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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국의 대구춘추 176] 내사랑을 앗아간 그미가 밉지않네
    이경국 칼럼니스트   흔히 말하는 情人도 戀情이 식어 버리거나 인연이 다하게 되면 갈라선다고 합니다. 그간의 서로 쏟아 부었던 사랑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쪽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동안 정신이 멍해 질지 모를 것입니다. 사랑의 절정은 서로가 빠져들어서 혼절지경에 이르러야 제대로 된 사랑으로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까지 송두리채 앗기게 되는 상태가 아날까 싶습니다. 주고 받음을 저울질 하거나 자기의 입장 에서만 생각한다면 이미 사랑은 괘도를 벗어난 이해관계가 개입된 일종의 거래로 보아야 합니다. 푹 빠져 있을 때의 여운으로 관계가 조금 시들해질 때는 힘을 더해야만 오래가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무리 스피드 시대이고 초테크 시대라고 하지만 사랑을 짧게 하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에도 뜸을 들여야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뜸은 숙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연인끼리는 서로 사랑을 많이 훔쳐야 합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최면으로 남겨야 옹이가 생길 무렵에 견디어 내는 힘으로 작용을 할 수가 것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살피면 부부지간에도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대다수 부부지간에도 일상을 시들하게 지내 오다가도 어느 한쪽이 먼저 떠나면 땅을 치면서 후회를 하는 경우를 많이 접해 봅니다. 설사 주위에 다른 아름다운 짝이 있어 한 눈을 팔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어느 천년에 아내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관계가 될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이 보일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세상은 달라지기 마련 입니다. 이는 연인이든 아내든 같다고 봅니다. 인간은 단물을 빼먹는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아내를 민법상 本妻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짝이 천사나 왕자인데도 다른 하늘의 별을 찾아 헤메는 묘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후회를 뻔히 알면서도 가보지 않아도 될 길을 선택을 하고 맙니다. 부부는 한평생 살다가 죽어도 함께 묻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니다. 조선의 왕릉도 합장을 한 단일능이거나 아니면 쌍분으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단종의 장릉만이 멀리 떨어져 있어 정순왕후 능의 주변의 소나무와 단종릉 주변의 소나무 한 그루를 지차체에서 옮겨 심었답니다. 필자는 소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서 17세 단종과 83세 정순왕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각하며서 눈물을 쏟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깊은 정이든 정인과 헤어지면 그 아픔은 당연히 오래 갈 것입니다.  잊혀진 여인은 <지나간 불꽃, old--flame>으로 남는다 했는데 적어도 오랜기간 가슴이 아릴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 불씨가 없는 사랑은 온기가 사라져서  냉혹 하기 짝이 없다고 봅니다. 오랜기간 함께한 情人이 떠나 버리면 적어도 석삼년은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고 머무를 것입니다. 석삼년은 9년의 세월이니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입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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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9
  • [이경국의 대구춘추 175] 어머니의 반짇그릇
    이경국 칼럼니스트   반짇그릇은 반짇고리의 안동지방에서 쓰는 방언이다. 소싯적부터 반짇그릇에 익숙했다. 반짇고리는 지금도 어색하게 들린다.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없으면 인간은 호기심이 크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는 여성의 복장에서 리얼하게 느낄 수 있는 남자들의 심리작인용 이기도 하다. 아마 인간이 원시시대처럼 나체로 살아 간다면 예술의 세계는 엄청나게 위축되지 않을까 싶다. 보이지 않는 힘은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른 의미의 <보이지 않는 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눈에 뻔히 보인다면 상상의 세계가 필요조차 없어기 때문이다. 소시절에 어머니께서는 반짇그릇을 장난감처럼 옆에 두고 수시로 쓰셨다. 중요한 내용물은 실꾸러미와 바늘, 가위, 골무도 있었고 어머니만의 쓰임새가 있는 물건도 헝겊봉지에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헝겊봉지는 끈으로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이 한때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은 작은 천들을 넣어둔 것인데 잡동사니지만 어머니의 유용한 물건들이었다. 아버지의 흰두루마기도 어머니 손을 거쳐야 풀도 먹이고 다름질로 구겨진 곳을 펴기도 했다. 인두로 동정을 달아 드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러니까 어머니 곁에는 반짇그릇과 화로가 늘 나란히 대기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일을 하시면서 언제나 흥얼거리셨는데 그것은 독백이나 방백이 아니고 어머니만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고유한 표현이셨다. 