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4(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대구춘추

실시간뉴스

실시간 대구춘추 기사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9] 사라지는 음식문화
    이경국 칼럼니스트   음식문화는 종교와 같다고 본다. 나라마다 고유하기 때문에 서로 존중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개장국(보신탕)이 우리 민족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개고기를 먹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남의 나라의 간섭으로 고유한 우리의 전통음식을  못먹게 되니 주체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개뿐만 아니라 가축은 기르는 사람과 정이 들기 마련이다. 다만 개는 구석기시대부터 가축이 되었으니 가장 오래 되었으며 정도 많이 들었다고 본다. 유럽인이 미개인으로 지칭하는 것은 반려견을 먹는다고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거위간 (푸아그라) 을 먹는데 그것은 괜찮다고 여긴다. 그들이 즐기는 달팽이 요리도 같다고 본다. 달팽이도 살려는 욕구가 강하고 아픔을 느낀다. 산해진미의 음식가운데 개보다 더한 것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상어지느러미는 삭스핀인지 섹스핀인지 지느러미가 없으면 상어는 죽게 된다. 개구리 뒷다리를 즐기는 프랑스는 사실 우리의 개장국을 탓할 자격이 없다. 중국과 프랑스는 인간의 五味를 자극하는 동서양 1위의 요리국이다. 음식문화가 화려하기 때문에 뭇 생명을 많이 죽일 수 밖에 없다. <사슴눈알찜>은 이름만 들어도 징그럽다.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사슴이다.  눈망울은 선하여 눈물나게 하는 동물이 사슴이라고 노천명은 읊었다. 엽기적인 요리는  두면서 개장국만을 시비거는 유럽인이다. 필지는 보신탕을 즐겨 먹었으나 佛子가 된 후로는 일체 먹지를 않고 있다. 특히 동물가운데 개는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다. ''생명 있는 것은 다 사랑하라''고 한다. 가축을 키우다가 팔려가는 모습을 보면 여간 가슴아프지 않다. 돼지는 평생 하늘을 볼 수 없는 슬픈 동물이다. 밥을 주는 주인의 얼굴도 볼 수 없다. 팔려가는 날은 눈물을 흘린다. 주인을 냄새로 아는 것이다. 먹이를 많이 주고 시끄러우니 팔려간다는 것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고함도 크게 지른다. 돼지의 입장에서는 팔려가기 싫다는 표현인 것이다. 개는 사람들의 사랑도 많이 받지만 온갖 나쁜 욕설에는 개라는 말을 넣는다. 'ㄱ새끼' 는 동서양의 공통된  욕설이다. 우선 개는 상추밭에 실례를 한다. 그리고 앉으면 수캐는 삐죽이 거시기를 내밀면서 자랑을 한다. 사실은 성기가 뼈로 되어있어 저절로 나오는 자연현상이다. 그것 보다는 길거리에서 교미를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수치를 알면서 옷으로 치부를 가린다. 동물은 윤리가 없다. 오로지 먹이를 먹고 교미하여 번식할 뿐이다. 가뜩이나 반려견은 호강을 하는 시대이다.  상전(上典)으로 모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34억 축생가운데 주인의 눈치를 개만큼 잘 아는 동물은 없다. 가장 충성심이 강한 동물이다. 충분히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요건은 구비하고 있다고 본다. 길을 잃을까 싶어 고비마다 찔끔 흔적을 표시해 둔다. 영리한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혼인을 하지 않고 애완견을 반려삼이 데리고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만취가 되어 귀가하더라도 부치(15년 가족처럼 지냈던 반려견)는 나를 반겨주었다. 떠난지도 오래되었지만 선한 눈동자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방안에서 키우는 것은 원래 식용으로 먹지 않는 우리민족이다. 반려견이나 금붕어를 먹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지금은 개팔자가 상팔자인 시대이다. 삼복지간에는 犬公들이 얼마나 불안하게 지냈는지 인간은 모른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라면서 보신탕으로 흘린 땀이 기하뇨? 토란대를 넣은 개장국은 맛도 일품이다. 필자의 친구는 보신탕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비맞은 개만 보아도 군침이 돈다고 하여 만나면 弄을 건넨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잡아서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것이 30대초였다. 지금 생각하니 미개인이고 무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소싯적에 개잡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잔인했다. 목을 메어서 죽인다. 고기가 연하라고 몽둥이 질도 하였다. 수많은 犬公들이 불쌍하게 죽어갔지만 이제는 유기견을 만들거나 함부로 죽이는 일은 사라지고 개도 천수를 누리는 <犬天國시대>가 만개 할 것이다. 개고기 자체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닭, 거위, 오리, 소, 말, 염소, 토끼도 가축이고 개와 다를 바 잆기 때문이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하여 미개인 취급을 해서는 안된다. 포크와 나이프 보다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안정적인 모습이다. 원숭이 생골을 먹거나 사슴의 피를 빨대로 빨아 먹는 모습을 보고 필자는 잔인한 인간의 속성을 생각해 보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불교 신도오계의 첫번째 계율이다. 하필 개고기 만을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원숭이 생골을 먹는 기사를 읽으면서 필자는 몇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원숭이 우리의 문이 열리면 겁에 질리는 모습이다. 고객(?)이 수족관의 횟감을 고르듯 마음에 드는 원숭이를 찍으면 모든 원숭이가 떠밀듯 동료를 밀어 낸다. 그래야 살아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단두대에 죄인의 목을 때듯이 원숭이를 그렇게 해 놓고 생골을 즉석에서 먹는다. 이는 보신탕보다 수십배는 더 잔인한 짓이다. 개는 축생이지만 원숭이는 손을 사용하는 영장류 이기에 인간과 더 가까운 동물이다. 선진국이나 저개발국이나 인간의 삶의 질적인 모습은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고유한 본성은 같다. 곰발바닥이든 모기눈알 요리든 인간은 어차피 자연을 훼손하면서 다른 동물을 먹이로 하고 있는데 유독 개만을 트집을 잡고 그에 대항하는 정부정책도 미온적이기 짝이 없다. 북한의 청소년을 공개처형하거나 우리나라의 유아를 해외입양 시키는 행위는 개장국을 끓여 먹는 것 보다 잔인 하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10-14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8]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
