수 있는 연구에 성공했다는 핫 뉴스다! 문제는 수명연장 연구로 인해 사회적 부작용과 과학적, 윤리적 문제를 결코 경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화'를 없애거나 되돌릴 수는 있을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노화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라,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본다. 때문에 현재의 과학으로는 노화를 근본적으로 막거나 불로장생에 이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만약, 인간수명이 150세까지 연장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생산연령인구는 현재의 절반 이하로 감소할테고,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과 생산성 또한 급격 하게 둔화될 것이 뻔하다. 더불어 초고령화로 인한 소비 감소와 자본 생산성 저하에 따른 투자 위축 등으로, 우리 사회는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수명연장연구와는 별개로, 누구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건강수명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1601년 영국 구빈법(The Elizabethen poor law of 1601)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죽기 직전,  "나를 하루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대영제국의 절반을 주겠다!" 고까지 했다. 또한, 고대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 (不老長生)을 위해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고자 허황된 일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생활에 중요한 것은 건강한 삶이다.   규칙적인 운동이나 균형 잡힌 식단, 그리고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스트레스 관리 등을 통해 고종명(考終命 오복의 하나)하는 것이 진정 복된 삶일 것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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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3
  • [강호성 칼럼 16] 客窓寒燈 - 화산은 살아 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상기(想起)하자!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지난 7월 30일 진도 8,8의 초대형 강진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8월 2일에는 '크라세닌니코프' 화산이 폭발하였는데. 전문가들은 7월말의 초강진이 원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크라세닌니코프 화산은 지난 60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휴화산이었는데, 화산재가 6km 상공까지 치솟았고, 먹구름을 뭉친 듯한 거대한 잿빛 연기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초강진이 발생했던 지난 7월 30일에는 캄차카의 또 다른 화산인 '글류쳅스카야' 화산도 용암을 뿜어 냈다.  '캄차카 화산군(火山群)'은 캄차카 지방에 몰려 있는 화산대(火山帶)로, 일본 열도에서 쿠릴 열도로 이어지는, 이른바 "환태평양(環太平洋) 불의 고리(ring of fire)"이다. 인류 역사상 화산 폭발로 인한 최대의 참극은 이탈리아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을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폼페이는, 기원 전 60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로마 세계의 영웅이 되었음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탈리아 사르누스 강 하구에 자리 잡은 폼페이 도시국가는 로마보다 먼저 세워진 인구 3만여명의 계획 도시로,  천혜의 경관과 겨울이 짧은 반면 봄여름이 긴 쾌적한 기후라, 비옥한 토양과 수자원이 풍부한 덕분에 농업 또한 발달되었다. 또한 폼페이는 외지로 이어지는 바닷길 덕분에 교역이 활발했고, 그 때문에 이곳을 노리는 민족이 많아, 처음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출발한 후, 그뒤 삼니움족의 영지가 되었다가, 기원 전 89년 로마에 침략 당한 후 로마로 귀속되었다. 서기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이태리 남쪽 나폴리만 연안의 고대 도시 폼페이에 때 아닌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굉음(轟音)의 진원지는 나폴리 동쪽 12km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천년 이상동안 침묵하던 화산이 갑자기 분화한 것이다. 화산 폭발 당일, 시민들은 평소와 같은 가벼운 지진으로 생각하고 대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끼 돼지를 잡아 양념한 후 오븐에 넣으려던 여인, 밀가루 반죽을 밀어 빵을 빚던 제빵사, 해변에 누워 더위를 식히던 귀족까지도 재앙적인 화산이 폭발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위력은 40km가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연기를 내뿜으며, 용암 덩어리가 흘러내리면서 곳곳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었다. 폼페이 도시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라, 바람을 타고 온 화산재가 치명적이었다. 18시간에 걸쳐 100억톤이 넘는 화산재가 삽시간에 온 도시를 뒤덮고 말았다. 화산 폭발의 가장 큰 원인은 지구 내부의 판 구조운동 때문이라 한다.   지각은 여러개의 판(tectonic plates)으로 나누어져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들이 충돌하거나 갈라질 때 지하 깊숙한 곳의 마그마(magma)가 지표로 솟아 오르게 된다. 그 원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판의 경계 충돌이다.  해양판과 대륙판이 충돌하면 해양판이 밑으로 가라 앉아 마그마를 생성하게 된다는데, 대표적인게 일본 열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이다. 둘째로는 열정(Hot Spot)인데, 이는 지각 아래의 특정 지역에서만 뜨거운 마그마가 솟아나는 현상이다. 하와이가 이에 해당된다. 셋째로는 지각이 갈라지는 현상이다. 판이 서로 벌어지면서 마그마가 올라 오는 것을 말하는데, 아이슬란드나 대서양 중앙 해령이 해당된다. 