무생물과도 대화를 하셨는데 철이 들고 보니 필자도 생명이 없는 물체와 대화를 나누는 버릇이 생겼다. 음력 2월에는 장독위에 정한수를 올리시고 영두할미께 뭔가를 중얼거리시면서 비셨다. 귀를 기우려도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아마 우리 7남매의 건강을 비셨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본인이 잘 되시길 빌었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면서 비셨는지 여쭈어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어머니께서는 세상의 이치를 깨친듯 보이셨다. 인드라망(그물코)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늘 자식이 잘 되길 빌면 정성이 자식에게 미친다고 믿으셨던 것 이다. 무자식이 상팔자인 시대이다. 인구절벽의 암흑시대가 눈앞에 닥쳐 오고 말았다. 이는 나쁜문화가 전통을 오염시킨 결과인데 이를 돈으로만 해결할려는 정책에 쓴 웃음이 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을 돈으로 해결한 역사의 기록은 없다. 사랑은 결혼으로 결정체를 이루게 되며, 가정은 행복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헌겊봉지 속의 궁금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웃음을 지어본다. 사랑은 과학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광고효과가 있다고 해도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란 광고는 무리하다고 본다. 이러한 용어의 혼란은 사회를 좀먹기 때문이다. 침대가 가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지금은 가정마다 반짇 그릇은 물론이고 등잔과 호롱불도 사라져 버렸다.   국수를 밀던 안반과 홍두깨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집집마다 몇개씩이나 있던 부지깽이는 있는지 모르겠다. 부지깽이의 사용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들쑤시면 불이 꺼져 버린다. 불씨때문에 어머니들은 며느리로 시달린 세월이 길었다. 반짇그릇이 없으니 헝겊 봉지가 있을 턱이 없다. 명절이 되니 어머니 모습이 몹시 그리워 진다. 어느 별에서 우리들을 지켜 보시고 계시는지 여간 궁금하지가 않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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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2
  • [이경국의 대구춘추 174]출산(出産)을 기피하니 애기의 울음소리가 사라지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여지껏 컬럼을 써오고 있지만 이번 제목이 19字로 가장 길다. 애들의 글읽는 소리가 나면 나라가 흥한다 했다. 그러나 출산의 기피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으니 걱정을 아니할 수 없는 입장이다. 말세나 末法이란 말은 즐겨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워낙 그러한 증후군이 도처에 보이고 있으니 이러한 걱정은 기우(忌憂)일지라도 생각이  많이 따르기 마련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데 그것은 자녀를 두어서 代를 이어 나가는 것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지구인의 지극히 공통된 사항이다. 동물은 새끼를 낳아 번식을 하고 있다. 새끼를 낳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인간은 代를 잇는 다음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크고 작은 업적을 남기는 것이다. 저서를 남긴다거나 좋은 일로 뭔가를 남기는 것이 사회에 기여를 하는 것이다. 어찌된 심판인지 혼인도 기피하고 툭하면 이혼도 마다하지 않으며, 설사 가정을 꾸려도 자녀생산을 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는 좌경이 집권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들이다. 그나마 모든 정책을 현금을 풀어서 해결할려는 단세포적 발상이 난무하고 있다. 다행이 이같은 지원으로 그 효과가 미미하게나마 나타나기는 한다. 비젼이 없는 미래는 암울하다. 그런 모습이 훤히 보인다. 지구상 최악의 북한을 닮아가고 있으니 그만 혼절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를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오죽했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TV와 담을 쌓은 채 수심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까? 필자도 그러하다. 일상의 뉴스에 겁이 난다고 한다. 건전한 보수세력은 가슴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서 X-ray를 찍어도 간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고 이구동성이다. 세상사에 시들어 버려 간이 새까만 점으로 보인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절망은 없다. 칼춤이 極에 이르면 스스로 패망의 길이 도래한다는 사실이 역사이기에 희망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줄탄핵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의는 이길 것이다. 일시 국가의 신인도가 추락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코리아의 저력은 빛을 발하리라 확신한다. 다만 나라를 망쳐 놓으면 되살려 내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는 것이다.   