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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91-마지막] 주막(酒幕)에 대한 추억
이경국 칼럼니스트 흔히 주막은 문패도 없고 번지수도 없다고 말한다. 삿갓하나 놓으면 딱 맞을 땅도 주인이 있으면 이름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문패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번짓수는 당연히 있다. 소싯적 필자의 시골은 큰밭, 굴밭, 변달밭, 팽나무논 등으로 이름이 있었다. 대체로 주막은 촌부들의 시름을 달래는 사랑방 같은 곳으로 장날에 만나서 거나하게 한잔 하는 곳이다.안주거리는 보잘 것 없어도 시끌벅쩍한 대화로 힘든 농사일의 수고를 잊는 날이었다.지금은 전국적으로 주막은 거의 사라져 버렸는데 경북 예천에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은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명소이다.고향에서 지근에 있는 이 주막은 주소가 예천군 인데 일부(화장실?)는 안동시로 되어 있다니 재미있는 번지다. 숱한 얘기를 지니고 있는 주막으로 유명하며 관광명소이기도 하다.애환이 서려있는 이 주막은 정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주막의 주인은 한글을 전혀 몰랐으나 자기만의 표기로 외상을 관리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客이 그 주막을 이용했을까?주모를 두고 질펀한 농을 건네기도 하고 쌈지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외상이라고 큰소리를 쳤던 인심이 넉넉했던 시절의 모습이 느껴진다.얼큰한 탁주 한 사발에 세상 시름은 사라지고 부러울게 없어진다. 사실 술은 명약이기도 하지만 과하면 독약이나 극약이 되기도 했다. 주막에서 마시는 잔에는 애환이 담겨져 있다. 포장마차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필자도 술이 조금 강한 편에 속한다. 술은 각박한 세상을 일시 잊게 해 주는 마력(魔力)이 있어서 좋다.지난해 장수1위는 술이라고 UN에서 공식 발표를 했다. 깜짝 놀랐다. 부족한듯 마시면 천하제일의 명약이다. 술은 술술 마시더라도 결국 자제력을 잃기 쉽다.젓가락 장단에 조금은 슬픈 트롯 메들리로 정겹게 부르던 < 니나노>가 사라진 세상이다. 그때가 좋긴 했었다. 애환을 달래 주면서 노래하는 여인들의 절박한 신세타령은 눌물짓게도 하였다.주막집 아줌마는 온동리 남정네의 연인이었다.세상을 온통 디지털로 살기에는 너무나 각박 하다. 스마트폰으로 하는 약속보다는 담너머로 신호를 보내면 달빛에 젖어서 눈치를 봐 가면서 나오던 갑순이의 모습이 더욱 정겨웠던 시절이 좋았다. [ 이번 글로 긴 여정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020년 9월 1일부터 2025년 5월 26일까지 5여년의 기간에 총 247회의 칼럼을 집필하였습니다. 어줍잖은 제 글을 때로는 열독과 애독으로 아껴 주신 <대구저널>의 모든 애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해외에 계신 많은 작가분들의 향수를 달래어 준다는 얘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너무나 긴 세월이었습니다. 원고 청탁에 한번도 늦은 적이 없었으니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구저널의 이현식 대표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正道를 지키는 지역 언론으로 더욱 발전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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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90] 가슴에 뜨는 남모르는 무지개
이경국 칼럼니스트 무지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무지개는 물론이고 쌍무지개도 좋아합니다.한때 <무지개동자>로 부르시던 장박사님은 고인이 되셔서 하와이 가족묘지에 안치되어 있는데 한번 찾아 뵙기가 쉽지가 않습니다.창랑 장택상 총리의 따님이시니 정치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무진 많이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무지개는 '레인보우'이니 마른 하늘에는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색깔도 7가지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쌍무지개는 그 색깔이 무지개와 반대로 나타납니다.무지개의 보이지 않는 색깔의 의미를 알아야만 무지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봅니다.귀한 것은 스쳐 지나기 마련입니다. 첫사랑이 그러하고 무지개도 그러하다고 봅니다.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생동안 뇌의 작은 분실에 저장이 되어 가끔씩 씁쓰레한 웃음속에서 떠 오를 것입니다.소싯적에 무지개는 작게 보였는데 지금은 한 눈에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크기도 합니다. 해마다 무지개도 조금씩 자라는가 봅니다.가수 이용복은 무지개를 볼 수는 없었지만 가슴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제목이 <그 얼굴에 햇살을>인데 차라리 <무지개 타고 오네>가 좋을 듯 합니다.아마 맹인가수이니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에 햇살을 받고 싶어서 부른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헬렌 캘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에서 감동적인 것을 남기었습니다. 얼마나 세상의 빛과 그리고 무지개가 보고 싶었겠어요. 눈물이 나는 대목입니다.건강한 모습의 몸을 어머니께 받았는데도 세상에는 불효자 많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면 무지개는 뜨지 않습니다.소나기가 내리고 쨍하게 태양이 보일 때 무지개가 뜨면 감동적으로 다가 옵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저 많이 가질려는 욕심이 앞서 너무나 지저분한 모습입니다.소욕지족(少慾知足)의 청빈으로 살아 가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울 것입니다.어떤 연유로 제게 무지개동자로 부르면서 이쁜 명함도 새겨 주셨는데 그 많은 명함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장박사께서는 향년 90세에 떠나 셨습니다.일본 여행을 가서 필자는 크게 호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재벌이 초대를 했는데 동행을 했기 때문 입니다.무지개는 오래 머무르지 않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달을 보고 詩作을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운석(雲石) 에는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비싸기 때문입니다.천민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는 시대이니 눈에 보이는 물신(物神)에 혹(酷)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무지개는 소망을 담고 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연인간에 인연이 다하거나 아니면 오해로 인하여 갈라선 처지 일지라도 석삼년까지 기별을 막히게 한다면 너무나 가혹할 것입니다.누군가 무지개를 보면서 마음을 되돌리어 곁으로 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비단구두를 신거나 무지개를 타고 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아니면 달빛에 젖은 채로 찾아도 마냥 반기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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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9] 보리밭의 추억들