    이경국 칼럼니스트   현대문명에 밀리어 수 천년 내려온 유산 가운데 사라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아쉽기 짝이없다. 우선 도깨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도깨비라는 좀 무서운 밤의 동물이었다.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허상을 한 일종의 귀신인데 산길이나 들길에서 마주친다고 한다. 도깨비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도깨비 방망이>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나오라고 외치면 뚝딱하고 나오는 것이 도깨비방망이다. 안동지방의 방언으로는 도깨비를 '토쨉이'라고 부르는데 밤길을 가다가 흙을 퍼붓는다 하여 무척 두렵게 생각하였다. 어릴 때 밤길을 무서워 한 것은 도깨비 때문이었다. 물론 농촌에는 늑대, 여우, 삵괭이도 무서웠다. 노루도 밤에 마주치면 놀라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귀신과 도깨비는 사실 전기가 들어온 이후 어두운 밤길이 밝아지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캄캄하여 무서워지면 귀신이 쓰이어 헛보이는 것이 도깨비였다. 사라져 버린 것들을 되살리기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스피드에 취하여 정감이 있는 간이역이 자꾸만 사라져 간다. 축생가운데 스피드가 열세인 인간이 기어 다니던 오랜 세월의 올챙이 시절을 잊어 버린 것이다. 농경시대의 유산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은 여간 아쉽지가 않다.    눈에서 멀어진 것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가마니, 멍석, 산태미, 소쿠리, 지개, 버지기와 옹가지, 안반과 홍두깨, 등잔과 호롱불, 그리고 이동식 WC인 요강도 눈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달과 호롱불은 시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형광등 불빛아래서 詩語를 토해 내기란 쉽지 않다고 본다. 그나마 아랫마을 이쁜이는 황소를 타고 시집을 갔지만 우리마을 갑순이는 가마타고 시집을 갔는데 요즘에는 가마구경도 할 수가 없다. 북망산으로 갈 때는 상여(喪輿)를 타고 가는데 보지 못한지도 오래 되었다. 필자는 상여는 한번 매어 보았지만 가마를 맨 경험은 없다. 가마는 새색시가 타고 시집을 오지만 상여는 죽은 자가 묘지까지 타는 마지막 가마인 것이다. 올 때와 갈 때가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아무리 좋아도 새색시는 웃을수가 없다. 그리고 상여속 죽은 자는 슬픔을 모른다. 이웃간에 별식을 하면 담너머로 건넨다. 빈 그릇으로 보내지 않았던 이웃사촌이다. 지금은 중간소음으로 툭하면 분쟁이 벌어진다. 이웃이 사촌은 커녕 무촌의 무인지경의 야박한 세상이다. 제발 도깨비가 다시 나타나서 국법을 우습게 여기면서 딴  나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작자들을 모조리 해코지 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인다. 回想의 즐거운 대상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정이 메마른 건조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10-07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7] 자신이 지은 업(業)대로 산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기왕 사는 인생인데 三世를 보면서 통크게 살았으면 싶다. 現世도 벅찬데 어찌 과거나 미래세를 생각할 겨를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세의 모든 일이 업경대(業鏡臺)에 에누리 없이 투영되어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길게 보고 살아가는 習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善業善果라 했으니 좋은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죽어서도 좋은데 간다는 이치임이 틀림이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일생동안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보고 있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과거세도 다 알 수가 있다고 한다면 옷깃을 여미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단, 미래세는 결국 현세의 業으로 정해지니 이생의 삶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업경대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생의 행적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물론 方便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을 키워보면 공부를 하는지 만화책을 읽고 있는지 아니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지 부모는 안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지옥문을 지키는 대장인 염라대왕이 인간의 한 일을 보고서 갈길을 심판하는 셈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란다. 