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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덕의 유럽탐방기 1] "일곱 가족 19명이 환호ㆍ아쉬움 속 유럽을 만끽"
김성덕 자유기고가 대학 선후배로 만나 결혼 후 아이들과 함께 27년 넘게 가족모임을 이어온 우리모임은 해외여행으로는 2014년 캄보디아 패키지여행(16명)을 시작으로 2015년 동유럽의 실험여행(21명)을 거쳐 2016년 유럽으로 두 번째 자유여행을 떠났다. 어른 11명,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청소년 8명으로 구성된 일곱 가족 19명은 프랑스, 이탈리아 여행의 일정을 일찍부터 조율하고, 남편 주도로 항공편, 숙소, 기차, 관광지를 예약하고 비행기 탑승권의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검색으로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12박 13일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자유여행이 흔한 게 아니어서 이렇게 7가족이, 그것도 여러 연령의 다양한 구성원이 가이드 없이 낯선 나라를 여행할 엄두를 내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개인들의 요구나 취향이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모험이었다. 구글 지도를 수백 번 검색하며 여행을 주도한 남편은 안 가보고도 여행을 다 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고등학교 때까지 아이들을 산으로 바다로 이리저리 끌고 다닌 덕분으로 아이들은 함께 가는 여행에 그저 해맑았다. 오직 여행을 계획하고 이끌어야 하는 남편만이 예민해져 유럽에서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마냥 유럽 소매치기들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는 완전 무장(정신적, 육체적)을 해야 했다. 한해 전 아이의 입시 때문에 동유럽여행을 포기했던 나로서는 여행다운 여행을 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 프랑스에서 4박 5일 2016년 12월 30일 프랑스 파리로 떠난 우리 일행은 아파트호텔 6인실에 3개팀으로 나눠 짐을 풀었다. 12월 31일 3개팀으로 나눠진 우리는 누룽지죽 등 간단한 아침을 먹고 초간단 도시락을 싸서 지하철을 타고 오전부터 베르사유궁전을 하루 종일 뛰어다녔고 오후 5시쯤에야 샹젤리제 거리에 도착했다.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인다는 샤이요궁에서 안개가 가득 낀 저녁의 에펠탑은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그 거대한 철제건물이 아름답게 느껴질 줄이야.. 주변에는 에펠탑모형 등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호객행위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연신 스미마셍~하며 장난을 쳤는데 ”에~ 한국사람이잖아요, 한국에 공부하러 갔었어요. 한국말 알아요“하던 흑인청년과 반가워하며 한국얘기를 즐겁게 나누었던 생각이 난다. 프랑스 개선문까지 한 해 마지막 날이라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인파 속에 광장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그 거대한 흐름 속에 다가올 새해에 대한 희망과 즐거움으로 환호하며 유럽을 만끽했다. 12월 31일 개선문을 보며 파리 샹젤리제 축제의 현장에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셔터를 눌러대자 한 외국인은 본인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한해의 마지막을 즐기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갑자기 울컥할 만큼 모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개선문이 있는 샹젤리제 거리는 완전히 개방됐지만 검문 때문에 술과 무기류는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우리의 애주가 K선배는 개선문으로 가는 거리 축제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와인을 선택함으로써 축제행렬의 주변인이 되었다. 그해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유럽한파로 추운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고 아이들을 포함한 일행들과 합류해 숙소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에 새해로 이어지는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12월 마지막날 지하철이 무료인 걸 모르고 시내로 갈 때는 요금을 계산했고 숙소로 돌아올 때는 차표 없이 돌아왔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과 화려한 불꽃놀이, 레이저 쇼를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와인과 야식, 다음 날 아침, 점심 먹을거리를 사며 우리 일행만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며 파리에서의 밤을 와인과 이야기로 보낸 게 오래도록 기억난다. 각 집 여성들의 문화적 욕구가 충만했기에 일정은 미술관, 박물관, 문화공간을 최대한 가보는 것으로 코스를 잡았다. 