이경국 칼럼니스트 보리밭은 연상되어지는 것들이 무척 많기 마련이다. 물론 농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추억이 있을 턱이 없을 것이다. 논에서 경작하는 벼와 밭에서 재배하는 보리는 어렵던 시절이나 지금도 우리민족의 主食으로 삼았던 귀하고도 귀한 식량이다. 과식하여 사우나나 찜질방에서 땀을 빼는 현대인은 배고파 허리가 휜 그때의 세상을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으니 역사는 강건너 저 편의 일이 되고 말았다. 푸른 보리싹을 훑어서 풀떼기 죽을 써 먹던 시절은 눈물겨운 일이다. 가장 넘기가 힘든 고개는 <깔딱고개>가 아닐 것이다. 바로 <보리고개> 였다. 그러나 지금은 <청보리 축제>로 온통 난리법석을 떠는 세상이 되었다. 가곡 <보리밭>을 눈을 지긋이 감고 들어 보면 소시절의 추억이 금시 곁으로 다가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축제와 향락에 깊이 빠져들면 근로를 기피하고 더 짜릿한 감각세계를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망국의 조짐이 나타나면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들이 주지육림에 빠져 버리면 나라가 망해 버린 경우가 많았다.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그렇게 망했다. 전쟁보다는 향락과 역병으로 소멸이 되었으니 무서운 일이다. 지나친 퍼주기식 포플리즘은 국가가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권력은 이를 암암리에 정책이라면서 백성을 속인다. 우민한 백성은 속으면서 몇푼의 돈으로 그만 깊은 수렁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보리밭을 보면 생각이 많이 난다. 보리피리와 보리의 에이즈인 깜북이 병이 떠 오른다. 여인숙도 귀한 시절엔 보리밭에 숨어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루밑에 잠자고 있는 애꿎은 개만 부짓깽이로 주인에게 혼나기도 했던 추억이 스친다. 당시의 개는 개취급을 받았던 때였다. 아버지와 마당에서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할 때면 부자간의 장단은 대단하였다. 보리의 깔끄래기(까끄라기의 방언)는 찬물로 등물을 하여야 했다. 아버지 등물을 많이도 해 드렸고 아버지께서도 저의 등을 밀어 주셨다. 지금은 이런 사랑은 간 곳 없이지고 그저 아버지의 지갑만 넘 보는 못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유산을 노리는 자녀가 너무나 많은 시대이다. 아! 그립다. 땡볕에서 보리 타작을 하던 추억의 색채는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키게 한다. 아버지께서는 멀리서 어머니와 함께 증손주인 승준이와 승아 그리고 라은이의 자라나는 모습을 보시고 흐뭇해 하고 계실 것이다. 보리타작을 할 무렵에는 보릿짚으로 여치집을 만든다. 한낮이 되면 여치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맥향(麥香)일렁이는 보리밭을 보면서 막연한 청운의 꿈이 크기만 했는데 돌이켜 보면 추억이 남달리 많은 편이었다. 가난으로 찌든 시절의 보리밥의 추억은 가슴이 아픈 기억이지만 지금은 <청보리축제>로 연인들이 모여드는 세상이다. 최빈국에서 최정상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는데 어떠한 지도자와 국민이 허리가 휘어지게 일을 했는지는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 보리의 모습과 벼는 완전히 다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보리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만다. 벼는 따뜻한 계절에 못자리에서 태양을 보면서 자란다. 그러나 보리는 엄동설한의 혹한의 밭에에서 고생을 해야하는 작물이다. 아마 그러한 보상으로 태양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까 싶다. 보리밥은 대나무 그릇에 담아서 밥쁘제 (보자기의 방언) 로 덮어서 파리가 앉지 못하게 한다. 냉수에 말아서 풋고추를 찍어서 자그마치 5000년을 견디었던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과소비로 휘청거리면 살림은 기울어 지기 마련인데 저축보다는 소비를 엔조이하듯 즐기는 세태이니 걱정이 따른다. 현대인은 건강식이라고 꽁보리밥을 찾기는 하고 있지만 보리에 대한 추억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보릿고개는 시골 뒷산의 고개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피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미아리고개 같은 <눈물의 고개> 이다. 그러나 이제는 두 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보릿고개는 축제의 마당이 되었으며, 미아리 고개는 온갖 꽃이 피는 희망의 고개로 변하였다. 보리로는 맥주를 만든다. 쌀로는 쌀막걸리를 만든다. 보리와 쌀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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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8] 서방질과 계집질
이경국 칼럼니스트 어미(語尾)에 질字가 들어가면 조금은 깔아서 보는 비하적인 느낌이 든다. 사(師, 士)字에 비하여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비속어는 변화가 많이 되었다. 차장은<안내양> 으로 부르는데 무인시대 인지라 안내양을 보기가 쉽지 않다. 숙박하는 곳이 무인이라니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 때 주소를 기록하는데 한군데는 틀리게 적는다는 친구의 말에 박장대소 했던 기억이 난다. 고속도로가 생기자 말자 안내양을 보기 위하여 일부러 고속버스를 타 본 사람도 있었다. 스튜디어스와는 육지를 달리는 초고속 버스의 안내양은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식모는 <가정부>로 불러지게 되었다. 처가댁에는 오래 함께 살던 가정부가 있었는데 시집을 보낼 때 아내와 똑 같이 혼수를 해 준 기억이 난다. 나더러 형부라 부르던 마음씨 고운 아가씨가 지금은 연락조차 두절이 된 상태다. 직업에 질字를 붙이면 비하적인 표현이다. 갑질도 기분이 접히는 단어이다. 특히 <서방질과 계집질> 은 아내와 남편이 있지만 외간 다른 짝과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님자는 본래 바람을 피우는 존재이다. 종족보존을 빌미로 여기고 있는데 그럴 듯한 핑계에 할 말을 잊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성은 바람 나기가 쉽잖은 일인데 ''홧김에 서방질을 해 버린다''고 한다. 이는 남편이 평소에 애를 태우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여 그만 앙값픔을 하기 위하여 즉흥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대체로 학창시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동창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한 때 옛 친구를 찾아주는 '동창사이트'가 불티가 나게 인기가 있었다. 이는 꽃뱀에게 당하는 사기를 미연에 방지 하겠다는 믿음이 선행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계집질이나 서방질은 가정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행위다. 따라서 각자의 단속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홧김에 저질러 버리는 행위는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어머니께서는 참을 忍字를 세번 생각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객지에서는 ''단도리를 잘하여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이나 테스형의 ''너 자신을 알라''보다 필자에게 훨씬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하며, 큰 영향을 주신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 남긴 명문어록(?)의 말씀이 많으시다고 아내도 몇번이나 얘기를 한다. 금과옥조같은 말씀이셨다. 몇가지 얘를 든다면, 어머니는 키가 작으신 편이었으나 7남매 모두 키가 큰 편이다. 누군가 그러한 것을 말했나 보다. 어머니의 명답으로 샹대를 압도하셨다. 세상에 ''키가 크다고 하늘의 별을 딸 수도 없으며, 키가 작다고 개미한테 코를 물린 사람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아무리 별을 따기 위하여 달에 먼저 이른다 하더라도 별을 딸 수가 없을 것이다. 장대가 그렇게 길 수 없다. 닉슨대통령과 등소평이 만나서 등소평의 키가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니 눈치빠른 등소평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보면 자기가 더 크다''고 했다. 때로는 한 마디의 위트나 유머로서 상대의 양코 (서양인의 높은 코)를 팍 죽이는 지혜가 필요 하다고 본다. 인간의 자존심은 때에 따라서는 사소한 일에 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도회로 나가서 돈을 벌어서 귀향하면 '농장을 경영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실 농사면 어떻고 농장경영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일상이 지루하다고 일탈을 해 보고 싶겠지만 正道의 길이 아니라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성난다고 바위를 차도 안될 것이다. 홧김에 <서방질>도 같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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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7] 여성의 가슴 사이는 좁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아무리 건장한 여성 일지라도 가슴 사이는 좁다. 