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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30] 客窓寒燈 - 삶의 지혜와 위로는 오직 順理이다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삶의 지혜와 위로는 오직 順理이다.> "비틀즈의 'Let it be'가 그래서 좋다!" 우리 격언에, 성질 급한 사람이 술값을 낸다! 라는 말이 있다. 70년대 대학가에 들불처럼 번져, 너도 나도 질세라, 떼창처럼 흥겹게 흥얼거리던, 록 밴드 비틀즈의 '렛잇비(Let_It_Be)'가 이제 와서 새삼 오버랩 된다. 비틀즈(Beatles)! 1960년대 영국의 리버풀에서 결성된 전설적인 록밴드다. 그 맴버로는 존 레논(John Winston Ono Lenon:1980년 작고),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1942~),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2001년 작고), 그리고 링고 스타(본명 Richard Starkey Jr.:1940~)등 4인조로 결성된 록밴드가 바로 비틀즈다. 70년대에는, 노래가사에는 별 관심이 없이 마냥 흥에 겨워 부르곤 했었는데, 지금 와서 가사를 음미하며 불러보니, 그 내용이 이렇게 깊은 감명을 줄줄이야! 게다가 지구상에서 가장 성미가 급한 축에 속하는 민족이 우리나라 국민이 아닐까, 싶어서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곡 'Let_It_Be'는 1970년에 발매된 비틀즈의 마지막 정규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당시 '폴 매카트니'가 어머니 메리(Mary)의 죽음을 겪은 후, 꿈에서 들은 메세지에서 영감을 받아 쓴 곡(曲)이라, 그가 심신이 곤고(困苦)하고 힘들어 할 때, "흐르는 대로 두라!"는, 위로의 메세지로 읽힌다. Song by the Beatles (verse 1)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chorus)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verse 2)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chorus)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verse 3)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ing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chorus) And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면, 마더 메리가 다가와 지혜의 말씀을 전해줘요, 그대로 두라고! 그리고 어둠 속 시간을 보낼 때 그녀가 내 앞에 서서 지혜의 말씀을 전해주죠, 그대로 두라고!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라, 그대로 흘러가게 두라고,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마음속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공감할 때 해답이 있을거예요, 그대로 두면 돼요. 그들이 혹시 떨어져 있더라도 여전히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있어요. 해답은 있을거예요, 그대로 두면 돼요.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요, 해답은 있을거예요, 그냥 두세요.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밤이 흐리고 어두울 때도, 여전히 날 비추는 빛이 있어요. 내일까지 밝게 빛날거예요, 그대로 두면 돼요. 음악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마더 메리가 다가와서 지혜의 말씀을 들려줘요,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요,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요,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요,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요,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록밴드 비틀즈의 4인방은 이 렛잇비(Let_It_Be)를 끝으로 해체되긴 했지만, 이들 각각은 정말 독특한 캐릭터로 유명세를 탔다.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심장'으로, 존 레논은 비틀즈의 '영혼'으로 불렸고,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의 '정신'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예명을 썼던, 링고 스타(본명은 리처드 스타키 주니어:늘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해서 링고 스타로 불림)는 비틀즈의 '몸통'으로 통했다고 한다.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로, 전세계적으로 6억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비틀즈는 1988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그리고 멤버전원도 1994년부터 2015년까지 개인으로서 헌액되었다고 한다. 작금의 국내외 정세가 한치 앞을 가늠 할 수 없는 위기 중의 위기 상황이다. 중동전의 장기화 조짐으로 인해 전세계 국가들이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빨간불이 켜졌다. 뉴스를 보고, 듣는 것도 이젠 겁이 난다. 하루가 다르게 춤추듯, 널뛰기 하듯 하는 고유가와 환율, 그리고 증권과 주식시세에, 자동차 부제(部制)까지 들썩인다. 대부분의 세계 역사는 순리의 역사가 아니라, 인위적, 자의적인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치 자연의 세계처럼 거대한 먹이 사슬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방정식이 인류 역사의 흔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이 1969년 6월 12일 유엔(UN)총회에서 체결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분명 불평등조약일 수 밖에 없다. 