화산 폭발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수개월 전부터 미세한 지진이나 지반 융기, 가스 배출 등을 통해 감지되거나 예고되기도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의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화산으로는, 미국 하와이의 킬라우에아(kilauea)화산과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에트나(Etna)화산, 일본의 사쿠라지마 화산(가고시마현)은 1955년 이후 매년 수천번씩 소규모 분출을 하고 있고, 과테말라의 푸에고(Volca'n de Fuego)화산은 2018년 대규모 폭발로 수백명이 사망하고 대피한 적이 있다. 그밖에 남극대륙의 빌헬름(Mount Erebus)화산은 영구적으로 용암호(lava lake)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화산 폭발은 농작물의 피해나 항공기 운항 중단 및 인명피해와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염 같은 건강에 위험적인 영향도 초래하지만, 화산재는 시간이 지나면 비옥한 토양 으로 변하고, 지열 발전 등 에너지 자원활용과 독특한 지형으로 인한 관광자원으로 각광 받기도 한다. 최근 일본이 '난카이 대지진' 확률을 재산정 하면서, 1,000km 이상 떨어진 한반도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한다. 이와같이  화산 폭발은 파괴의 상징인 동시에 지구의 창조자이기도 하기에, 평소 재난 대비교육과 대비시스템 (화산 감시 네트워크 및 위성 기술과 드론 활용 등)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또한 우리 모두가 기후 변화와 함께 자연과의 상생 공존방법에 대한 연구와 대안(대피 경로 및 안전지대 확보와 비상 키트 준비, 그리고 대피 훈련 등)이 반드시 동시에 모색되어야 하겠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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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9
  • [강호성 칼럼 15] 客窓寒燈 - 실패한 쿠데타(coup d'e'tat)의 교훈
      실패한 쿠데타(coup d'e'tat)의 교훈 '금성대군과 정축지변(丁丑之變)'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의 전쟁 아닌 전쟁이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적인 지향점이 달라서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같은 국민이면서도 종족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과 질시만 으로도 모자라, 오랜 기간 숱한 인명을 앗아가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 전기의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이 누구이던가?   세종의 아들로, 큰형 문종(文宗)과 둘째 형인 세조(世祖), 셋째 형인 안평대군(安平大君), 넷째인 임영 대군(臨瀛大君)과 다섯째인 광평대군 (廣平大君) 다음의 여섯째 아들이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이된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 사건)이후 모반혐의로, 경기도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배(移配) 되었다. 그뒤, 성삼문(成三問)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경상도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이 거주하는 집 울타리에 탱자나무를 둘러쳐, 일체의 바깥 출입을 막는 중죄인을 벌하는 형벌 가운데 가장 무거운 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노비들과 풍기 군수 및 기천 현감의 고변으로, 단종 복위 거사가 좌절되어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경상도 순흥부에서 금성대군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여 순흥부가 해체된 사건을 역사서에는 '정축지변(丁丑之變)'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에 관한 민담에 의하면, 원래 사약(死藥)을 받을 때 죄인은 죽기 전에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네번 절(북읍사배:北揖四拜)을 해야 하는데, 금성대군은,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고 하며, 한양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이로 인해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순흥 안씨(順興 安氏) 가문이 졸지에 평민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며, 살아 남기 위해 전국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정축지변으로 인해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의 다른 이름이 '피끝마을'이라 하는데, 그 유래는, 당시 무참하게 처형 당한 "마을 주민 들의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피끝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순흥 청다리 아래에 목이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나 흘러 가다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 라고 전해지고 있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성공했더 라면, 조선의 역사는 또 다른 모습이었 겠지만, 역사의 물줄기는 무심하게도 도도히 흘러 가고 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켜켜히 쌓인 역사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고하고 고귀한 인명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전쟁이나 쿠데타가 정당화 될수도,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성공한 쿠데타라 할지라도, 이 또한 국민들의 안위와 삶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된다.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온 인류가 손에 손잡고 다함께 평화와 번영을 외치자고 감히 제안한다면, 이 또한 필자만의 부질없는 바램일까.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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