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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9] 客窓寒燈 - 일모도원(日暮途遠)의 교훈 [전편]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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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6.2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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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모도원(日暮途遠)의 교훈>  복수의 화신 오자서(伍子胥)의 말로(末路)!

전편 <복수편>
 
필자는 한 때 중국 역사에 천착(穿鑿)한 적이 있다.

이십여년 전 중국에 출장을 갔다가 귀국길에 백두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때,  백두산 가는 길목의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의 한 호텔 외벽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글귀를 본적이 있다.
 
바로 대우그룹 창업주 故 김우중회장의 자전적 에세이 제목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이와같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다!"라는, 오자서(伍子胥,이름은 운員)의 일모도원(日暮途遠)의 교훈을 반추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오자서는 명문 가문으로, 대대로 이어져 온 명성과 함께,  그의 부친 역시 초 평왕의 태자 웅건의 스승 겸 보좌역인 태무 벼슬인 오사 (伍奢)의 둘째 아들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 화근 이었을까?
 
초나라 태자 웅건과 진나라 공주 맹영(孟嬴)을 화친의 일환으로 혼인을 시키고자 했지만, 맹영이 절세미인이라, 시아버지가 될 평왕이 반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때 평왕의 측근이었던 간신 비무기(費無忌)가 평왕을 부추겨서, 왕이 며느리를 가로채게 하고, 대신 태자에겐 공주를 따라 온 제나라 출신의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서 혼인을 시켰던 것!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어느 시대에든 간신배들은 있기 마련이다. 간신 비무기는 태자 웅건의 스승인 오자서의 부친 오사(伍奢)를 시기 질투한 나머지, 평왕에게 이같이 말도 안되는, 며느리가 될 진나라 공주 맹영을 부인으로 취하도록 꼬드겼던 것이다.

그후, 후환이 두려웠던 비무기는 평왕과 맹영 사이에 아들이 태어날 즈음 평왕이 늙어 죽고, 태자 웅건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 자신의 죄과가 탄로날까봐, 내친 김에 다시 평왕을 움직여서, 태자와 그의 후견인인 오사는 물론 오씨(伍氏)가문 전체를 없애기로 마음 먹었다.

끈질기게 간언하는 비무기에게 속아 넘어간 평왕이 태자 웅건을 죽이고자 할 때, 이를 눈치챈 태자는 가족을 데리고 정(鄭)나라로 도망을 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숙청의 칼날은 다시 오사와 두 아들을 향했는데, <사기史記>에 의하면, 평왕은 오사를 인질로 잡고, 두 아들에게 아버지 대신 희생하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교지를 보냈는데, 오자서는 거짓인 줄 알고 태자처럼 피신해서 훗날 복수를 하자고 했지만,형 오상은 동생 자서에게 피신한 후 자신의 몫까지 복수해 달라고 하고는 왕성으로 들어가 아버지 오사와 함께 처형당하고 만다.

이때, 오사는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처형 직전에,  "오자서가 살아 도망쳤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게 되리라!" 이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다.

위기일발의 오자서는 평왕의 부하 자객들이 그의 뒤를 쫓았지만, 어렵게 정나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열국지列國志>에 의하면, 오자서는 자신을 추적해온 자객들을 활을 쏘아 다 죽이고 한 사람만 살려보내면서 평왕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다. "평왕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

그래서 오자서는 먼저 정나라로 피해 온 태자 웅건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는데, 태자 역시 복수에 눈이 멀어, 정나라의 공작위를 찬탈한 뒤 정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초나라를 쳐서 왕위를 되찾고자 함에, 오자서가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실행하려다가 발각되어, 정공(鄭公)이 태자와 그 부인을 처형해 버렸다.

가까스로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 웅승을 데리고 도주하여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오자서는 태손 웅승을 돌보면서 오나라에 도착하여 환대를 받았다. 왜냐하면 오씨가문의 명성이 오나라까지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오나라도 왕위계승을 위한 분쟁이 생기자, 후에 오왕 합려(闔閭)가 된 '광(光)'을 도와 그가 보위에 오르자, 오자서는 오나라의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자서는 호시탐탐 초나라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 수 있었다.

오자서의 명성이 알려지자, 각국에서 인재들이 몰려왔는데, 그 가운데는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유명한 '손무(孫武)'와 후일 오자서를 죽게 만든, 내정(內政)의 명인인 '백비(伯 嚭)'가 합류하였다.

기원전 506년! 오자서와 손무의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진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시킨 후 대규모의 약탈과 방화 및 강간이 이루어졌다.

이는, 손무가 손자병법에서 강조했던 '민심을 얻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멀었는데, 아마도 오자서의 초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막지 못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땐 오자서의 일가를 몰락 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죽고 없었는 데, 그 소식을 들은 오자서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며,  수도를 함락시킨 후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구리채찍으로 수백대를 쳐서 시신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자,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이는 오자서가 가족을 잃은 지 무려 16년 만에 갚은 복수극이었다. 여기서 나온 고사(故事)가 바로 '굴묘편시(掘墓鞭屍:죽은 시체를 채찍으로 때림)'이다.

'굴묘편시' 소식을 들은 초나라 시절 오자서의 벗이었던 신포서(申包胥)는 사람을 보내 이렇게 오자서를 꾸짖었다고 한다.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인간된 도리로서 차마 못할 짓 아니오?" 라고 했는데,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일모도원:日暮途遠),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다(도행역시:倒行役施)"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뜻은,  '어차피 오나라의 국력만으로는 초나라를 그리 오래 점령하지 못하니까, 지금은 비록 잔혹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 놓는다!'였다.

이렇게 해서 오자서의 복수극은 성공한 듯 했다! 이것은 그가 품었던 복수를 위한 집념의 결실이리라! 하지만,  복수는 또 복수를 낳게 됨을 어찌 간과 했단 말인가?
 
 
::   강호성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한민대학교  부총장

-   한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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