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애기가 한쪽 손으르 다른 젖꼭지를 만지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모유를 먹이는 것이 가장 좋은데 분유의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는 세상이다. 인성의 기초는 여기서 허물어 지고 만다. 소젖을 먹이면 고무 젖꼭지와 가슴의 젖 꼭지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도 34억 축생 가운데 인간의 産道가 가장 좁기 때문에 아기와 어머니가 교감이 많이 되는 순간이라 한다. 제왕이 하던 재왕절개 수술을 지금은 누구나 하고 있다. 더러 수중 분만으로 통증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기는 하다. 무통주사로 분만시 통증을 없애게 하니 출산의 고통이 옛과 다르다. 인류는 출산을 하면서 애기가 죽거나 산모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는 왕비의 생명을 앗아 가기도 했다. 명의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 여성의 저고리는 남자가 도저히 입을 수 없다. 인체는 신의 명품이긴 하지만 여성의 가슴은 단순한 성기능의 유방과 다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주 고름 입에물고 입만 빵긋하면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여성은 천사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 설사 여성의 손은 일을 많이 하여 거북등같이 거칠게 보인다 해도 천사의 손 (angel-hand) 으로 손색이 없다고 본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의 모습을 품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평화가 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History'로 남성으로 대우를 해 주지만 노도가 일고 쓰나미를 일으키는 험한 바다를 여성인 'She'로 표현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바다는 생명의 모태이다. 천혜의 혜택을 인간에게 줄 뿐만 아니라 3%의 염분으로 부패를 방지 하고 소금은 황금 만큼이나 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성품을 닮아서 강물은 바다에 이르면 압록강이니 낙동강이니 다투질 않는다. 어머니는 가슴이 좁지만 세상을 품기에 넓기만 하다. 사랑이 좋아서 세상은 사랑타령을 많이 하고 있지만 필자는 <어머니> (엄마)란 단어를 <사랑> 보다 우위에 두고 싶다. 그리고 모성애를 능가할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의 본성도 무진 강하다. 산불이 나면 꿩은 새끼와 함께 불에 타서 죽는다. 어미는 새끼를 두고서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이보다 짙은 감동은 어쩌면 인간 사회도 드문 일일 것이다. 도덕, 도의, 바른 생활을 배우고 종교를 믿고 살고 있지만 인간만이 자식을 버린다. 이역만리 해외입양을 시켜버리기도 한다. 미혼모이거나 바리지 않는 출산이면 멀리 보내어 흔적을 지워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인연줄을 끊어 버린다고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없다면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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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6] 밤에만 피는 꽃들
이경국 칼럼니스트 꽃은 거의 낮에 핀다. 태양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예 해바라기는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키도 가장 큰 편이다. 태양과 더 가까이 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달빛이 좋아서 밤에만 피는 꽃이 있다. 박꽃과 달맞이 꽃이 대표적이다. 달맞이는 아예 달을 연인처럼 섬기는 모습이다. 이름자체가 '맞이 한다'는 것이다. 박꽃은 역시 초가 지붕위에 피어야 운치가 있어 보인다. 草家가 사라져 버렸으니 제비도 오지 않고 운치있는 박꽃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흰색은 백설기 색이기도 하며, 어쩌면 춘향의 허벅지도 박꽃같이 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밤에 피는 꽃은 거의 흰색이다. 아마 벌, 나비, 나방의 눈에 쉽게 뜨이게 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 아닐까 싶다. 꿀을 취하여 가지만 않는다. 암술과 수술을 중개하여 꽃가루를 전달하여 代를 이어 나가게 도와 준다. 아무리 못생긴 꽃이라드 빠뜨리지 않는다고 하니 감동적이다. 야심한 밤에 피는 꽃은 의외로 많다. 야래향, 선인장, 재스민, 치자나무, 목련, 꽃담배 등이 夜花이다. 흰색이니 알리기도 쉽겠지만 향기도 짖게 풍긴다. 낮에는 꽃이 닫히는 특성이 있다. 특히 야래향(夜來香)은 향기가 짙을 뿐만아니라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애잔한 생각이 들면서 먼저 간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주현미가 부른 노래가 압권이다. 나방이나 박쥐도 꽃가루를 옮기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文人은 밤을 좋아하고 밤꽃을 좋아한다. 이제는 달을 보고 시를 쓰지 않는 시대이다. 인간이 달을 정복(?) 하고 부터는 달보다는 떨어지는 운석(隕石)의 가치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태백이 지하에서 통곡(痛哭)을 할지 모를 일이다. 夜花는 흰색이거나 노란색이다. 그리고 자기만의 짙은 향으로 중개를 유인하는 것이다. 주고 받으면서 상생을 통하여 윈윈하는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을 보노라면 괜히 숙연해 지면서 경외감이 인다. 조기 대선에는 숱한 비방과 험악한 언어가 등장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역지사지 하라는 배려의 마음은 정치판에서는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 권력에만 혈안이 되어 상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니 그들은 천상에 가는 것은 애시당초 포기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파스칼이 갈파한 지상은 꿏이 있어서 아름답다 했다. 천상의 별은 공해로 볼 수 조차 없는 세상이다. 가슴의 사랑조차 고갈이 되어 건조하니 여간 답답지가 않다. 정치인에게는 아예 文.史.哲이 없다. 특히 역사관이 없으니 목전의 이익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지경이다. 대통령 후보자가 콩나물 시루의 콩나물처럼 고개를 들이 밀고 있는데 일종의 후보공해다. 흥행으로 관심을 높인다고 하는데 웃기는 일이다. 야심한 밤에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선한 기운이 들도록 심성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그들의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꽃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운다. 열사의 사막에서도 선인장을 꽃피워 전갈과 벗을 하고 있으며, 엄동의 혹한에도 설중매가 피어 인간에게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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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91-마지막] 주막(酒幕)에 대한 추억