안보고도 어찌 어머니께서 자기의 행적을 아시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는 열달간 편히 있을때 어머니께서 귀울인 공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나 지옥행은 인간의 한 생애의 일을 판단하는데 이를 미리 알고 있어야 마음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다. 선하게 살아가는 좋은 방법은 가족을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善한 생활만이 악을 멀리하고 天上을 가깝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말이 거친 자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치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답답한 구석이 없진 않았지만 조선시대의 청백리나 벼슬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비들의 모습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최근 작고한 장기표 선생은 아수라판 같은 정치판에 국민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기신 귀감이 되신 분이다.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5.18을 가장하여 수억씩 챙긴 얼굴 두꺼운 정치인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국회와는 한번의 인연도 닿지 않았지만 존경과 흠모는 국민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와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정치인들이 뭔가 느껴야 할 것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갖은 수작을 부리고 있는 자들은 조상과 국민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청빈하게 살기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장기표는 현대의 청백리다. 가족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컷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감동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최인호 소설가도 희귀암을 앓으면서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서 글을 남기었다. 이어령 교수도 죽는 순간을 살피면서 항암치료도 받지 않고  '눈물 한 방울'을 남기고 훌쩍 떠나셨다. 장기표도 떠나면서 감동적인 '열반송'같은 遺訓을 남기셨다.  필자는 ''다 이루었다''는 성자의 유언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위나 돈을 위하여 죽자고 노력하지만 인간이 떠날때 보면 자신이 지은 業에 따라서 남은 자의 박수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바른 선비는 결코 고대광실에 머슴을 두지 않고 살았다. 만약 장기표가 민주화를 했다고 수억을 챙기면서 2선 의원에 집에는 가정부를 두고 살았다면 지금같은 애도의 물결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도 정치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하근기 삶을 살다가 캄캄한 곳으로 가는 길은 자명하다고 본다.   제발 三世를 보는 식견은 없더라도 현세라도 바르게 보고 살았으면 싶다.   국민의 혈세로 보수를 두둑히 챙기면서 온갖 특혜를 향유하는 작자들의 쏟아내는 거친 언어를 보노라면 기가 막힌다. 죽어서 고칠병이라면 얼른 죽으면 좋겠는데 어진 사람만 먼저 데리고 가는 세상이니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옛말이 맞는 것 같다. 칭찬을 해주고 싶어도 눈을 비비고 보아도 칭찬거리가 없는 相(몰골) 이 국회나부랭이들의 모습이다. 안되면 조상탓을 하는데 의사당은 풍수로도 터가 아닌듯 하다. 청와대의 터가 신이 머무는 자리여서 숱한 역사의 오점을 남긴 곳이었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9-30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6] 불륜(不倫)은 들키기 마련이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최근  화제를 모은 연속극 <굿파트너> 의 주된 내용은 ''불륜은 들키기 마련''이라고 한다. 정륜이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게 한다. 그리고 외도, 바람, 간통, 정조, 일부일처제 같은 것들이 스친다. 이혼전문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결혼을 하면 남편이 동창회에 나간다면 적극 만류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세상에 불륜때문에 학창시절의 친구를 만날 수 없다면 누구를 만나야 한다는 말인가? 남녀공학은 초등학교는 다 있었다. 중학교는 없는 곳도 있긴했다. 미성숙의 풋과일 시절은 속으로만 좋아했던 짝사랑 하던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때 속으로 서로 좋아했다는 말을 들으면 목덜미의 주름도 눈가의 잔주름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의 탱탱한 모습에 삽시간에 감싸이고 만다. 이를 <못말리는 사랑> 이라고 한다. 어느 작가의 고백이 뇌리를 스친다.    옛날의 연인을 만나서 전에 드나들던 호텔에 함께 가게 되었는데 뱃살의 갈라진 모습을 보고 정념이 떨어지더라는 푸념의 말을 듣고서 웃은 적이 있다. 배는 처음부터 보는게 아니다. 여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뱃살이다. 결혼하여 달콤한 시기가 지나가고 부인이 자식에게만 신경을 쓰면 남자는 외로워지기 시작한다. 직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진급에서 누락이 되는 날이면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이는 가정에에서 아내가 따뜻하게 받아 주어야 하는데 잠자리까지 슬쩍 피하면 술로 풀거나 밖으로 관심을 돌리는 계기마련이 되는 것이다. 권태기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되는 것이다. 