여행 셋째날은 콩코드광장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 퐁네프의 다리 등 센강 주변과 오르세미술관(오르세미술관은 새해연휴로 무료였다), 퐁피두 문화센터(외형과 1층만 구경), 센강 유람선까지 너무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 탓에 셋째날 밤은 각 구성원의 불만이 폭주해 ‘이건 자유여행이 아니다. 패키지와 뭐가 다른지’에 대한 고민으로 여행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방향을 밤늦도록 격렬히 토로하며 이글이글 불타는 토론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 와중에 피곤에 절어 쓰러진 아이들을 다독여 C군(우리집 둘째)의 생일 축하까지 정말 다채롭고도 열정적 밤을 보냈다. 이미 짜여진 일정 속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자유여행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던 우리는 일정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정을 조금 수정하되 굴직한 일정을 보고 합류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모았다. 넷째날, 일부는 콩코드 광장 일대와 센강변을 지나 노트르담 성당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며 오전을 보냈고 일부는 ‘프랑스에 왔는데 몽마르뜨 언덕은 봐야지’ 하며 몽마르뜨로 향했다. 일부는 너무 힘들다며 오전을 숙소에 머물렀고 오후에 루브르박물관으로 합류해 함께 일정을 보냈다. 여러 그림과 조각의 홍수 속에서도 오르세미술관에서 본 밀레의 ‘만종’은 책에서 느낄 수 없었던 고즈넉함에 형언할 수 없는 숙연함을 느낀 것 같다. 아이들의 불만과 반항?도 잦아들었고 나름 각 가정의 요구에 부합한 자유여행이 잡혀가는 듯 했다. 새해 파리의 날씨는 몇십 년 만의 한파가 들이닥치면서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한국보다 더 추운 추위와 싸워야 했다. 유럽한파를 미처 예상못한 우리는 한국서 가지고 온 옷이란 옷은 모두 겹쳐 입고 노숙인 모드로 다녀야 할 정도로 유럽한파를 경험해야 했고 하의로 달랑 바지 하나와 외투만 갖춰 입은 남자아이들은 입을 달달 떨 정도로 한파는 대단했다. 베르사유 정원의 살얼음 낀 넓은 숲은 한파로 일부 관광이 금지됐고 그렇게 둘러보는 정원도 무지 넓어 함께 발돋움을 하며 정원을 뛰어다녔다. 분수가 얼어 고드름이 돼 흘러내리던 그 추운 날의 콩코드광장의 아름다운 분수가 오래도록 파리의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다. 혼자만의 여유로움은 생각할 수 없이 대식구들은 밥을 먹어야 했고 함께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면 고난의 행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장실을 찾느라 또 사람을 챙기느라 또 길을 찾느라 고생 가득한 여행이기도 했지만 집집마다의 새로운 사연과 에피소드들이 생산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진한 연대의 여행이기도 했다. 하루종일 머물러도 한도 끝도 없는 루브르박물관의 그림과 조각의 홍수를 끝으로 ‘교과서에서 본 그림을 직접 보니 너무 신기하다’ ‘평생 봐야할 그림을 다 본 것 같다’ ‘그림에 감동한 건 처음이다’ ’너무 많은 그림과 조각으로 이제 그림이 지긋지긋하다‘는 각자의 평가를 끝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건너갔다. ■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1박 2일 프랑스에서 4박을 하고 5일째 파리 드골공항을 떠나 베니스 마르코폴로 공항에 도착했을때의 일이었다. A의 케리어가 없다는 거였다. 드골공항 비행기 탑승과정에서 어렵게 구한 비건화장품(동물성원료가 없는 화장품)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맨붕상태로 탑승하면서 공항에 케리어를 두고 온 것이다. 파리 드골공항에 전화를 해 알아봐 줄 것을 요청하고 A는 준비해 간 짐이 없는 상태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결국 케리어는 찾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드골공항 응급센터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급격히 몸이 안 좋아져 기진맥진한 상태로 겨우 베니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일정이 무리였던 게 틀림없다. 너무나 다행인 것이 베니스의 날씨와 분위기는 파리의 것과 완전 달랐다. 밝고 화사하고 산뜻하고 따뜻한 느낌~~ . 베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선착장 휴게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상버스를 타고 숙소인 고르테 노바에 도착했다. 숙소가 마음에 들어 빨간 지붕이 끝없이 보이는 3층 창문에서 하늘과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동화 속 소녀가 된 듯 가슴이 설레었다. 일부는 주변 산책과 장을 보러 나갔고 나는 숙소에 남아 휴식을 취했다. 어릴 때부터의 징크스인지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꼭 하루 이틀 아프다. 내 몸은 변화에 적응이 늦나 보다. 일행 중 일부가 숙소에 늦게 도착하게 되면서 아이들 저녁을 간단하게 해먹이고 우리 일행은 부라노섬으로 들어갔다. 