文이 망친 나라를 짧은 기간에 많이도 구축하는 중에 부정선거로 당선된 패거리가 다수결의 횡포로 내란의 발작증세를 일으키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떠들어 대는 세상일지라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보수가 결집하는 위력이 온실의 국힘당을 끌어 내게하여 투쟁에 일부가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에누리 없이 빛을 보내고 있으니 좌경의 어두운 구석까지 빛이 들어가게 되었다. 젊은 이들이 빚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의가 승리한기 마련이다. 쌍무지개가 뜨는 꿈을 포기하기엔 이르다. 용기백배 하여 기다리면서 투쟁하는 것이 상책으로 보인다. 선거부정이 만천하에 드러나면 그것이 후손에게는 빛이 될 것이다. 이는 북한이 리더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 깨우치면 역사의 정답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카오스의 답답함은 인고의 기간만 참고 견디면 광명의 빛을 발하게 되리라 믿는다. 코스모스 세상의 품에 안기길 기대해 본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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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9
  • [이경국의 대구춘추 173] 개의 충성심 그리고 유기견
    이경국 칼럼니스트   개만큼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개는 모든 동물가운데 가장 먼저 가축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하다. 반려동물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위안을 반려견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하는 욕설은 거의 개에서 기인된 것이 많다. 우리나라는 '개 ㅈ같다'는 욕(辱)을 많이 쓴다. 서양도 그러하다. 이는 수케는 앉으면 거시기를 자랑하듯 삐죽이 내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리얼하게 보여주는 사랑의 행위때문에 욕을 많이 먹고 있다. 뒤로 붙어서 장시간 눈요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다가 상추밭에 실례를 하면 찍히게 마련이다. 욕을 먹을 짖을 하긴 한다. 그러나 개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데는 실력이 대단하다. 여자가 꼬리를 흔들면 탈이 나겠지만 개는 꼬리로서 주인에게 충성심을 보여준다. 시계방향으로 꼬리를 흔드는 것이 반가움의 표현이다. 인간보다 나은 점도 없잖아 있다. 설사 교미는 뭇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럼 없이 하지만 새끼는 마루 밑이나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낳는다. 본성이 그러하다. 인간은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하지만 애기를 낳으면 동리가 난리나듯 시끄럽다. 대문에 금줄을 걸고 공고하듯 알린다. 금줄에도 남여의 구분이 뚜려하다. 남자는 고추를 달고 여식은 솔가지를 다는 것이다. 숯은 공통적이다. 산부인과 병실이 떠나가게 비명을 지른다. 설사 애기를 낳지 않는 시대이긴 하지만 절차는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어머니 품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며 언어를 배우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토록 아끼던 반려견이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면 그만 유기견이 되어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린다.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은 처절하게 보인다. 불안해 하면서 눈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주인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곧 나타난다는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테지만 살기가 힘들어 키우던 개를 버린다고 한다. 이럴 때 개팔자는 기구해지고 마는 것이다. 버려진 자리에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기견을 보노라면 슬픔이 엄습해 옴을 느낀다. 애당초에 인연을 맺지 말아야 했다. 제주도에 여행가서 부모를 버리는 자식에 비하면 개를 버리는 정도쯤이야 할지 모르겠으나 생명을 그런한 식으로 취급을 하면 이는 엄청난 減福을 당할 것이다. 이같은 동물의 원혼이 결국 역병으로 앙갚음을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인을 반기는 충성심이 가득한 견공의 눈동자와 유기견의 불안해 하는 눈을 보면 금시 그 차이를 금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을 잘 만난 혈통이 좋은 개는 족보도 만들고 인간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몹쓸 주인을 만나면 개팔자의 설움을 당하다가 가마솥으로 들어가는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이는 고교시절 弄으로 핥던 Dog는 거꾸로는 God이니 개의 팔자의 폭이 그토록 넓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5년간 사랑을 받다가 떠난 우리집 반려견 <부치>는 간지가 오래 되었지만 며느리가 그려서 액자에 넣어 선물한 부치의 모습은 아직도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동물애가 이렇게까지 깊은 줄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수가 없는 세계임을 실토해 본다.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해서 탈이 날일은 없다고 본다. 다만 지나치기에 문제가 따를 뿐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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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1
  • [이경국의 대구저널 172] 쌀의 귀중함을 모르는 시대