필자는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결혼과 성습관 그리고 바람은 왜 피우는가에 대한 많은 서적을 섭렵하다시피 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몰래사랑은 많기도 하다. 다만 들키는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는 증거확보에 따른 어려움과 이미 부부간의 불신이 싹트여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남자의 정자는 종족을 퍼뜨리려는 속성이 윤리보다 앞서 있으며, 다른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기에 접촉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 여성은 먼 태고때도 남자가 사냥이나 전쟁에 나가면 숲속어서 외간남자 (?)와 사랑을 한 기록이 있다. 이는 쾌감을 향유하기 보다는 경제적인 득이 먼저였다. 반면 남자는 권좌에 있거나 재벌들의 축첩행위를 보노라면 대다수가 바람기가 본능보다 강하게 작동이 된다고 보여진다. 열 여자 마다 할 남자는 자고로 없다고 했다. 부인이 4명이지만 아랍에는 부부싸움이 덜 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바람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십계명의 간음(姦淫)이나 불교의 신도오계에 사음(邪淫)이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는 외도의 파트너는 당기는 힘도 강하고 체취(體臭)도 다르기 때문이다. 여성은 애기를 계속 낳으면 체취를 풍기지만 단산(斷産)을 해 버리면 체취가 사라져 버린다. 이는 향수로 대체할 수 없는 묘한 것이다. 전문용어로 쿨리지효과 (Coolidge--effect)라 한다. <바깥양반, 안사람>은 전통적으로 좋은 용어이다.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에 어긋난다고 용어를 여성중심으로 바꾸었다. 따지고 보면 총체적인 손실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최저인 것도 이와 무관 하지 않다는 사실은 필자가 줄곧 주장하는 내용이다. 불륜은 성에 관한 이해와 부부의 노력 그리고 멀티오르가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 생활만이 줄일수 있다고 본다. 인류는 혼외정사, 술 그리고 마약 등은 쉽게 풀리지 않는 숙명적인 숙제임이 틀림이 없다. 불륜이 틀키든 뭍히어 있든 전쟁과 같은 인간사회의 불가피한 것이기에 그저 가정이란 울타리 속에서 지켜 내어야만 할 것이다. 한때 간통을 국가에서 관리 한 적이 있었다. 고아원은 신부와 수녀 사이에 몰래 태어난 애들이 어원이 된 것이다. 법주사의 주지는 신도도 아니고 비구니와 일을 저질러 잠적된 상태이다. 에스키모는 손님에게 아내를 접대하고 있다. 근친상간의 병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일부다처도 있고 그 반대도 있다. 이는 관념과 풍속의 차이다. 불륜을 거기까지 이해하기란 적잖은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불륜은 들키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해도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일이다. 누구나 스스로는 예외란 착각속에 사는 인생이니 ...... 미래학자는 일부일처제가 곧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도가 좋으며, 불륜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9-23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5] '사후(死後)이혼'의 안타까움
    이경국 칼럼니스트   이혼을 잘 하지 않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이혼율이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이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한집 건너 한명씩 이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연시 여기고 있으며, 각종 메스컴에도 이혼을 너무나 당연하게 취급하고 있다. 시청율 때문이다. 결혼은 어차피 하여도 후회, 하지 않아도 후회 한다고 일찍이 히랍시대 테스兄이 갈파했다. 지금은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서 후회를 하는 시대이니 말법시대임을 알려주는 증후로 보인다. 죽자고 좋아서 혼인하여 죽지 못해 살다가 죽어도 좋다면서 갈라서는 세상이다. 부부는 죽어서도 함께 뭍히는 (合葬) 유일한 존재인데도...... 지금은 <사후(死後)이혼> 이란 기상천외한 용어가 생기었다. 이는 일본에서 유행하듯 일어나는 별종의 이혼이다. 사별한 배우자와의 이혼이란다. 가뜩이나 남자는 여자보다 평균수명도 짧고 나이도 더 많기 때문에 먼저 죽기 마련이다. 대체로 여자가 사후이혼을 신청한다는 것이다. 인척관계를 청산하고 여생을 편히 살고 싶다는 것이다. 시부모 간병이나 부양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꿀뚝만 같을까? 武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인의 무서운 단면이다. 우리나라는 고부간에는 미운정 고운정이 들어서 시어머니가 임종때 며느리에게 ''내가 너무 모질게 굴어서 미안하다'' 면서 며느리의 손을 꼭 잡으면 시집살이의 모든 힘들었던 일들이 눈녹듯 녹아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초상내내 며느리가 가장 슬피 우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편히 살려고 일본은 사후이혼을 한다는 말인가? 다행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법적으로 불가능한 <사후이혼> 이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여권신장이라 우기면서 여성가족부가 어떻게 나올지 저으기 걱정이 된다. 필자는 이토록 편하게 지낸다면 여성들이 손바닥에 털이 날까 우려스럽긴 한다. 삶의 깊은 의미나 인문학적 사고의 부족에 기인되어 마구 인생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무뚝뚝한 경상도 말씨가 정이 없어 보이지만 이혼을 쉽게 하지 않는 것은 유교가문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인성이 바르게 되어서 그럴 것으로 보인다. 소실을 두기는 하나 본처를 버리지는 않는다. 