- 이경국 칼럼니스트 흔히 주막은 문패도 없고 번지수도 없다고 말한다. 삿갓하나 놓으면 딱 맞을 땅도 주인이 있으면 이름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문패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번짓수는 당연히 있다. 소싯적 필자의 시골은 큰밭, 굴밭, 변달밭, 팽나무논 등으로 이름이 있었다. 대체로 주막은 촌부들의 시름을 달래는 사랑방 같은 곳으로 장날에 만나서 거나하게 한잔 하는 곳이다.안주거리는 보잘 것 없어도 시끌벅쩍한 대화로 힘든 농사일의 수고를 잊는 날이었다.지금은 전국적으로 주막은 거의 사라져 버렸는데 경북 예천에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은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명소이다.고향에서 지근에 있는 이 주막은 주소가 예천군 인데 일부(화장실?)는 안동시로 되어 있다니 재미있는 번지다. 숱한 얘기를 지니고 있는 주막으로 유명하며 관광명소이기도 하다.애환이 서려있는 이 주막은 정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주막의 주인은 한글을 전혀 몰랐으나 자기만의 표기로 외상을 관리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客이 그 주막을 이용했을까?주모를 두고 질펀한 농을 건네기도 하고 쌈지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외상이라고 큰소리를 쳤던 인심이 넉넉했던 시절의 모습이 느껴진다.얼큰한 탁주 한 사발에 세상 시름은 사라지고 부러울게 없어진다. 사실 술은 명약이기도 하지만 과하면 독약이나 극약이 되기도 했다. 주막에서 마시는 잔에는 애환이 담겨져 있다. 포장마차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필자도 술이 조금 강한 편에 속한다. 술은 각박한 세상을 일시 잊게 해 주는 마력(魔力)이 있어서 좋다.지난해 장수1위는 술이라고 UN에서 공식 발표를 했다. 깜짝 놀랐다. 부족한듯 마시면 천하제일의 명약이다. 술은 술술 마시더라도 결국 자제력을 잃기 쉽다.젓가락 장단에 조금은 슬픈 트롯 메들리로 정겹게 부르던 < 니나노>가 사라진 세상이다. 그때가 좋긴 했었다. 애환을 달래 주면서 노래하는 여인들의 절박한 신세타령은 눌물짓게도 하였다.주막집 아줌마는 온동리 남정네의 연인이었다.세상을 온통 디지털로 살기에는 너무나 각박 하다. 스마트폰으로 하는 약속보다는 담너머로 신호를 보내면 달빛에 젖어서 눈치를 봐 가면서 나오던 갑순이의 모습이 더욱 정겨웠던 시절이 좋았다. [ 이번 글로 긴 여정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020년 9월 1일부터 2025년 5월 26일까지 5여년의 기간에 총 247회의 칼럼을 집필하였습니다. 어줍잖은 제 글을 때로는 열독과 애독으로 아껴 주신 <대구저널>의 모든 애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해외에 계신 많은 작가분들의 향수를 달래어 준다는 얘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너무나 긴 세월이었습니다. 원고 청탁에 한번도 늦은 적이 없었으니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구저널의 이현식 대표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正道를 지키는 지역 언론으로 더욱 발전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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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91-마지막] 주막(酒幕)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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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90] 가슴에 뜨는 남모르는 무지개
- 이경국 칼럼니스트 무지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필자는 무지개는 물론이고 쌍무지개도 좋아합니다.한때 <무지개동자>로 부르시던 장박사님은 고인이 되셔서 하와이 가족묘지에 안치되어 있는데 한번 찾아 뵙기가 쉽지가 않습니다.창랑 장택상 총리의 따님이시니 정치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무진 많이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무지개는 '레인보우'이니 마른 하늘에는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색깔도 7가지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쌍무지개는 그 색깔이 무지개와 반대로 나타납니다.무지개의 보이지 않는 색깔의 의미를 알아야만 무지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봅니다.귀한 것은 스쳐 지나기 마련입니다. 첫사랑이 그러하고 무지개도 그러하다고 봅니다.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생동안 뇌의 작은 분실에 저장이 되어 가끔씩 씁쓰레한 웃음속에서 떠 오를 것입니다.소싯적에 무지개는 작게 보였는데 지금은 한 눈에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크기도 합니다. 해마다 무지개도 조금씩 자라는가 봅니다.가수 이용복은 무지개를 볼 수는 없었지만 가슴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제목이 <그 얼굴에 햇살을>인데 차라리 <무지개 타고 오네>가 좋을 듯 합니다.아마 맹인가수이니 앞이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에 햇살을 받고 싶어서 부른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헬렌 캘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에서 감동적인 것을 남기었습니다. 얼마나 세상의 빛과 그리고 무지개가 보고 싶었겠어요. 눈물이 나는 대목입니다.건강한 모습의 몸을 어머니께 받았는데도 세상에는 불효자 많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면 무지개는 뜨지 않습니다.소나기가 내리고 쨍하게 태양이 보일 때 무지개가 뜨면 감동적으로 다가 옵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저 많이 가질려는 욕심이 앞서 너무나 지저분한 모습입니다.소욕지족(少慾知足)의 청빈으로 살아 가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울 것입니다.어떤 연유로 제게 무지개동자로 부르면서 이쁜 명함도 새겨 주셨는데 그 많은 명함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장박사께서는 향년 90세에 떠나 셨습니다.일본 여행을 가서 필자는 크게 호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재벌이 초대를 했는데 동행을 했기 때문 입니다.무지개는 오래 머무르지 않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달을 보고 詩作을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운석(雲石) 에는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비싸기 때문입니다.천민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는 시대이니 눈에 보이는 물신(物神)에 혹(酷)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무지개는 소망을 담고 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연인간에 인연이 다하거나 아니면 오해로 인하여 갈라선 처지 일지라도 석삼년까지 기별을 막히게 한다면 너무나 가혹할 것입니다.누군가 무지개를 보면서 마음을 되돌리어 곁으로 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비단구두를 신거나 무지개를 타고 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아니면 달빛에 젖은 채로 찾아도 마냥 반기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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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90] 가슴에 뜨는 남모르는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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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9] 보리밭의 추억들
- 이경국 칼럼니스트 보리밭은 연상되어지는 것들이 무척 많기 마련이다. 물론 농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추억이 있을 턱이 없을 것이다. 논에서 경작하는 벼와 밭에서 재배하는 보리는 어렵던 시절이나 지금도 우리민족의 主食으로 삼았던 귀하고도 귀한 식량이다. 과식하여 사우나나 찜질방에서 땀을 빼는 현대인은 배고파 허리가 휜 그때의 세상을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으니 역사는 강건너 저 편의 일이 되고 말았다. 푸른 보리싹을 훑어서 풀떼기 죽을 써 먹던 시절은 눈물겨운 일이다. 가장 넘기가 힘든 고개는 <깔딱고개>가 아닐 것이다. 바로 <보리고개> 였다. 그러나 지금은 <청보리 축제>로 온통 난리법석을 떠는 세상이 되었다. 가곡 <보리밭>을 눈을 지긋이 감고 들어 보면 소시절의 추억이 금시 곁으로 다가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축제와 향락에 깊이 빠져들면 근로를 기피하고 더 짜릿한 감각세계를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망국의 조짐이 나타나면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들이 주지육림에 빠져 버리면 나라가 망해 버린 경우가 많았다. 인류의 역사는 대체로 그렇게 망했다. 전쟁보다는 향락과 역병으로 소멸이 되었으니 무서운 일이다. 지나친 퍼주기식 포플리즘은 국가가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권력은 이를 암암리에 정책이라면서 백성을 속인다. 우민한 백성은 속으면서 몇푼의 돈으로 그만 깊은 수렁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보리밭을 보면 생각이 많이 난다. 보리피리와 보리의 에이즈인 깜북이 병이 떠 오른다. 여인숙도 귀한 시절엔 보리밭에 숨어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루밑에 잠자고 있는 애꿎은 개만 부짓깽이로 주인에게 혼나기도 했던 추억이 스친다. 