    이경국 칼럼니스트   쌀은 우리민족의 5000년 역사에서 主食이었으나 워낙 귀하여 실컷 먹기는 커녕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김일성은 생전에 인민에게 이밥과 소고기를 배불리 먹게하는 것을 願이라고 했다. 이밥은 쌀밥을 말한다. 학창시절 도시락의 두껑을 열면 위에만 쌀알이 드문드문 보이지만 한 수푼만 뜨면 보리밥이나 조밥 일색이었다. 반전체 학생이 다 그랬으며 전교생도 그러했다. 그나마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못되는 학생도 무척 많았다.                 한때 쌀의 재고가 너무 많다면서 보관하는데 돈이 들어 간다는 등 부산을 떤 적이 있었다. 그 쌀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는지 아니면 북풍이 삼켜 버렸는지는 여지껏 모를 일이지만 아마 북에다 바쳤을 것으로 보인다. 쌀은 귀하기 짝이 없는 식량이다. 쌀밥(이밥)을 배불리 먹어 본 역사가 60여 년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밥익는 구수한 냄새는 소싯적과 다르다. 숭늉도 잘 끓이지 않지만 구수한 맛도 덜하다.  그러나 누룽지는 마트마다 팔고 있지만 가마솥의 누룽지와 맛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뗄감으로 밥을 지었으나 전기밥솥이 알아서 뜸까지 들여주는 시대가 되었다. 쌀은 너무나 귀하여서 생쌀을 먹으면 ''엄마가 죽는다''고 했다. 추수 후에 논위에 떨어진 벼이삭을 주워서 학교에 내면 그것을 팔아서 확성기도 사고 풍금을 사기도 했다. 5000년 가난속에 살아온 민족이지만 70년 만에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경제적 기적을 이루어 낸 나라이다. 21C에 선진국에 진입한 쾌거를 이룬 유일한 한국이다. 무슨 억하 감정이 있는지 문은 5년만에 경제를 망쳐 놓고서 배급주는 나라의 꼴을 닮아가게 했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은 깽판 정책이다. 탈원전의 책임은 능지처참형도 부족하다. 北向再拜에 넋빠지게 지내더니 북에 토사구팽 당한 꼴을 보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퍼다 주어도 북의 총구는 우리를겨냥하고 있다. 미사일을 불꽃놀이 하듯 쏘아 올리면서 희열을 느끼는 전쟁광 김정은이다. 主敵에게는 관대하기 짝이 없는 뇌가 꼬이고도 DRD4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 영구 집권할려는 음모를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줄탄핵으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론 조작을 하여도 하늘은 알고 있다. 세계여론이 수차례의 선거는 전산 조작으로 들통이 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보수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자각이 일면서 군중의 위력이 대단하다. 지금 세대는 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서양식 인스턴트 식품으로 덩치만 키우고 내실은 빈약한 젊은 이들이다. 땅박닥에 떨어진 쌀을 한 알씩 줍던 어머니의 주름진 손등에서 절약을 배웠다. 지금 부모의 유산에만 눈독을 들이는 기이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말세의 모습이 도처에 만연하고 있다. 서울대 설문조사의 결과는 우리를 경악케 한다. 부모가 연금을 받을 때 쯤 돌아가면 가장 좋다는 조사이다. 이런 것을 설문조사하는 학교도 웃기는 짓이다. 짐승사회로 유도하는 낯뜨거운 일도 보통미친 짓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도 쌀을 소중하게 여긴다. 가마니는 어떠한 저장용구보다 쌀을 보관하는데 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컨데 벼도 가마니 속에 있을 때가 좋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다. 가마니는 벼가 머물고 싶은 포근한 고향이었을 테니까..... 연어가 먼길의 고향을 냄새로 찾아 가듯이 가마니는 볏짚으로 엮은 것이기 때문이다. 편리만 추구하는 세상이니 손바닥에 털이 날까 늘 기우(杞愚) 같은 염려가 인다. 그리고 천수답으로 경작을  하였으니 그때는 하늘도 귀하게 여긴 시대였다. 논농사는 애환도 많다. 못줄을 넘기면서 모내기를 하던 모습이 스친다. 얼마나 못 살았는지는 젊은 이들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쌀밥의 뜸을 들일 때 그 냄새를 잊을 수 없다.  산골의 처녀는 쌀밥을 몇그릇 먹어 보지도 못하고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입을 덜기 위하여 남의집 식모로 가거나 아니면 시집을 보내고 말았으니 어머니의 타는 가슴을 생각해 보면 가슴이 저미어 온다. 쌀에 대한 인식의 재고와 교육이 필요한 시대인데 이를 고리탑탑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야말로 답답하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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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2
  • [이경국의 대구춘추 171] 화가 밀레를 그리워하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그림에 대한 문외한이긴 하지만 밀레에 대한 글은 여러편을 쓴 바 있다. 이는 밀레가 농부의 아들로 농촌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이기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밀레의 그림을 좋아하는 편이다. 소싯적 농촌 이발관에는 밀레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왜 하필 밀레의 그림이였는 지는 당시에 알 수는 없었다. 밀레는 파리에서 활동을 하다가 1849년 바르비종이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주하여 거기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화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파리는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몇년전의 코로나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유럽의 많은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 였다. 