하기야 공자는 본인은 물론 아들도 손자도 모두 아내를 쫓아 버린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생은 험로역정이요, 고해의 바다라 했거늘 타고난 운명이나 숙명을 마다하고 얄팍한 생각으로 세상을 만만히 보고 살고 있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이혼, 졸혼, 황혼이혼, 사후이혼 등 뚱딴지 같은 용어는 사화를 혼란시키는 저속한 말이다. 말세나 말법시대인데 반성을 모르고 사는 현대인의 아둔함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조선 중기의 퇴계선생의 며느리 봉화금씨는 자신이 죽으면 시아버지 묘소 부근에 뭍히고 싶다고 했다. 지금 퇴계의 묘소 아래 좌측에 산소가 있다. 필자는 퇴계선생묘소에 참배를 갈 때는 꼭 며느리인 봉화금씨의 묘소에 절을 올리고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한번은 눈물을 크게 흘린 적이 있다. 당시 퇴계는 며느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봉화에 갔는데 자기들이 양반이라 하면서 문중 어른들이 모여서 퇴계에게 모욕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퇴계가 돌아오자 진성이씨 가문의 어른들이 모여서 당장 혼인을 그만 두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조용히 설득을 하여 며느리로 맞이 했던 것이다. 막상 시집을 와서 보니 훨씬 더 예의 범절이 있고 퇴계의 인품에 감읍하여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사후에도 모시고 싶다고 무덤이 퇴계의 가까이에 있게 된 것이다. 많은 참배객이 며느리 봉화금씨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리고 있다. 수가 틀린다고 이혼을 해 버리고 남편이 북망산에 갔는데도 '사후이혼'을 하는 시대이니 적어도 그들은 연민의 정이나 측은지심이 없다고 본다. 과거를 회상(回想)하는 아름다운 생각은 없고 나쁜 기억만이 있으니 餘生이 행복할 턱이 없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양가의 부모님을 정성껏 모시는 길이 천상에 이르기 위한 티켓임을 밝히고 싶다.   필자의 종교가 <어머니> 인 까닭이기도 하다. 晩年에 남편도 없는데 시어머니를 모시기 싫다면서 <死後이혼>을 자행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남편과의 사랑이 한때는 목숨보다 귀했다 했거늘 잘못 살았다면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일 것이다. 제발 일본의 악습은 현해탄을 건너 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9-18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4] 아름다운 붉은입술
    이경국 칼럼니스트   <붉은입술>은 전통 트롯곡으로 나훈아가 리메이크하여 지금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가요이다. 이 노래는 1967년 가수 문일평이 부른 노래였지만 왜색논란으로 금지가 된 곡이다. 당시는 일본과 문화교류가 적었던 시절로 왜색조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빛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다 풀리긴 했지만..... 이미자의 최고의 히트곡인 <동백아가씨>도 금지된 곡이었다. 이노래는 박대통령의 애창곡이다. 우선 가사를 옮겨본다. [밤을 새워 지는 달도 / 별을 두고 가는데 / 배떠난 부둣가에 검은 연기만 남아 / 맺지 못 할 사연 두고 떠난 사람을 / 이렇게 밤을 새며 울어야 하나 / 맺지 못할 붉은 입술] 이는 이별의 노래이다. 첫 소절을 보면 전율이 인다. ''밤을 새워 지는 달도 별을 두고 간다''고 한다. 달은 여자요 별은 남자로 연인간 혹애(酷愛)를 말한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연인이 뱃고동과 검은 연기를 남겨 두고 떠나 버린다. 남자는 실신의 지경에 이른다. 맺지 못할 사랑임을 뻔히 알면서도 밤을 새워 남자는 운다. 사나이 눈물은 좀 다르다. 아버지는 가슴으로 울면서 눈물없이 운다. 이는 아버지가 되어 보아야 알 수 있다. 연정에 의한 사나이 눈물은 닭똥같이 굵을 것이다. 말은 못하면서 전신으로 통곡하듯 우는 것이 남자다. 또렸이 떠오르는 그녀의 붉은 입술은 립스틱 때문인지 아니면 뜨거운 사랑이 남긴 러브마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사랑은 인연이 닿지 않으면 아픔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정신적인 사랑이든 아니면 육체적 관계이든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붙잡지도 못하고 보내고 후회하는 남자들이 많다. 가슴이 텅 비워져 있어 오직 떠난 님만 생각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애별이고(愛別離苦)의 사랑은 창자가 꼬이듯 아플 것이다. 석삼년이 지나도 가슴이 텅빈채로 있다면 사랑의 상처치고는 휴유증이 너무나 심하다. 사랑은 좋은 만큼 상처도 따른다.   너무 깊이 빠지면 헤어나기 쉽지 않으며, 상사병은 병 가운데 사실 속앓이의 무서운 병이 아닐까 싶다.   아프지만 의사가 필요없는 홍역같은 병이다. 이는 세상이 온통 연인을 통해서 보이는 중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랑을 살짝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제목이 <붉은입술>이어서 다소 야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가사는 아주 시적이다. 여러번 저작(咀嚼)하듯 많이 들어야 가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연인을 마치 계륵(鷄肋)처럼 여기거나 아니면 다른 상대와 조건을 비교하는 못 된 버릇이 있다면 상처를 남기게 된다. 필자는 그런 일은 罪業으로 여기고 싶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에도  아무리 장수시대라 하지만 인생은 너무나 짧다. 사랑은 몰래하는 불륜이라 할지라도  아름답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자체가 윤리보다 먼저인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입시울(입술의 고어)이 부릅트더라도 흔적마저 아름답기 짝이 없을 것이다. 거울을 자꾸 볼 수 밖에 없는 <붉은입술>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남긴 흔적이지만 연인으로 인한 것이니 소중하다. 그리고 거울을 자주 보는 여자는 생각도 깊다. 인간이 유독 입술의 피부만 다르다. 소음순(小陰脣)을 <작은 입술>로 부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이 든다. 