배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해지는 풍경이 어찌나 고즈넉하고 예쁘던지 이국의 저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하고 오밀조밀한 예쁜 집들과 섬을 둘러보며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려 할 때엔 금방 어두워져 어두운 사진만 남았다. 기념으로 가면모형 자석을 두어개 사고 낮이었다면 더 예뻤을 섬을 아쉬워 하며 발길을 돌렸다. 담에 다시 오리라 생각하며.. 다음날 일부는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일부는 부라노섬을 둘러보고 산마르코 광장에 모이기로 했다. 남편은 전날 숙소를 찾지 못해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을 챙기느라 놓친 부라노섬으로 들어가고 우리 일행은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갔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간 성당은 화려했고 프랑스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과는 또 다르게 동양적 느낌도 묻어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석으로 꾸며진 내부의 작은 박물관도 둘러보며 기념으로 묵주를 하나 샀다. 일행과 합류한 우리는 오랜만에 식당에서 제대로 된 점심을 먹고 가면공예와 유리공예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리알토다리, 탄식의 다리를 찾아다녔다. 곤돌라를 구경하며 여유있게 이리저리 구경하다 피렌체로 가기 위해 약속한 수상버스 정류장에 집결할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정을 총괄하고 있던 남편의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을 보며 얼른 기다리던 대열에 합류했는데 그렇게 흩어진 아이들과 일행이 다 모이기까지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수상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예약해 놓은 피렌체행 열차(이딸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기차역까지 대부대가 얼마나 뛰었던지... 케리어와 일행들의 숨가뿐 달음박질 속에 베니스가 흔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베니스에 작별을 고할 틈도 없이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우리는 달렸다. :: 김성덕 자유기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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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탐방기] 장릉, 청령포,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와서...
지난 24일 사단법인 서울문화사학회에서 주최한 9월 문화유적답사에 함께 했다. 장릉, 청령포, 김삿갓 유적지를 둘러보는 코스였다. 일행은 강원도 영월지역으로 향했다. 이번이 제 338차 답사이니 연륜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필자는 평소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한 글을 많이 쓴 편이다. 단종은 세계 3대 애사의 한 주인공이다. 17살에 먼 영월 청령포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른쪽이 필자 이경국 칼럼니스트 단종의 비 정순왕후 宋氏는 정업원 내에 기거하면서 매일 인근 동망산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다 보면서 단종의 명복을 기원하셨다. 후세에 그곳에 東望亭이란 정자를 지어서 기념하고 있다. 청룡사 마루바닥이 닳도록 불공을 드리면서 83세까지 살았으니 가장 짧게 산 단종에 비하여 정순왕후는 가장 장수한 왕비셨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청령포, 박담사, 청송 교도소는 소위 한국의 빠삐용이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다. 세조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정적을 죽이면서 꿈자리가 어지러워 쉰을 넘기자 생을 마감하고 국립수목원내 광릉에 잠들어 있다. 이곳은 정희왕후 윤씨와 동원이강(同原異降)형태의 능이다. 단종은 그를 따르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충신을 남겼다. 사육신은 김문기가 포함되어 사칠신으로 역사를 바로 잡은지가 얼마되지 않는다. 지금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사칠신이 잠들어 있다. 유일하게 박팽년과 김문기는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슬픔과 아픔이 클수록 국민의 가슴에 크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조선왕조 27왕 517년 역사에서 단종이 가장 비극의 왕이다. 그러나 짧은 재위였지만 그는 억지 상왕(?)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은 무덤에서도 피눈물을 흘렸을지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극도의 잔인한 일이다. 죽어서도 화탕지옥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고 본다. 