중세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사망케한 흑사병도 무시무시했다.  콜레라와 코로라는 ''ㅋ字돌림'' 이다. 둘다 몹쓸 병이다. 밀레는 농촌에서 <이삭줍기> 와 <만종>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만종'은 밀레가 옛날 일을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이다. 집으로 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감자를 캔 뒤에 이삭을 줍기 위해서다. '이삭줍기'는 수확을 하고 떨어진 이삭을 줍는 모습이다. 이삭의 경제적인 면보다는 생명의 외경을 느끼게 한다. 이는 필자도 소싯적에 농촌에서 경험을 해 본 일이다. 재벌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화가의 이름은 많이 안다. 예술은 길기 때문이다.   천민자본주의가 되다 보니 밀레의 그림보다 밀레등산복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버리다. '밀레를 그려보다.' 는 밀레를 그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밀레를 그리워 하거나 생각을 해 본다는 뜻이다. 이상하게도 명작을 남긴 유명한 화가들은 생전에는 입에 풀질도 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밀레와 고호가 그러하다. 마치 형편이 좋으면 예술혼이 사리지는 느낌을 받게 한다. 세계적의 거의 모든 대형박물관에는 이들의 그림때문에 찾는 관람객의 발길이 잦다. 피카소나 천경자의 그림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상세계에 푹 빠져들면 세상살이의 향락은 하찮아 보이며 삶의 양식도 상근기(上根氣)의 삶이 여실히 드러난다. 고뇌하는 깊은 예술혼의 힘은 생명이 길기 마련이다. 작품이 영혼을 투시하여야만 섬광 (閃光)을 느낀다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랑을 받는 작품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투혼을 발휘하지 않고선 그러한 색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색은 예술가의 손이 신의 손을 닮아서 작품으로 남는 것이다. 장남이 도예를 전공하여 아예 집에 연구실과 도자기를 굽는 시설을 구비해 두고 있는데 지금은 일시 다른 일을 하고있다. 옆에서 보면 안타까울 정도이다. 작품하나에 쏟아붓는 정성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는 인고의 시간을 겪지 않고선 옥동자를 볼 수 없다는 이치다. 임금이든 노숙자든 자식은 똑같이 존엄하고 귀하다. 그 마음을 알아야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본다. 밀레의 그림은 색채는 감미롭고 따뜻하지만 작품속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며 애틋함을 풍기고 있다. 오래 지나도 사랑받는 것은 인간 심연의 공통적인 사랑이 교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의 자료에 밀레를 설명함에 있어서 농민의 인생을 대변한 화가, 이삭줍는 여인들, 씨뿌리는 사람 등에 대한 설명을 우선시 해야 될 것이다. 온통 '밀레의 등산복' 얘기로 도배를 하고 있다.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얄팍한 상술이다. 물론 밀레도 한 때 춘화 (春畵)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빈곤한 농민의 일상을 장엄하게 그려 낸 화가임에 틀림이 없다. 밀레의 그림이 농촌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수천년동안 농업이 천하지대본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철이 드니 뒤늦게 세상의 이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따라서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가 없는 귀한 자산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예술가는 가난으로 점철된 생애이긴 하였으나 불멸의 투혼이 있어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밀레가 그러한 화가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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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춘추
    2025-01-06
  • [이경국의 대구춘추 170]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이경국 칼럼니스트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 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이어지는 ''바람이 불어오니 가을은 깊었네''다. 박목월은 함축언어의 절제를 아는 시인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만 병으로 죽게 되자 남긴 노래이다. 그러하다.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로 이어진다. 모두가 시차만 다를 뿐 가는 것이다. 만리도 먼데 구만리는 가장 먼 거리다. 이는 9라는 수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기러기는 다른 조류처럼 한 마리의 보스가 지배하고 그에 의존하여 복종하면서 사는게 아니다. 대표적인 철새로 먹이를 찾아 4만 킬로미터를 날아 오는데 리더를 중심으로"V자"대형(隊形)을 유지하며 머나먼 길을 날아 오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가장 앞에서 날아가는 리더의 날개 짓은 기류(氣流)의 양력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선두 주자는 뒤에서 따라오는 무리들이 70% 정도의 힘만 쓰면 날 수 있도록 맨 앞에서 온몸으로 바람과 마주하며 힘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먼 길을 날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음 소리를 내는데 우리가 듣는 그 울음 소리는 실제로 우는 소리가 아니라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라고 한다. 