순은 입술脣字를 쓴다. 따라서 여성은 방어차원에서 립스틱을 바르기 마련이다. 아마 원시인들도 미적인 감각이 있었으니 입술에 치장을 하였다고 한다. 아프리카에는 입술이 길게 늘어지면 미인이라 한다. 이목구비가 얼굴에 있지만 입만큼 다양한 기능을 하는 곳은 없다. 구업죄나 설화(舌禍)도 입으로 빚어진다. 그러나 붉은 입술은 그냥 시적인 표현으로 보고싶다.   아무리 붉다고 하더라도 무죄가 아닐까?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한때 크게 유행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아마 가수 임주리는 노래를 너무나 많이 불러서 입술이 주리를 틀듯 아프지 않았을까 싶다. 여성의 입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때로는 상처를 주긴 하지만 붉은 입술은 설사 죄가 따른다고 하여도 무죄임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9-09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3]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ᆢ
    이경국 칼럼니스트   가을을 대표하는 곤충은 고추잠자리와 귀뚜라미일 것이다. 귀뚜라미를 본지 오래 되었다. 우는 소리를 들은 지도 좀 된듯 싶다. 매미의 간절한 절규의 울음소리가 그치면 귀뚜라미 세상이다. 낮에는 고추잠자리의 공중 유희가 펼쳐지고 밤에는 귀뚜라미가 지붕아래 처막에서 울거나 아니면 부뚜막에서 울어댄다. 수컷의 소리이다. '귀뚤귀뚤'로 들리다가 '또르르 또르르'로 들리기도 하니 표음문자가 대단한 한글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의성어와 의태어는 한글이 세계의 모든 언어가운데 최고일 것이다. 귀뚜라미는 이름자체가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몇 년전에는 용하게도 방으로 들어 왔었는데 요즘은 잘 보이질 않는다. 어쩌다가 마당에서는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귀뚜라미는 역시 시골에서 우는 소리를 들어야 정겹고 어울린다. 짝을 부르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곤충은 제 철에 임을 만나지 못하면 한 철을 독신으로 보내다가 그만 죽어 버린다. 대표적인 곤충이 수컷 매미이다. 여치, 매미, 귀뚜라미도 제철에 태어나서 목청을  다하여 울다가 생을 마친다. 대를 이을 수 있도록 암컷을 만나 교미를 하면 짧은 대장정의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 새끼들이 다음 해에 본성에 의하여 또 울다가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귀뚜라미는 흑갈색이다. 가을밤을 대표하는 곤충임이 틀림이 없다. 인간의 심성이 자꾸만 독해지니 자연도 따라서 순함을 잃게 된다. 이제는 제비도 오지를 않고 고추잠자리는 개체수가 적어서 보호곤충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가을밤 외로운밤 벌레우는 밤>이 좋은데 그 벌레인 귀뚜라미가 침묵을 하는지 요즘 도통 전처럼 보이질 않는다. 가을은 뭐니뭐니 해도 필자는 '서글픈 계절'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귀뚜라미는 시골의 초가집  문지방 아래에서 울어야 제격이다. 귀뚜라미가 울면 남자는 우수에 젖는다. 시집간 또레의 갑순이 생각이 난다. 남의 아내 되어 자식낳고 살아 가지만 귀뚜라미 울어대는 가을밤에는 그녀도  소싯적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문밖 하늘 휘영청 가을달이 유난히 밝은 밤엔 도회로 나간 열 아홉살 순이가 몹시 그립던 소시절이 있었다. 도회에서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사라져 버렸지만 귀뚜라미 보일러는 요란하게 움직이는 세상이다. 공중곡예의 명수인 제비를 보지 못하니 흥부와 놀부의 박을 타는 전설같은 얘기도 사라져 버렸다. 맑은 가을하늘엔 고추잠자리가 무리를 지어 비행하는 모습이 좋았는데 지금은 볼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초등학교 때는 여름방학이면 곤충채집 숙제가 있었다. 채집통에 장수잠자리, 방아개비 그리고 암컷 매미를 잡아서 진열하면 참으로 보기에도 좋았다. 매케한 냄새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철들어 생각해 보니 살아 있는 곤충을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서는 곤충에게 먹이를 주면서 관찰하는데 우리나라는 잡아서 채집을 하였으니 수준이 그러했던 것이다. 주위에 사라져가는 것들이 많다. 안타깝지만 자연훼손의 주범은 인간이기에 도리가 없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듣기 귀해진 세상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9-02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2] 다원주의 종교관
    이경국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는 당연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이는 헌법상으로도 그러하다. 필자의 여러 카톡팬도 정말 종교가 다양하다. 대체로 그들의 종교를 알고 있기에 그와 상응하는 글을 전하도록 애쓰고 있는 편이다. 특히 불자들에게는 불경의 짧은 경구를 보내 드리고 있다. 팔만사천경은 經의 이름조차 생소하여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각자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5인가족이 다섯 종류의 신을 믿는 것이 종교의 자유가 아닐 것이다. 개신교를 믿는다면 교회에 나가는 시간이 다르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어떤 종교이든 분파가 되어 사이비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휴거를 믿거나 수혈을 거부하거나 재산을 다 바친다거나 교리에 집착하여 마음의 문을 닫는 종교인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신이 들린듯 교주에게 몸을 바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종교의 근본을 모르는 맹신적 사고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宗敎, religion)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배움이나 믿음의 가장 꼭대기 (용마루)란 뜻이다. 