다행히 단종은 장릉에 묻히어 천하의 명당에서 사후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여주의 세종대왕의 영릉과 함께 최고의 명당이라는 평이다. 1999년 남양주문화원에서 단종비 사릉(思陵)주위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영월의 장릉 부근에 심어 '정령송 (精靈松)이란 이름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감회가 인다. 차라리 '合宮松'으로 단종부부의 원을 풀어 드렸으면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남한에 있는 40기의 조선왕릉 가운데 단종의 장릉이 가장 먼 거리다. 정순왕후와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재왕나무인 소나무를 가까이 옮겨서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룡사 내의 우화루(雨花樓)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청계천 영도교를 건너면서 눈물의 작별로 영원한 이별을 했뎐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청령포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7세 단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관음송은 600년의 수령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소나무이다. '觀音'은 소리는 들어야 되겠지만 단종의 우는 모습을 소나무가 보았다는 뜻이니 관세음보살이 연상되어 진다. 단종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한 살 위 정순왕후 뿐이었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돌을 쌓은 망향탑이 있다. 단종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돌을 쌓은 망향탑과 필자 일행은 그 작은 돌탑을 보고 숙연함을 느꼈다. 단종은 왕이긴 하였지만 요즘으로는 사춘기인 미소년의 나이였다. 얼마나 부인 정순왕후를 그리워 했을까를 생각하니 숙연해지면서 눈물이 흐른다. 필자는 東望亭에 올라서도 정순왕후의 기구한 팔자와 남편 단종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에 여러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짧은 생이었지만 픽션과 논픽션을 가미한 단편소설을 써 보고 싶기도 하다. 점심은 영월의 별미 보리밥으로 38명의 일행이 꿀맛을 음미하였다. 김삿갓 유적비 그리고 방랑시인이요, 천재시인이요, 기인이요, 기발한 발상을 쏟아 낸 난고(蘭皐) 김삿갓의 유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먼저 김삿갓묘역으로 향했다. 氣의 힘이 왕성함을 느꼈다. 그는 35년을 삿갓을 쓰고 전국을 유랑하다기 전라도 화순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여곡절끝에 김삿갓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이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하늘을 가려 삿갓을 쓰고 평생을 살았으나 차마 고향에는 죄스럽고 미안하여 한번도 발길을 돌릴수가 없었을 것이다. 죽고나서 3년이나 지나서 고향으로 돌아 왔으니 조상과 후손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삿갓은 벗긴 했지만...... 그러나 그는 시인의 최고경지인 詩仙이라 불리어 지는 우리나라 유일한 시인이다. 중국도 이백에게만 시선이라 칭하고 있다. 차의 최고는 초의선사이시다. 선사는 스님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다. 시선은 함부로 붙힐 수 없는 시의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이백과 김삿갓은 방랑의 시인이다. 어쩌면 대자유를 구가한 詩心 으로 한 생을 살았던 분들이다. 시성은 더러 존재한다. 두보도 있고 영국의 낭만시인 워드워스도 있다. 우선 이문열의 장편소설 '시인'을 권하고 싶다. 기왕 제목을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했으면 하는 필자 나름의 아쉬움이 따른다. 김삿갓은 本이 안동김씨로 역사적인 스토리는 여기서 생략한다. 다만 지금 시대의 시인이었다면 노벨문학상은 따놓은 당상이 아닐까 싶다. 김삿갓 문학관을 들러보고 야외의 넓직한 곳에 둘러앉아 본회 회윈이시고 한국문인협회 만조시분과 회장이신 김진중님으로 부터 김삿갓에 대한 설명의 시간이 있었다. 평생을 김삿갓에 대한 연구로 정말 해박하신 식견에 감탄이 일었다. 동향인으로 투박한 경음의 발음은 오히려 매력으로 들리어왔다. 살아 흩어져 있던 모든 시는 이곳에 모아져서 벌써 제25회 김삿갓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돌에 새겨진 많은 시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죽어 이름이 빛나는 위대한 우리민족의 자산인 감삿갓이여! 오늘의 답사 일정을 마치고 버스는 상경행 길을 서둘러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정효 회장님, 원흥식 답사위원장님 그리고 동참하신 모든 회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산새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귀가길을 재촉하였다. :: 칼럼니스트 / 海垣 이경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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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덕의 유럽탐방기 1] "일곱 가족 19명이 환호ㆍ아쉬움 속 유럽을 만끽"