기러기들은 부산에서 서울을 "왕복 40번"에 해당하는 머나먼 길을 비행하는데 그중에 동료 기러기가 아프고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離脫)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른 동료 기러기 두 마리도 대열에서 빠져나와 지친 동료가 원기를 회복해서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보호 하면서 무리로 다시 돌아오는 새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미물(微物)인 새(鳥)가 선두 주자가 지치고 힘들어 지면 그 뒤를 따르던 무리중에 한 마리가 앞으로 나와 리더와 역할을 바꾸어 가면서 비행을 한다.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다면 기러기 떼는 매일 수 백킬로를 날고 해마다 수 천 킬로를 이동하는 비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는 속담의 의미를 되뇌이게 한다. 결혼식 폐백(幣帛)에 기러기 모형을 놓고 예(禮)를 올리는 것도 기러기의 세 가지 덕목을 인간들이 본받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첫째가 기러기는 "사랑의 약속"을 영원히 지키며 보통 수명이 150~200 년 인데 짝을 잃으면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한다. 둘째는 "상하의 질서"를 지킨다. 날아 갈 때도 행렬(行列)을 맞추어 가는데 앞서가는 놈이 울면 뒤따라 가는 놈도 화답(和答)을 하여 예(禮)를 지킨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이들은 왔다는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 에게 도움이 되는 삶이 되고 공유할 수 있는 행복에 가치를 둘 수만 있다면 훨씬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다. 아픈 사람에게는 치유의 약이 필요하고 지혜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지혜(智慧)를 나누어 주며, 애정이 메마른 곳에는 "사랑의 감동"을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하겠다면 비 오는날 우산을 들어주는 여유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어려울 때는 함께 비를 맞는 것도 큰 위로가 될 듯 하다. 기러기에 관한 글인데 기러기는 날개의 힘이 강한 조류다. 포유류 가운데 늑대가 부부애가 가장 좋으며, 조류로는 기러기가 부부애가 좋은 대표적인 철새로 알려져 있다.    최순애가 12세  소녀 때 쓴 <오빠생각>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가 스친다. 기러기는 오리과 이다. 잘 생긴 조류다. 겨울이니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를 하모니카로 은은하게 불러 본다.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 할 세상인데 누구나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꿈을 지니면서 살아 가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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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30
  • [이경국의 대구춘추 169] 세월이 저만치 가네
    이경국 칼럼니스트   100세 장수시대이다. 라이프사이클에 대한 바른 구성이 요청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수명은 이미 노아의 시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결론적으로 장수가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큰 괘적으로 살펴 보면 인간의 수명은 감급시대임을 필자는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성.주.괴.공의 긴 여정에서 살펴보면 현재 주겁(住劫) 13번째로 수명이 점차 감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80000세에서 10세를 향하여 수명이 점차 줄어 가고 있는 가운데 현재 100세 전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파에서 시작되어 긴 인생의 험로역정을 거쳐 결국 오메가로 생을 마감한다. 인생자체는 <고해의 바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생로병사가 그러하다. 이는 평생 16개월을 우는 인생인데 비하여 웃는 시간은 고작 75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울고나면 눈물의 카타르시스로 후련해 진다. 대체로 남자가 한 달에 1.4회, 여자는 5.3회 눈물을 흘린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웃음과 눈물을 시간으로 구분할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삶 자체는 시름밭을 매어야 하는 험로(險路)의 과정임이 틀림 없다. 이는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정신은 욕망을 다스려 내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이치이다. 비교와 경제의 치열한 현실이 힘든다는 것이다. 아파트 평수와 통장 잔고에 메달리는 현대인의 모습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젊은 이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요인은 결국 돈과 직결이 되어 있다. 현금지원으로 출산율이 회복되는 추세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인간은 사계절을 즐기고 있으며 좋아하는 계절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생각이 많아 지는 철이 있으며 하루 중에도 거울을 자주 보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머리에 배꽃이 내리고 그렇게도 애써 관리한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면 생각이 많아 지면서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송년모임에 마주 앉은 친구의 모습이 곧 자화상이다. 