내세의 좋은데 간다는 것은 현세의 방편(方編) 으로 여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장례식장에서 부모의 시신을 놓고 형제간에 종교의 갈등으로 반목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면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는 말인가? 북한은 공산독재국이지만 종교가 있다. 유일신인 <수령교>이다. 곧 망하게 되어 있는 처지인데 남한의 수많은 수령교 광신자의 몰골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필자는 호기심이 강한 편이어서 소위 원시종교부터 현대의 고급종교까지 섭렵하다시피 살펴본 적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종교의 특성상 자기가 믿는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만 상대의 종교를 배타적으로 여기는 도그마에 빠지기 십상인 현실이 아닐까 싶다. 사이비나 이단이라 여기는 종교도 살펴 보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가 믿으신 칠성이나 영두할미도 좋다는 생각이다. 어머니께서는 음력 2월에는 정한수를 장독위에 올리시고 연신 비셨다. 어머니의 안녕을 위한 기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7남매가 무사하길 간절히 비는 모습이셨다. 필자는 어머니 생존시에도 지금도 종교가 <어머니>이다. 창조나 제조를 떠나서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지구상에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고 어떻게 본질을 따질 수가 있으며, 죽은 후를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자기 종교만이 사후세계를 보장한다면 지금 80억 명의 지구상의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은 각기 다르기 마련일 것이다. 부부사이의 둘만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여 절반이 넘게 이혼을 하는 세상이다. 피의 목욕탕이라 불리어지는 전쟁도 끊임이 없다. 영토분쟁보다 무역전쟁이 더 심하다. 이 보다 종교전쟁이 훨씬 더 많다. 종교가 아예 없으면 전쟁이 줄어 든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필자는 성지(聖地)때문에 발생하는 전쟁이나 많은 신도들이 사망하는 경우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유와 평화를 근간으로 하지 않는다면 이미 종교의 근본을 상살했다고 보아야 한다. 창조란 용어도 인간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언어나 문자에 의한 깨달음에는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직지인심 (直指人心)이나 중국의 선불교에서 강조한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없이 너그럽지 못하면서 지옥을 들먹이거나 아니면 마귀로 혼탁하게 하는 행위자체가 죄업을 짓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종교문화에 따른 상대의 이해를 높혀야 할 것이다. 음식문화가 나라마다 다를진데 자기나라의 음식만을 주장하는 모순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도 수저나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민족이 많다. 氣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식사법인데 원시적 이라고 치부한다면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세계가 하나의 종교만을 강조한다면 숨이 막히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랍권은 일부일처에 적응하기도 힘들 것이며, 수시로 전쟁도 불사할지 모를 일이다. 종교에 자유가 없다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본다. 따라서 자기의 종교가 중요하듯 타인의 종교도 그러하다. 역지사지란 고사성어가 그냥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8-26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1] 타지마할 묘--관광의 비애
    이경국 칼럼니스트   인도의 북부 아그라 지역에 인류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지마할 묘가 있다. 당연히 인도의 유명관광 명소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인 사 자한과 그의 왕후의 무덤이다. 사 자한은 영토확장을 위한 원정길에 부인을 대동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만큼 사랑을 했으니 무덤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이는 고려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사랑한 것과 거의 닮았다는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만삭인 문다프 마할 왕비는 막사에서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전장의 의료시설은 낙후 되었을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타지마할 묘를 완공하고 난 후에는 공사에 가담한 인부들의 손목을 다  짤라 버리도록 명령한 시대의 아픔이 있었다.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을까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불멸하고자 불로초를 구하게 했던 진시왕도 백성의 아픔을 모르면서 영화를 누리려 한 자이다. 분서갱유 (焚書坑儒)만 하더라도 역사에 영구히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기가 부인을 사랑했다고 백성에게 죽을 고생을 시키는 작태는 인문학 수준이 낮은 독재자의 전형이다.   이집트의 피라미트도 영생을 기원하는 무덤이다. 건축기술이 불가사의하다. 흑인을 일일 3교대로 공사를 시켰는데 양파를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 10만명의 인부가 20년 동안 건축하여 완성시킨 피라미드였다. 2.5톤짜리 돌이 230만 개나 필요했으니 상상을 초월한다. 