당시의 개는 개취급을 받았던 때였다. 아버지와 마당에서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할 때면 부자간의 장단은 대단하였다. 보리의 깔끄래기(까끄라기의 방언)는 찬물로 등물을 하여야 했다. 아버지 등물을 많이도 해 드렸고 아버지께서도 저의 등을 밀어 주셨다. 지금은 이런 사랑은 간 곳 없이지고 그저 아버지의 지갑만 넘 보는 못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유산을 노리는 자녀가 너무나 많은 시대이다. 아! 그립다. 땡볕에서 보리 타작을 하던 추억의 색채는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키게 한다. 아버지께서는 멀리서 어머니와 함께 증손주인 승준이와 승아 그리고 라은이의 자라나는 모습을 보시고 흐뭇해 하고 계실 것이다. 보리타작을 할 무렵에는 보릿짚으로 여치집을 만든다. 한낮이 되면 여치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맥향(麥香)일렁이는 보리밭을 보면서 막연한 청운의 꿈이 크기만 했는데 돌이켜 보면 추억이 남달리 많은 편이었다. 가난으로 찌든 시절의 보리밥의 추억은 가슴이 아픈 기억이지만 지금은 <청보리축제>로 연인들이 모여드는 세상이다. 최빈국에서 최정상의 부유한 나라가 되었는데 어떠한 지도자와 국민이 허리가 휘어지게 일을 했는지는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 보리의 모습과 벼는 완전히 다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보리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만다. 벼는 따뜻한 계절에 못자리에서 태양을 보면서 자란다. 그러나 보리는 엄동설한의 혹한의 밭에에서 고생을 해야하는 작물이다. 아마 그러한 보상으로 태양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까 싶다. 보리밥은 대나무 그릇에 담아서 밥쁘제 (보자기의 방언) 로 덮어서 파리가 앉지 못하게 한다. 냉수에 말아서 풋고추를 찍어서 자그마치 5000년을 견디었던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과소비로 휘청거리면 살림은 기울어 지기 마련인데 저축보다는 소비를 엔조이하듯 즐기는 세태이니 걱정이 따른다. 현대인은 건강식이라고 꽁보리밥을 찾기는 하고 있지만 보리에 대한 추억을 모르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보릿고개는 시골 뒷산의 고개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피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미아리고개 같은 <눈물의 고개> 이다. 그러나 이제는 두 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보릿고개는 축제의 마당이 되었으며, 미아리 고개는 온갖 꽃이 피는 희망의 고개로 변하였다. 보리로는 맥주를 만든다. 쌀로는 쌀막걸리를 만든다. 보리와 쌀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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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9] 보리밭의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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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8] 서방질과 계집질
- 이경국 칼럼니스트 어미(語尾)에 질字가 들어가면 조금은 깔아서 보는 비하적인 느낌이 든다. 사(師, 士)字에 비하여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비속어는 변화가 많이 되었다. 차장은<안내양> 으로 부르는데 무인시대 인지라 안내양을 보기가 쉽지 않다. 숙박하는 곳이 무인이라니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한 때 주소를 기록하는데 한군데는 틀리게 적는다는 친구의 말에 박장대소 했던 기억이 난다. 고속도로가 생기자 말자 안내양을 보기 위하여 일부러 고속버스를 타 본 사람도 있었다. 스튜디어스와는 육지를 달리는 초고속 버스의 안내양은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식모는 <가정부>로 불러지게 되었다. 처가댁에는 오래 함께 살던 가정부가 있었는데 시집을 보낼 때 아내와 똑 같이 혼수를 해 준 기억이 난다. 나더러 형부라 부르던 마음씨 고운 아가씨가 지금은 연락조차 두절이 된 상태다. 직업에 질字를 붙이면 비하적인 표현이다. 갑질도 기분이 접히는 단어이다. 특히 <서방질과 계집질> 은 아내와 남편이 있지만 외간 다른 짝과 바람을 피운다는 것이다. 님자는 본래 바람을 피우는 존재이다. 종족보존을 빌미로 여기고 있는데 그럴 듯한 핑계에 할 말을 잊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성은 바람 나기가 쉽잖은 일인데 ''홧김에 서방질을 해 버린다''고 한다. 이는 남편이 평소에 애를 태우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여 그만 앙값픔을 하기 위하여 즉흥적으로 저질러 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대체로 학창시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동창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한 때 옛 친구를 찾아주는 '동창사이트'가 불티가 나게 인기가 있었다. 이는 꽃뱀에게 당하는 사기를 미연에 방지 하겠다는 믿음이 선행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계집질이나 서방질은 가정의 울타리가 허물어지는 행위다. 따라서 각자의 단속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홧김에 저질러 버리는 행위는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어머니께서는 참을 忍字를 세번 생각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객지에서는 ''단도리를 잘하여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이나 테스형의 ''너 자신을 알라''보다 필자에게 훨씬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하며, 큰 영향을 주신 어머니셨다. 어머니께서 남긴 명문어록(?)의 말씀이 많으시다고 아내도 몇번이나 얘기를 한다. 금과옥조같은 말씀이셨다. 몇가지 얘를 든다면, 어머니는 키가 작으신 편이었으나 7남매 모두 키가 큰 편이다. 누군가 그러한 것을 말했나 보다. 어머니의 명답으로 샹대를 압도하셨다. 세상에 ''키가 크다고 하늘의 별을 딸 수도 없으며, 키가 작다고 개미한테 코를 물린 사람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아무리 별을 따기 위하여 달에 먼저 이른다 하더라도 별을 딸 수가 없을 것이다. 장대가 그렇게 길 수 없다. 닉슨대통령과 등소평이 만나서 등소평의 키가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니 눈치빠른 등소평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보면 자기가 더 크다''고 했다. 때로는 한 마디의 위트나 유머로서 상대의 양코 (서양인의 높은 코)를 팍 죽이는 지혜가 필요 하다고 본다. 인간의 자존심은 때에 따라서는 사소한 일에 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도회로 나가서 돈을 벌어서 귀향하면 '농장을 경영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사실 농사면 어떻고 농장경영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일상이 지루하다고 일탈을 해 보고 싶겠지만 正道의 길이 아니라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성난다고 바위를 차도 안될 것이다. 홧김에 <서방질>도 같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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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8] 서방질과 계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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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7] 여성의 가슴 사이는 좁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아무리 건장한 여성 일지라도 가슴 사이는 좁다. 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애기가 한쪽 손으르 다른 젖꼭지를 만지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모유를 먹이는 것이 가장 좋은데 분유의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는 세상이다. 인성의 기초는 여기서 허물어 지고 만다. 소젖을 먹이면 고무 젖꼭지와 가슴의 젖 꼭지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도 34억 축생 가운데 인간의 産道가 가장 좁기 때문에 아기와 어머니가 교감이 많이 되는 순간이라 한다. 제왕이 하던 재왕절개 수술을 지금은 누구나 하고 있다. 