친구가 더 늙어 보이기 마련이다. 일잔을 걸치고 거나하게 취하면 함께 늙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모임에서는 크게 웃으면서 시름은 털어 버리기에 애써 송년모임에 발길을 닿게 하는지 모르겠다. 기억력도 희미해져 간다. 약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약봉지에 번호를 써 둔다는 사람도 있다. 총명하던 총기는 어디로 가고 치매초기 환자 같다는 친구의 말에 쓴 웃음이 인다. ''어젯밤 부부간에 나눈 사랑은 기억이 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또렷이 기억이 난단다. 그렇다면 치매와는 거리가 멀다고 안심을 시킨다.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건강도 무엇인가에 무리를 하였기에 나이가 들면서 온갖 병이 생기는 것이다. 역류하는 물고기는 힘이 빠질 것이다. 세월에 적응하는 習을 길러 나가야 할 때이다. 마음을 잘 관리해 나간다면 노후의 삶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저만치 가버린 세월은 그냥 두고 토끼꼬리 만큼 짧은 남은 세월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는 말을 주문(呪文)처럼 외우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일년이 찰나같은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날은 하루가 지겹도록 지루하기도 한다. 1월에서 12월까지 점점 빠르게 느껴진다는 어머니 말씀이 경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는 세월인데도 쏜살같다. 말달리듯 빠르다. 유수같다. 눈깜빡 할 사이에 가 버린다. 등 다양한 표현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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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이경국의 대구춘추 168] 요강이라는 묘한 용기(用器)
    이경국 칼럼니스트      여지껏 글을 많이 쓰긴 했지만 저널의 제목에 '요강'이란 어휘를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요강에 대하여 여러번 쓴 적이 있긴 하다. 요강을 단순히 淨하지 못한 용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필자처럼 호기심이 많으면 글을 쓰는데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요강은 숨기는 물건이다. 대놓고 말하기엔 쑥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최근에 요강안에 동전이나 은행을 넣어 두면 재물운이 따른다는 말이 번지고 있다. 요강이 마치 도자기처럼 아름답게 만든다. 서양인이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요강이 너무나 아름다워 과자를 담는 용기로 활용했다고 한다. 서양에는 없기 때문이다. 처녀가 시집가는 날 가마안에 요강을 지니고 갔는데 가마꾼이 실례를 할 시간을 주었는지는 여지껏 자료를 찾지 못했다. 연세드신 분께 시집 올 때 가마에서 실례(?)를 했는지는 질문을 많이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지금은 여쭈어 볼 대상이 없다. 수세식 화장실로 인하여 요강이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를 봉양하자면 요강이 필요할 것이다.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 작가인 이병준님의 <어머니 봉양일기>에는 어머니께서 볼 일을 보시면서 자식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신다는 내용이 있다. 수치(羞恥)는 나이와 무관하다. 지금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이다. 염치(廉恥)가 없이 살아간다. 인명수심인데 정치인이 창피함을 알 턱이 없다. 어느 큰 스님은 어머니를 위한 법문을 하는데 법당을 가득 매운 신도들 앞에서 장시간을 말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 말았다. 물론 어머니도 그 자리에 계셨다. 높은 경지의 스님인데 신도들이 많이 놀랐을 것이다. 사실 아들을 낳아서 고추를 쓰다듬으면서 키웠는데 아들이 크니 남자로 보였을 것이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사단(四端)의 하나로 인간만이 부끄러움을 안다. 공자는 길가에서 실례를 하는 자는 나무랐지만 길가운데서 그 짓을 하는 자는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이미 도덕성을 상실하고 수치심이 없는 자는 가르칠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강을 보니 여러 생각이 스친다. 명리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정말 아름다운 요강 그림까지 보내어 왔다. 마치 도자가 작품같다. 소싯적에는 윗목에 둔 요강이 얼어 버리는 경우를 보았다. 문고리에 손이 쩍하고 붙던 시절의 추억이다. 이상하게 요강을 보면 요단강 생각이 스치니 인간의 의식세계는 무궁하다. 요강이 추하다는 생각만 지워 버리면 요강도 옥식기 처럼 보일 것이다. 옥식기에 쌀밥을 담아서  아랫목 이불밑에 묻어 두고 추운 날씨에 대문까지 몇번이나 나와서 기다리던 새색시 아내가 지금은 어떠신지? 세월따라 마음마저 변하는데 요강의 쓰임새도 바뀌어 나가도 될 성 싶은 생각이 든다. 아랫마을 이쁜이는 가마를 타지 않고 황소를 타고 시집을 갔으니 혼수품인 요강은 별도로 지니고 갔을 것이다. 세상이 편리하여졌지만 소싯적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때가 아련히 떠 오른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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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춘추
    2024-12-16