다만 그 안에는 섞지 않는 <히란야>라는 빛을 발하고 있으니 아마 신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타지마할은 아름다운 대리석의 명품이고 역작이지만 김정숙이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여행삼아 세금을 물쓰듯 하면서 다녀와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모습이 꼴불견이고 역겹다. 무덤은 퇴계선생이나 드골처럼 본봉을 작게 만들어 소박한 정신을 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역사의 자랑일 것이다. 무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정신이 중요하다. 인도의 야쇼카 왕은 영토를 통일한 후 전쟁때 사용했던 무기로 쟁기를 만들고 평화를 구가하는 시대를 열었다. 부처님 입멸후 사리 (舍利)를 8나라에 모시게 했는데 이를 회수하여 8만4천 사리탑에 배분하여 모시게 했던 것이다. 한 나라의 사리는 그대로 두었다고 기록에 있다. 청평의 聖地에는 타지마할 묘 못지 않는 아름다운 대리석 궁이 있다.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초종교를 근간으로 참부모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매장의 풍습이 사라지면서 화장중심으로 바뀌어 간다. 조상의 산소를 가볍게 여기면서 부모의 은공을 소홀히 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어머니를 종교로 여기는 마음이 바탕으로 되어 있는 가정은 번창한다는 것이 필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타지마할에 몸치장을 하고서 싸돌아 다니는 가벼운 행동을 한 철들지 못한 國母의 탈을 쓰긴 하였지만 食母처럼 여기는 세상을 보니 안타까운 나머지 칼럼을 장황하게 써 본 것이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8-19
  • [이경국의 대구춘추 150] 제사(祭祀)문화에 대한 소고(小考)
    이경국 칼럼니스트   나라마다 전통이 있고 미풍양속이 있기 마련이다. 시대조류에 밀리어 사라져 가는 風俗이 눈에 띄게 많다. 사실 여간 아쉽지 않다. 가가호호 제사는 방식과 절차가 상이하다고 본다. 간소화 시키는 것은 몰라도 필요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당치 않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우선 나라마다 장례의 모습이 다르다. 우리 나라는 儒家의 풍습으로 매장(埋葬)을 많이 하였으나 여러 사유로 지금은 화장 (火葬)을 선호하고 있다. 나라에 따라서 조장(鳥葬), 풍장(風葬), 수장 (水葬)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그리고 무덤도 다양하다. 우리나라는 왕릉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피라미트도 능이요. 타지마할도 묘다. 영구불멸을 꿈꾸는 인간은 제정일치(祭政一治)라 하여 제사와 정치를 같게 보았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무리한 제사로 인하여 왕조가 망하기도 하였다. 나라나 개인이나 형편에 따라 제사를 지내어야 한다. 추석때는 아예 해외 관광을 떠나 버리거나 아니면 유원지 콘도에서 구입한 제수로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孝는 백행의 기본이요, 부모자식은 천륜으로 이어지기에 孝는 종교적으로도 중요하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 십계명에도 신도오계에도 강조하고 있다. 어머니 젖을 3년이나 먹었으면 돌아 가시면 3년상을 치루게 하였다. 시묘살이도 하였으며 그 정성은 대단하였다. 지금은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 당일 탈상에 부의금 배분으로 형제가 다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까마귀는 동물가운데 유일하게 어미의 공을 안다고 한다. 반포지효 (反哺之孝)는 새끼때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의 공을 잊지 않고서  자라서 어미가 나이들면 새끼 까마귀가 보은을 한다니 감동적인 모습이다. 부모님께 효를 극진히 하거나 산소를 잘 돌보는 가문이 번창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조상이 후손을 돌보는 음덕 (陰德)은 상상을 초월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불효를 하는 자가 떵떵거리는 것은 그나마 전생의 복통장의 잔고를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잔고가 바닥이 나면 걸뱅이 신세의 노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인과응보는 무시할 수가 없다고 보며, 선업선과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인연법은 묘하다. 자기 편리대로 지구에서 산다면 곤란하다. 어차피 인간이 지구와 인연을 맺었다면 <고해의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데 험로역정을 벗어나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제사를 귀찮게 여긴다면 어느 하늘에서 그런 자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聖人은 혹독한 자기 연마로 인류로부터 추앙받고 있으며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옥토가 아니고 박토(薄土)에서 이루어 낸 것이다. 따라서 생존시에는 효를 다하고 떠나신 후에는 제사를 성의껏 모시는 것이 복을 받는 지름길임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모든 나라가 조상을 숭상히 여기면서 제사를 잘 모시고 있다. 선진국은 더욱 더하다. 우리나라는 하늘을 믿었던 민족으로 제사를 잘 받들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인의 모든 종교나 의식에는 그 저변에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신이란 모름지기 인간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福과 화(禍)를 동시에 지닌 야누스의 얼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이경국 대구저널 칼럼니스트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 오피니언
    • 대구춘추
    2024-08-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