더러 수중 분만으로 통증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기는 하다. 무통주사로 분만시 통증을 없애게 하니 출산의 고통이 옛과 다르다. 인류는 출산을 하면서 애기가 죽거나 산모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는 왕비의 생명을 앗아 가기도 했다. 명의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 여성의 저고리는 남자가 도저히 입을 수 없다. 인체는 신의 명품이긴 하지만 여성의 가슴은 단순한 성기능의 유방과 다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주 고름 입에물고 입만 빵긋하면서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여성은 천사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 설사 여성의 손은 일을 많이 하여 거북등같이 거칠게 보인다 해도 천사의 손 (angel-hand) 으로 손색이 없다고 본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의 모습을 품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야 평화가 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History'로 남성으로 대우를 해 주지만 노도가 일고 쓰나미를 일으키는 험한 바다를 여성인 'She'로 표현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바다는 생명의 모태이다. 천혜의 혜택을 인간에게 줄 뿐만 아니라 3%의 염분으로 부패를 방지 하고 소금은 황금 만큼이나 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성품을 닮아서 강물은 바다에 이르면 압록강이니 낙동강이니 다투질 않는다. 어머니는 가슴이 좁지만 세상을 품기에 넓기만 하다. 사랑이 좋아서 세상은 사랑타령을 많이 하고 있지만 필자는 <어머니> (엄마)란 단어를 <사랑> 보다 우위에 두고 싶다. 그리고 모성애를 능가할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의 본성도 무진 강하다. 산불이 나면 꿩은 새끼와 함께 불에 타서 죽는다. 어미는 새끼를 두고서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 이보다 짙은 감동은 어쩌면 인간 사회도 드문 일일 것이다. 도덕, 도의, 바른 생활을 배우고 종교를 믿고 살고 있지만 인간만이 자식을 버린다. 이역만리 해외입양을 시켜버리기도 한다. 미혼모이거나 바리지 않는 출산이면 멀리 보내어 흔적을 지워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인연줄을 끊어 버린다고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없다면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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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7] 여성의 가슴 사이는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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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6] 밤에만 피는 꽃들
- 이경국 칼럼니스트 꽃은 거의 낮에 핀다. 태양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예 해바라기는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키도 가장 큰 편이다. 태양과 더 가까이 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달빛이 좋아서 밤에만 피는 꽃이 있다. 박꽃과 달맞이 꽃이 대표적이다. 달맞이는 아예 달을 연인처럼 섬기는 모습이다. 이름자체가 '맞이 한다'는 것이다. 박꽃은 역시 초가 지붕위에 피어야 운치가 있어 보인다. 草家가 사라져 버렸으니 제비도 오지 않고 운치있는 박꽃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흰색은 백설기 색이기도 하며, 어쩌면 춘향의 허벅지도 박꽃같이 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밤에 피는 꽃은 거의 흰색이다. 아마 벌, 나비, 나방의 눈에 쉽게 뜨이게 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 아닐까 싶다. 꿀을 취하여 가지만 않는다. 암술과 수술을 중개하여 꽃가루를 전달하여 代를 이어 나가게 도와 준다. 아무리 못생긴 꽃이라드 빠뜨리지 않는다고 하니 감동적이다. 야심한 밤에 피는 꽃은 의외로 많다. 야래향, 선인장, 재스민, 치자나무, 목련, 꽃담배 등이 夜花이다. 흰색이니 알리기도 쉽겠지만 향기도 짖게 풍긴다. 낮에는 꽃이 닫히는 특성이 있다. 특히 야래향(夜來香)은 향기가 짙을 뿐만아니라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애잔한 생각이 들면서 먼저 간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주현미가 부른 노래가 압권이다. 나방이나 박쥐도 꽃가루를 옮기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文人은 밤을 좋아하고 밤꽃을 좋아한다. 이제는 달을 보고 시를 쓰지 않는 시대이다. 인간이 달을 정복(?) 하고 부터는 달보다는 떨어지는 운석(隕石)의 가치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태백이 지하에서 통곡(痛哭)을 할지 모를 일이다. 夜花는 흰색이거나 노란색이다. 그리고 자기만의 짙은 향으로 중개를 유인하는 것이다. 주고 받으면서 상생을 통하여 윈윈하는 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을 보노라면 괜히 숙연해 지면서 경외감이 인다. 조기 대선에는 숱한 비방과 험악한 언어가 등장할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역지사지 하라는 배려의 마음은 정치판에서는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 권력에만 혈안이 되어 상대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니 그들은 천상에 가는 것은 애시당초 포기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파스칼이 갈파한 지상은 꿏이 있어서 아름답다 했다. 천상의 별은 공해로 볼 수 조차 없는 세상이다. 가슴의 사랑조차 고갈이 되어 건조하니 여간 답답지가 않다. 정치인에게는 아예 文.史.哲이 없다. 특히 역사관이 없으니 목전의 이익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지경이다. 대통령 후보자가 콩나물 시루의 콩나물처럼 고개를 들이 밀고 있는데 일종의 후보공해다. 흥행으로 관심을 높인다고 하는데 웃기는 일이다. 야심한 밤에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선한 기운이 들도록 심성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그들의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꽃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운다. 열사의 사막에서도 선인장을 꽃피워 전갈과 벗을 하고 있으며, 엄동의 혹한에도 설중매가 피어 인간에게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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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6] 밤에만 피는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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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5] 초야(初夜)를 맞는 신부의 마음
- 이경국 칼럼니스트 신부가 첫날밤에 신랑을 맞이하는 일은 가슴이 떨리고 설레이면서 적어도 혼례식을 올리기 며칠간은 밤잠을 설칠 것이다. 이는 요즘 얘기가 아니라 옛 시대의 우리사회가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만나자 말자 볼짱을 다 보기 때문에 첫날밤이 어디 있을 것이며, 허니문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있을 턱이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性의 자유를 만끽하는 시대조류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본다. 좋은 것은 아끼고 참으면 그 효과는 오래 유지 된 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조금만 갖고 놀면 싫증을 내기 마런이다. 변신하는 로버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심리는 지극히 미천한 경우도 없지 않으며 호기심 또한 많기 때문이다.. 쉽게 성사되는 사랑은 귀함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사랑의 지고지순한 순정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 이라고 가슴앓이 하다가 자살로 이어지는 순애보 사랑도 많았던 시대가 있었다. 표현이 리얼하지만 요즘 처녀들은 발랑까져서 연정에도 깊은 사랑이 없어 보인다. 