- 김성덕 자유기고가 대학 선후배로 만나 결혼 후 아이들과 함께 27년 넘게 가족모임을 이어온 우리모임은 해외여행으로는 2014년 캄보디아 패키지여행(16명)을 시작으로 2015년 동유럽의 실험여행(21명)을 거쳐 2016년 유럽으로 두 번째 자유여행을 떠났다. 어른 11명,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청소년 8명으로 구성된 일곱 가족 19명은 프랑스, 이탈리아 여행의 일정을 일찍부터 조율하고, 남편 주도로 항공편, 숙소, 기차, 관광지를 예약하고 비행기 탑승권의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검색으로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12박 13일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자유여행이 흔한 게 아니어서 이렇게 7가족이, 그것도 여러 연령의 다양한 구성원이 가이드 없이 낯선 나라를 여행할 엄두를 내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개인들의 요구나 취향이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모험이었다. 구글 지도를 수백 번 검색하며 여행을 주도한 남편은 안 가보고도 여행을 다 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고등학교 때까지 아이들을 산으로 바다로 이리저리 끌고 다닌 덕분으로 아이들은 함께 가는 여행에 그저 해맑았다. 오직 여행을 계획하고 이끌어야 하는 남편만이 예민해져 유럽에서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마냥 유럽 소매치기들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는 완전 무장(정신적, 육체적)을 해야 했다. 한해 전 아이의 입시 때문에 동유럽여행을 포기했던 나로서는 여행다운 여행을 한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 프랑스에서 4박 5일 2016년 12월 30일 프랑스 파리로 떠난 우리 일행은 아파트호텔 6인실에 3개팀으로 나눠 짐을 풀었다. 12월 31일 3개팀으로 나눠진 우리는 누룽지죽 등 간단한 아침을 먹고 초간단 도시락을 싸서 지하철을 타고 오전부터 베르사유궁전을 하루 종일 뛰어다녔고 오후 5시쯤에야 샹젤리제 거리에 도착했다.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인다는 샤이요궁에서 안개가 가득 낀 저녁의 에펠탑은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그 거대한 철제건물이 아름답게 느껴질 줄이야.. 주변에는 에펠탑모형 등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호객행위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연신 스미마셍~하며 장난을 쳤는데 ”에~ 한국사람이잖아요, 한국에 공부하러 갔었어요. 한국말 알아요“하던 흑인청년과 반가워하며 한국얘기를 즐겁게 나누었던 생각이 난다. 프랑스 개선문까지 한 해 마지막 날이라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인파 속에 광장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그 거대한 흐름 속에 다가올 새해에 대한 희망과 즐거움으로 환호하며 유럽을 만끽했다. 12월 31일 개선문을 보며 파리 샹젤리제 축제의 현장에 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셔터를 눌러대자 한 외국인은 본인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한해의 마지막을 즐기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갑자기 울컥할 만큼 모두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개선문이 있는 샹젤리제 거리는 완전히 개방됐지만 검문 때문에 술과 무기류는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우리의 애주가 K선배는 개선문으로 가는 거리 축제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와인을 선택함으로써 축제행렬의 주변인이 되었다. 그해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유럽한파로 추운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고 아이들을 포함한 일행들과 합류해 숙소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에 새해로 이어지는 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12월 마지막날 지하철이 무료인 걸 모르고 시내로 갈 때는 요금을 계산했고 숙소로 돌아올 때는 차표 없이 돌아왔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과 화려한 불꽃놀이, 레이저 쇼를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와인과 야식, 다음 날 아침, 점심 먹을거리를 사며 우리 일행만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며 파리에서의 밤을 와인과 이야기로 보낸 게 오래도록 기억난다. 각 집 여성들의 문화적 욕구가 충만했기에 일정은 미술관, 박물관, 문화공간을 최대한 가보는 것으로 코스를 잡았다. 여행 셋째날은 콩코드광장을 거쳐 노트르담 성당, 퐁네프의 다리 등 센강 주변과 오르세미술관(오르세미술관은 새해연휴로 무료였다), 퐁피두 문화센터(외형과 1층만 구경), 센강 유람선까지 너무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 탓에 셋째날 밤은 각 구성원의 불만이 폭주해 ‘이건 자유여행이 아니다. 