  • [이경국의 대구춘추 167] 백색 천지가 아름답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온천지가 소복을 입었는지 아니면 귀한 쌀가루를 뿌렸는지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실 소복차림은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초상집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비통해 하는 모습은 딸들만이 합니다. 남자는 그저 눈물이 나면 화장실 앞에서 멀뚱한 모습으로 담배만 피웁니다. 소싯적에는 워낙 가난하여 장독대 위에 쌓인 눈을 보면 쌀가루였으면 하는 기원을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세상도 깨끗하여 눈을 뭉쳐서 먹기도 했습니다. 핵실험을 하고 부터는 비를 맞을 수도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이니 발전이니 거들먹을 떨지만 하나 밖에 없는 지구를 몰살지경에 이르게하고 말았습니다. 크게는 미국과 러시아의 핵개발 경쟁이 그러하고 작게는 김정일의 핵공갈이 그러합니다.  경전(불경, 성서, 쿠란, 도전, 성전)을 보면 경쟁에 의한 전쟁으로는 평화유기가 불가합니다. 생명을 핵으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순원의 <소나기>같은 작품이 나올 턱이 없으며, 한강의 노벨문학상도 마냥 즐길 수만 없는 역사왜곡과 외설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태어나 필자의 고향 안동으로 시집을 왔다길래 속으로 반겼더니 남편과 문학적인 사고가 맞지 않아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자유를 만끽하는 문학세계에 편협된 사상의 사고로 인하여 자식을 둔 가정에 금이 가게 되었으니 필자같이 대자유를 구가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니 노벨상에 너무 취할 바는 못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상은 인간이 반기기 마련이지만 한편 그 잣대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돋보이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봅니다. 세상은 성적순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희생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상위 5%가 리더가 될 수는 있겠지만 세상은 기층세력이 버티어 주어야 지속가능 할 것입니다. 잡초가 물난리를 막아 주고 있으며,  굽은 나무가 산을 지켜 냅니다. 모란이나 백합은 화려하지만 이름 모를 작은 雜草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오를 때 보지 못한 꽃은 내려올 때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등산은 빠르게 올라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급하게 하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천천히 오르면서 일행이 흘리는 땀에 취해 보면서 바위나 물을 만나면 윤선도의 <오우가>도 읊조리면서 느리게 하는 것이 산행의 묘미일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개발에만 중독이 되어 지구가 너무나 아파합니다. 눈이 내려도 詩를 쓰지 않는 세상입니다. 인간이 달에 다녀온 후로 보름달을 보고 빌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수 천년을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하여 빌었습니다. 황진이는 <반달>이란 詩로  [누가 곤룐산에 옥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견우님 떠나신 뒤에 수심하여 허공에 던져 놓았네] 라고 읊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시입니다.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 고교시절에 <동짓날>의 詩와 함께 필자를 혼절지경에 이르게 한 황진이의 <반달> 이었습니다. 그녀가 기생이라고 양반댁 규수보다 덜 깨끗하다는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원래 정조관념은 원시시대는 없었습니다. 이념에 불과하며, 처녀막을 중히 여기는 행위는 여성을 구속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중국의 전족(纏足)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는 이렇게 인간을 혼절(魂絶) 시키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김삿갓도 그러합니다. 황진이는 <반달>을 보고 직녀로서 견우를 애틋하게 생각했었는데 현대인은 반달을 보지도 못할뿐더러 달에서 떨어지는 운석(雲石)의 크기로 돈만 따지고 있습니다. 계수나무는 물론이고 은도끼와 옥도끼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토끼도 없는 보름달을 보면서 빌지도 않지만 사주관상을 보기 위해 들락거리는 시대입니다. 자녀들의 건강이나 수능성적은 후순이라 합니다. 지가가 ''사귀고 있는 남자가 남편에게 들키는 문제''가 話頭라고 합니다. 평생을 공부한 필자의 친구인 토제 선생의 현실담입니다. 괘락의 전성기이니 이를 말세나 말법(末法) 시대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툭하면 국민을 들먹이고 있지만 백성을 위한 정책은 눈꼽만큼도 없어 보입니다. 정권탈취만을 위한 탄핵이니 특검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눈내린 세상을 보아도 시심도 없으며 그저 눈내린 후의 지저분한 세상과 같으니 저들이 사라지면 맑은 세상이 도래 할 것입니다. 극도로 혼탁스러운 카오스에서 빠른 코스모스 세상이 오고 있기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백색은 화려하고 11월의 폭설은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나타난 신몰(神沒)스러운 서설(瑞雪)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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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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