처녀막은 아예 고박물관에 가도 찾을 수 없다고 보면 될 것이다. 왕의 간택령이 내려지면 혼사도 중지시켰다. 그리고 앵무새의 피로 처녀임을 검증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 북한의 기쁨조 선택은 너무나 비인간 적이며 노리개 취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UN 가입국으로 국가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처녀가 아니면 천하절색 양귀비라도 탈락이란다. 처녀든 비처녀든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은 애기를 낳는 여성의 입장에서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것이다. 성은 드러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감추는 행위가 더 아름다운 행위가 아닐까 싶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다리사이에 감추어서 부르기조차 민망하여 음부(陰部)라고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타기는 물론 자전거도 탈 수가 없었던 소시절이 생각난다. 처녀막의 파손에 따른 경고였다. 아주 깨끗한 몸으로 초야를 맞이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던 시대의 여성들은 고통이 심하였을 것이다. 정조를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여긴 것이다. 춘향이는 이도령을 위하여 사또의 갖은 행패에도 굴하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자 사공이 부인의 손목을 잡고 내려 주었다고 은장도로 자결한 사례도 있다. 외간 남자의 살이 닿았다는 이유 때문 이었다. 청나라에 끌려간 수십만의 여성들이 돌아와서 임금이 홍제천에 몸을 씻으면 받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반가에서는 이를 거부하여 목숨을 끊어버린 비통한 사연도 있었다. 얼마나 비참한 상태로 생을 살다가 갔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중국에는 조공(朝貢)도 많이 바쳤지만 그들의 여성유린도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은 전시에 여성을 노리개로 취급 했으니 이른바 정신대 이다. 인류역사는 전쟁사 이기도 하며 군의 사기를 위하여 위안부를 이용 하기도 했었다. 인권을 들먹이지만 전쟁보다 잔인한 것이 어디 또 있더냐! 중국이 역사적으로 훨씬 더 가혹했는데도 그저 반일만 들먹이면서 소녀상을 도처에 전시하고 있다. 국력이 약하여 당한 비극인데 무슨 전시가 필요하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중국은 셰셰라고 외치면서 좌경이 경계를 없애 버리니 나라가 중국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수치나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이다. 여성이 얼굴이 빨개지는 경우를 볼 수 조차 없는 시대이다. 서로가 밤살이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에 初夜의 두려움보다 극한의 희열을 갈구하고 있는 스피드 시대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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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5] 초야(初夜)를 맞는 신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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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4] 소리의 최고조는 이것?
- 이경국 칼럼니스트 철이 들고 나서야 소리의 최고조는 역시 해군성(解裙聲)임을 알고서 크게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는 '여인의 치마벗는 소리'로 알려져 있다. 고교 때 '성북동 비둘기' 로 유명한 김광균 시인은 겨울철 '눈이 내리고 쌓이는 소리를 '여인의 옷벗는 소리'로 <雪夜> 에서 표현했다. 이는 김광균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사실은 조선 효종때 홍만종이 <명협지혜>의 ''소리의 품격''에서 최초로 거론한 내용이다. 문학적인 사고가 뛰어 나야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필자가 오래 전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꽃향기도 아니요 벌꿀의 달콤한 향도 아니다, 그것은 건강한 <여성의 음부(淫部)냄새>라고 좀 거시기 하지만 필자같은 대자유를 구가하는 작가 만이 표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그렇게 써 보았던 것이다. 여러 계층의 문학인으로부터 아주 좋은 발상이라는 답신의 글을 받았던 것이다. 배꼽 아래의 표현은 금기시 되고 있는 우리나라이다. 필자의 처녀작의 제목도 엉뚱하다. <배꼽위의 상한가>이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두 가지를 코믹하게 그려 보았다. 배꼽은 어머니로부터 마지막으로 물려 받은 흔적이다. <아래>가 맞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위>로 표현했지만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배꼽을 보면 상상을 하게 되는데 세상은 배꼽티를 입고 그것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상한가는 주식 시장의 용어이다. 주가가 하루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폭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돈 즉 현대인이 物神으르 섬기는 자본을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엄청난 분량의 글을 쓰기는 했으나 일체 기록으로 남기지 않기로 작정 하였기 때문에 출간은 하지를 않은 상태이다. 이는 법정스님의 유훈 (遺訓)과 佛子로서 공(空)의 깊은 개념을 체득했기 때문으로 변명을 하고 싶다. 관세음보살은 소리(音)를 본다고 하는데 일반인은 소리는 듣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무지개는 7가지 색깔만 보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색깔에 눈이 뜨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어떠한 아름다운 소리보다도 여성이 치마끈을 풀고 벗는 소리가 으뜸이란 사실에 반기를 들 남자는 없을 것이다. <스르르> 치마가 흘러 내리는 의성어는 한글 만의 장점이다. 세계 어느 문자로 이러한 표현이 가능할까 싶다. 노랑색과 연노랑 색만이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나라의 <노리끼리하다>의 표현은 어떤 나라도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치마내리는 소리가 좋다는 것은 남녀의 交合이 최고라는 의미이다. 이는 정신과 육체가 건전하고 건강해야만 제대로 된 운우(雲雨) 의 정을 느낀디는 의미일 것이다.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남자가 며칠간 해외 출장에서 돌아 왔는데 일찍 저녁 식사를 끝낸 아내의 샤워하는 소리에 그만 남편은 기가 죽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급한 일이 생겨서 회사에 나간다고 들러대고 집을 나와서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잔뜩 취해서 들어 오니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부부간에 合이 맞지 않거나 아니면 심인성이 작용하여 섹스를 기피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자에게 여인의 치마벗는 소리는 어쩌면 피하고 싶은 소리일지도 모른다. 흔히 짚신도 짝이 있고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성간의 소중함을 일컷는 말이 아닐까 싶다. 몸이 불편한 곱추도 애기를 잘 낳을 수 있으며, 얼굴이 박박 얽었으나 상대가 이뻐 보이면 보조개로 보인다고 한다. 그것도 ''못생겨서 죄송하다'' 고 넉살좋게 웃음으로 다가 온다면 마냥 미워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생사는 하기 나름의 기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부여된 사랑을 향유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옷벗는 소리에 취할 수 없다면 바람직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있을까 싶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볼짱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인간의 상상력의 최대의 꼭지점은 우주의 연원이라기 보다는 이성간의 호기심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소리는 귀로서 듣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확대하여 들어야만 생각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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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4] 소리의 최고조는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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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3] 소꿉놀이 시절의 추억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아주 어릴 때 옆집 순이와 소꿉놀이를 많이 했다. 