패키지와 뭐가 다른지’에 대한 고민으로 여행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방향을 밤늦도록 격렬히 토로하며 이글이글 불타는 토론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 와중에 피곤에 절어 쓰러진 아이들을 다독여 C군(우리집 둘째)의 생일 축하까지 정말 다채롭고도 열정적 밤을 보냈다. 이미 짜여진 일정 속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자유여행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던 우리는 일정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정을 조금 수정하되 굴직한 일정을 보고 합류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모았다. 넷째날, 일부는 콩코드 광장 일대와 센강변을 지나 노트르담 성당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며 오전을 보냈고 일부는 ‘프랑스에 왔는데 몽마르뜨 언덕은 봐야지’ 하며 몽마르뜨로 향했다. 일부는 너무 힘들다며 오전을 숙소에 머물렀고 오후에 루브르박물관으로 합류해 함께 일정을 보냈다. 여러 그림과 조각의 홍수 속에서도 오르세미술관에서 본 밀레의 ‘만종’은 책에서 느낄 수 없었던 고즈넉함에 형언할 수 없는 숙연함을 느낀 것 같다. 아이들의 불만과 반항?도 잦아들었고 나름 각 가정의 요구에 부합한 자유여행이 잡혀가는 듯 했다. 새해 파리의 날씨는 몇십 년 만의 한파가 들이닥치면서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한국보다 더 추운 추위와 싸워야 했다. 유럽한파를 미처 예상못한 우리는 한국서 가지고 온 옷이란 옷은 모두 겹쳐 입고 노숙인 모드로 다녀야 할 정도로 유럽한파를 경험해야 했고 하의로 달랑 바지 하나와 외투만 갖춰 입은 남자아이들은 입을 달달 떨 정도로 한파는 대단했다. 베르사유 정원의 살얼음 낀 넓은 숲은 한파로 일부 관광이 금지됐고 그렇게 둘러보는 정원도 무지 넓어 함께 발돋움을 하며 정원을 뛰어다녔다. 분수가 얼어 고드름이 돼 흘러내리던 그 추운 날의 콩코드광장의 아름다운 분수가 오래도록 파리의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다. 혼자만의 여유로움은 생각할 수 없이 대식구들은 밥을 먹어야 했고 함께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면 고난의 행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장실을 찾느라 또 사람을 챙기느라 또 길을 찾느라 고생 가득한 여행이기도 했지만 집집마다의 새로운 사연과 에피소드들이 생산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진한 연대의 여행이기도 했다. 하루종일 머물러도 한도 끝도 없는 루브르박물관의 그림과 조각의 홍수를 끝으로 ‘교과서에서 본 그림을 직접 보니 너무 신기하다’ ‘평생 봐야할 그림을 다 본 것 같다’ ‘그림에 감동한 건 처음이다’ ’너무 많은 그림과 조각으로 이제 그림이 지긋지긋하다‘는 각자의 평가를 끝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건너갔다. ■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1박 2일 프랑스에서 4박을 하고 5일째 파리 드골공항을 떠나 베니스 마르코폴로 공항에 도착했을때의 일이었다. A의 케리어가 없다는 거였다. 드골공항 비행기 탑승과정에서 어렵게 구한 비건화장품(동물성원료가 없는 화장품)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맨붕상태로 탑승하면서 공항에 케리어를 두고 온 것이다. 파리 드골공항에 전화를 해 알아봐 줄 것을 요청하고 A는 준비해 간 짐이 없는 상태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결국 케리어는 찾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드골공항 응급센터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급격히 몸이 안 좋아져 기진맥진한 상태로 겨우 베니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의 일정이 무리였던 게 틀림없다. 너무나 다행인 것이 베니스의 날씨와 분위기는 파리의 것과 완전 달랐다. 밝고 화사하고 산뜻하고 따뜻한 느낌~~ . 베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선착장 휴게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상버스를 타고 숙소인 고르테 노바에 도착했다. 숙소가 마음에 들어 빨간 지붕이 끝없이 보이는 3층 창문에서 하늘과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동화 속 소녀가 된 듯 가슴이 설레었다. 일부는 주변 산책과 장을 보러 나갔고 나는 숙소에 남아 휴식을 취했다. 어릴 때부터의 징크스인지 멀리 여행을 가게 되면 꼭 하루 이틀 아프다. 내 몸은 변화에 적응이 늦나 보다. 일행 중 일부가 숙소에 늦게 도착하게 되면서 아이들 저녁을 간단하게 해먹이고 우리 일행은 부라노섬으로 들어갔다. 배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해지는 풍경이 어찌나 고즈넉하고 예쁘던지 이국의 저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하고 오밀조밀한 예쁜 집들과 섬을 둘러보며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려 할 때엔 금방 어두워져 어두운 사진만 남았다. 기념으로 가면모형 자석을 두어개 사고 낮이었다면 더 예뻤을 섬을 아쉬워 하며 발길을 돌렸다. 담에 다시 오리라 생각하며.. 다음날 일부는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일부는 부라노섬을 둘러보고 산마르코 광장에 모이기로 했다. 남편은 전날 숙소를 찾지 못해 합류하지 못한 사람들을 챙기느라 놓친 부라노섬으로 들어가고 우리 일행은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갔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간 성당은 화려했고 프랑스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과는 또 다르게 동양적 느낌도 묻어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석으로 꾸며진 내부의 작은 박물관도 둘러보며 기념으로 묵주를 하나 샀다. 일행과 합류한 우리는 오랜만에 식당에서 제대로 된 점심을 먹고 가면공예와 유리공예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리알토다리, 탄식의 다리를 찾아다녔다. 곤돌라를 구경하며 여유있게 이리저리 구경하다 피렌체로 가기 위해 약속한 수상버스 정류장에 집결할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정을 총괄하고 있던 남편의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을 보며 얼른 기다리던 대열에 합류했는데 그렇게 흩어진 아이들과 일행이 다 모이기까지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수상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예약해 놓은 피렌체행 열차(이딸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기차역까지 대부대가 얼마나 뛰었던지... 케리어와 일행들의 숨가뿐 달음박질 속에 베니스가 흔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베니스에 작별을 고할 틈도 없이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우리는 달렸다. :: 김성덕 자유기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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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덕의 유럽탐방기 1] "일곱 가족 19명이 환호ㆍ아쉬움 속 유럽을 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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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탐방기] 장릉, 청령포,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와서...
- 지난 24일 사단법인 서울문화사학회에서 주최한 9월 문화유적답사에 함께 했다. 장릉, 청령포, 김삿갓 유적지를 둘러보는 코스였다. 일행은 강원도 영월지역으로 향했다. 이번이 제 338차 답사이니 연륜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필자는 평소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한 글을 많이 쓴 편이다. 단종은 세계 3대 애사의 한 주인공이다. 17살에 먼 영월 청령포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른쪽이 필자 이경국 칼럼니스트 단종의 비 정순왕후 宋氏는 정업원 내에 기거하면서 매일 인근 동망산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다 보면서 단종의 명복을 기원하셨다. 후세에 그곳에 東望亭이란 정자를 지어서 기념하고 있다. 청룡사 마루바닥이 닳도록 불공을 드리면서 83세까지 살았으니 가장 짧게 산 단종에 비하여 정순왕후는 가장 장수한 왕비셨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청령포, 박담사, 청송 교도소는 소위 한국의 빠삐용이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다. 세조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정적을 죽이면서 꿈자리가 어지러워 쉰을 넘기자 생을 마감하고 국립수목원내 광릉에 잠들어 있다. 이곳은 정희왕후 윤씨와 동원이강(同原異降)형태의 능이다. 단종은 그를 따르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충신을 남겼다. 사육신은 김문기가 포함되어 사칠신으로 역사를 바로 잡은지가 얼마되지 않는다. 지금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사칠신이 잠들어 있다. 유일하게 박팽년과 김문기는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슬픔과 아픔이 클수록 국민의 가슴에 크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조선왕조 27왕 517년 역사에서 단종이 가장 비극의 왕이다. 그러나 짧은 재위였지만 그는 억지 상왕(?)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은 무덤에서도 피눈물을 흘렸을지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극도의 잔인한 일이다. 죽어서도 화탕지옥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고 본다. 