둘이 엄마 아빠를 하면서 제법 뭔가를 아는 듯 놀았던 것이다. 마치 이성을 알기라도 여기듯 했었다. 소꿉놀이를 하다가 순이는 마치 보여 주고 싶기라도 하듯 옆에서 쉬를 하면 호기심이 발동하여 자세히 들여다 보곤 했다. 나중에 소설과 에세이를 접하면서 그러한 대목을 읽고서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리지만 자기와 다른 몸에 대하여는 호기심이 있다는 것이다. 순이는 사춘기 무렵에 소꿉장난 할 때 자세히 보아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농을 걸었더니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아마 다 커서 수치를 알 나이인데 필자가 짓궂어서 놀리는 재미로 말했던 것이다. 중성의 시기를 지나면 이성을 막연히 동경하면서 그리워하는 때이다. 온몸이 난로처럼 뜨겁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 일쑤였다. 그때의 추억은 일생동안 간다고 했다. 물론 서로가 남의 아내와 아빠가 되어 슬하에 손주가 있지만 마음은 그대로다. 어쩌다가 한번씩 생각이 나기 마련인데 필자는 글을 거의 매일 전하고 있으니 늘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 이 글을 읽게 되면 소꿉장난 하던 시절이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따뜻하여 질지 모르겠다. 얼마나 철이 없었으면 보는데서 쉬를 하였을까? 아마 나더러 보라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답례(?)로 서서 쉬하는 모습을 쳐다 보던 순이도 나와 같이 중년이 되의 반백의 모습이다. 측은지심을 같이 느낀다. 자녀가 넷이나 되어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농을 하여도 웃기만 한다. 죽마고우는 남자들끼리 쓰는 말이지만 순이는 그야말로 죽마고우다. 멱도 같이 감았으니 더 할 나위가 없다고 본다. 그나마 자연속에서 성장하여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다. 지금은 메스컴과 스마트폰으로 일찍 성에 눈이 뜨인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되면 초경을 한다니 춘향이의 나이인 이팔청춘인 16세는 이미 알 것을 다 아는 나이가 아닐까 싶다. 조혼이 성행하던 때는 일찍 시집을 갔는데 지금은 노처녀가 득실 거리는 시대이다. 애기의 울음소리도 듣기가 힘들뿐 아니라 입학생을 없어서 폐교하는 초등학교가 부지기 수란다. 소싯적에는 기찻길 옆이 아니더라도 애들이 많았다. 생기는 대로 낳는 것이 농업시대에는 경쟁력의 우위였다. 동리마다 애들이 많았다. 먹거리가 부족하여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어려운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선진국에 빠르게 진입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형제가 많아야 우애도 솟아나고 효자도 나오기 마련이다. 외동은 자기 밖에 모르고 결혼을 다소 기피햐는 경향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다 외동의 시대이다. 집집마다 외동이니 개인주의가 만연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소꿉놀이를 모르고 자라기 마련이다. 전자게임이나 전쟁놀이를 배우면서 자리나니 정서가 메마르다. 순이와 같은 소꿉놀이를 모르고 자랐으니 쉬하는 모습을 알기나 하겠나 싶다. 추억은 커녕 생각 자체가 건조하니 세상이 살벌해지는 것같아 여간 아쉽지가 않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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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3] 소꿉놀이 시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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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2] 계란밥의 추억이 그립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우울한 뉴스 '탄핵'만의 방송이 거의 24시간 도배를 하듯 떠들어 대고 있다. 짜증나게 하는 뉴스가 사방에 지나치게 범람하듯 넘친다. 언론은 정론은 커녕 동시다발로 사실과 다른 왜곡 뉴스 일색이다. 방송은 나팔수의 경지를 넘어 천편일률적이다. 어딘가 컨트롤타워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짐작을 하고도 남을 국민의 수준이다. 이러한 관계로 필자는 아예 TV는 켜지를 않는다. 어쩌다가 휴일에는 '나는 자연인 이다'란 프로를 보는 경우는 있다. 산중의 삶이 그냥 좋아서다. 신문과 방송을 보지 않고 지낼 수 밖에 없다. 답답하게 보이는 그들의 일상이지만 생각은 단순하면서 깊을 것이다. 한 가지 일에 몰입하여 심취하면 다른 세상이 보이기 마련이기 때운이다. 삼매경은 독서에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랑도 삼매경에 빠져야만 강한 전율이 일어난다. 그리고 추억을 回想하는 習을 길러야만 행복해 짐을 느낄 수 있다. 스쳐 지나면서 살기엔 너무 짧은 인생이다. 유아 때와 晩年의 기간을 제하면 우리 생애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 따라서 필자는 소시절에 달걀을 먹고서 빈껍질 속에 쌀을 넣고 불에 익힌다. 소위 <계란밥> 이 된다. 조금씩 먹는 재미가 쏠쏠하고 아껴 먹는 재미도 좋다. 닭을 방목하니 양계장의 닭과 육질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햇볕을 받고 지내며 자연속의 다양한 먹거리가 있어 생계란 자체도 아주 달콤하다. 우리나라가 인도 다음으로 가난했다. 삼시 세끼가 힘든 시대였으니 주전 부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의복이 허술하여 겨울에는 추위도 매서웠다. 계란밥은 귀했으며 불위에 언져두고 익히기를 기다리면서 참아 내는 힘을 길렀다고 본다. 지극히 가난함은 견디기 조차 어렵지만 정신력 향상에는 일조를 하기는 한다. 헝그리 정신으로 살았던 시대였다. 앎탉은 알을 낳고서는 크게 운다. 수탉에게 알리는 신호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인에게 알리려고 울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 전에 암탉이 알을 낳고서 우는 것은 ''코도 눈도 없어서 놀라서 수탉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수탉의 긴 화답이 있다. 목청을 뽑아 크게 운다. ''그렇더라도 좋다.'' 뭐 이런 신호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계란밥의 추억은 누구나 뇌리의 작은 분실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시골에서 자라면 추억이 많기 마련이다. 자연이 스승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세상이 하수상할 때는 추억을 소환하여 그 속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닭은 알로서 인간에게 보답을 한다. 죽어서는 알몸으로 마치 보시하듯...... 소싯적에는 닭은 새벽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술시(戌時)에 횃대에 오르면 그때부터 술을 마시는 시간이었다. 닭이 그나마 억울하지 않는 것은 십이지간에 유일하게 들어있는 조류이기 때문이다. 가축으로 키우던 씨암탉이지만 사위가 오면 잡아서 대접하던 소싯적 모습이 생각이 난다. 지금은 사위가 장모더러 어머님이라 부르면서 반자식이 온자식 역할을 하고 있지만 씨암탉을 손수 잡아서 대접하지는 않는 시대이다.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고 했지만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처가가 있으며, 화장실은 집안에 여러개가 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혼도 밥먹듯이 하는 시대이니 옛말에 대한 생각을 깊히 해 보라는 의미에서 계란밥의 추억을 더듬어 본 글이다. 지가만의 추억속에 동산을 만들어 동심으로 돌아가서 옛동무를 생각해 보면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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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대구춘추 182] 계란밥의 추억이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