다행히 단종은 장릉에 묻히어 천하의 명당에서 사후는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여주의 세종대왕의 영릉과 함께 최고의 명당이라는 평이다. 1999년 남양주문화원에서 단종비 사릉(思陵)주위의 소나무 한 그루를 영월의 장릉 부근에 심어 '정령송 (精靈松)이란 이름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감회가 인다. 차라리 '合宮松'으로 단종부부의 원을 풀어 드렸으면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남한에 있는 40기의 조선왕릉 가운데 단종의 장릉이 가장 먼 거리다. 정순왕후와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재왕나무인 소나무를 가까이 옮겨서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룡사 내의 우화루(雨花樓)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청계천 영도교를 건너면서 눈물의 작별로 영원한 이별을 했뎐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되었다. 청령포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17세 단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관음송은 600년의 수령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소나무이다. '觀音'은 소리는 들어야 되겠지만 단종의 우는 모습을 소나무가 보았다는 뜻이니 관세음보살이 연상되어 진다. 단종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한 살 위 정순왕후 뿐이었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돌을 쌓은 망향탑이 있다. 단종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돌을 쌓은 망향탑과 필자 일행은 그 작은 돌탑을 보고 숙연함을 느꼈다. 단종은 왕이긴 하였지만 요즘으로는 사춘기인 미소년의 나이였다. 얼마나 부인 정순왕후를 그리워 했을까를 생각하니 숙연해지면서 눈물이 흐른다. 필자는 東望亭에 올라서도 정순왕후의 기구한 팔자와 남편 단종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에 여러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짧은 생이었지만 픽션과 논픽션을 가미한 단편소설을 써 보고 싶기도 하다. 점심은 영월의 별미 보리밥으로 38명의 일행이 꿀맛을 음미하였다. 김삿갓 유적비 그리고 방랑시인이요, 천재시인이요, 기인이요, 기발한 발상을 쏟아 낸 난고(蘭皐) 김삿갓의 유적지로 발길을 돌렸다. 먼저 김삿갓묘역으로 향했다. 氣의 힘이 왕성함을 느꼈다. 그는 35년을 삿갓을 쓰고 전국을 유랑하다기 전라도 화순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여곡절끝에 김삿갓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이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하늘을 가려 삿갓을 쓰고 평생을 살았으나 차마 고향에는 죄스럽고 미안하여 한번도 발길을 돌릴수가 없었을 것이다. 죽고나서 3년이나 지나서 고향으로 돌아 왔으니 조상과 후손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삿갓은 벗긴 했지만...... 그러나 그는 시인의 최고경지인 詩仙이라 불리어 지는 우리나라 유일한 시인이다. 중국도 이백에게만 시선이라 칭하고 있다. 차의 최고는 초의선사이시다. 선사는 스님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다. 시선은 함부로 붙힐 수 없는 시의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이백과 김삿갓은 방랑의 시인이다. 어쩌면 대자유를 구가한 詩心 으로 한 생을 살았던 분들이다. 시성은 더러 존재한다. 두보도 있고 영국의 낭만시인 워드워스도 있다. 우선 이문열의 장편소설 '시인'을 권하고 싶다. 기왕 제목을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했으면 하는 필자 나름의 아쉬움이 따른다. 김삿갓은 本이 안동김씨로 역사적인 스토리는 여기서 생략한다. 다만 지금 시대의 시인이었다면 노벨문학상은 따놓은 당상이 아닐까 싶다. 김삿갓 문학관을 들러보고 야외의 넓직한 곳에 둘러앉아 본회 회윈이시고 한국문인협회 만조시분과 회장이신 김진중님으로 부터 김삿갓에 대한 설명의 시간이 있었다. 평생을 김삿갓에 대한 연구로 정말 해박하신 식견에 감탄이 일었다. 동향인으로 투박한 경음의 발음은 오히려 매력으로 들리어왔다. 살아 흩어져 있던 모든 시는 이곳에 모아져서 벌써 제25회 김삿갓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돌에 새겨진 많은 시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죽어 이름이 빛나는 위대한 우리민족의 자산인 감삿갓이여! 오늘의 답사 일정을 마치고 버스는 상경행 길을 서둘러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정효 회장님, 원흥식 답사위원장님 그리고 동참하신 모든 회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산새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귀가길을 재촉하였다. :: 칼럼니스트 / 海垣 이경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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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의 탐방기] 장릉, 청령포, 김삿갓 유적지를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