조약 체결 당시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던 러시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국과 미국 등 5개국은 핵을 더 많이 확보하거나 핵실험을 해도 되는 등의 모든 권리를 누리면서, 여타 국가들은 핵무기에 손을 대지도 못하게 한 것이 이 조약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자면, 이 조약은 핵보유국으로 올라오고자 하는 국가들의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강대국의 횡포'와 진배없다. 게다가 이들이 비핵보유국에 대해서는, 가상 적국(敵國)의 핵 공격에 대한 억제책으로 내놓은 게 바로 '핵우산(Nuclear Umbrella)' 이다. 즉, '가상 적으로부터 핵 공격이 있을 땐 우리가 우산을 씌워줄게!' 라는 식의 선심용이다. 이런 것이 비핵보유국과 약소국의 설움이 아닐까? 지금의 중동전도 이러한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간의 미묘한 갈등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핵개발은 인류공영과 평화를 위해서만 필요한 이기(利器)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취지와는 달리 가공할 만한 핵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무기화 하여, 인류공멸과 대재앙을 도모한다면 이 또한 누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어쩌다 '호르무즈(Hormuz, 또는 Ormuz)'가 이토록 금세기 최대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는가? 고대 페르시아의 신(神)'아후라 마즈다'의 그 이름, 그 명성에 걸맞는 신성함과 번영의 상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작금의 사태가 답답함을 넘어 우울해지는 기로에 서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달한다고 단기간에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는가?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는 글귀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away)"라는 '솔로몬의 명언'(사실은 스페인 격언이다)처럼, 우리가 큰 시련에 빠졌을 때일수록 심신을 가다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선 어쩔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럴 때일수록 조용히 침잠하면서, 비틀즈의 '렛잇비(Let_It_Be)'노래로 마음을 추스를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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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9] 客窓寒燈 - 파란 눈의 聖者!
<파란 눈의 聖者!> "故 두봉(杜峰)주교님의 유별난 한국사랑" 2014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My love, Don't cross that River)!" 가 가끔씩 생각 난다. 강원도 횡성 두메산골에서 76년째 부부로, 연인(?)으로 살아온, 당시 89세의 강계열(1924~)할머니와 조병만(1915~작고)할아버지의 감성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는 누적 관객 480만명을 기록한 흥행 대박으로,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부부애의 결정판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한 영화이기 이전에 실화다. '사랑'의 주인공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필자가 감히 '파란 눈의 성자(聖者)'라고 부르고 싶은 故 두봉 주교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두봉 주교님의 본명은,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Rene' Marie AlbertDupont: 1929.9.2~2025.4.10, 향년 96세)" 이다. 두봉 주교님의 한국 이름이 바로 두봉(杜峰,Du Bong)으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로,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역임하였고, 2019년에는 '한국 특별국적'을 취득하여, 명실공히 한국인이 되었다. 그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두봉 주교님은 워낙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성장기 때 영양실조로 인해 신장보다 양팔을 벌린 길이가 더 길었다고 한다. 1940년 무렵, 두봉주교님의 고향인 오를레앙 지역은 제2차대전의 침략국인 독일에 의해 강제로 프랑스 군정청이 설치된 곳이라, 나치의 직접적인 전쟁 범죄에 노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집중공격지 중의 한곳이었다. 두봉 주교님은 예수님에 반해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대신학교(가톨릭계 학교)진학을 결정해야 할 무렵, 종교철학 교사였던 어떤 사제가 남긴 말에 감명 받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 나도 예수님처럼 평생 사랑을, 행복의 길을 가르치자!' 그는 대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3년 6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54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12월 19일 최초의 선교지인, 6.25 동란을 겪은 한국땅을 밟았다. 그가 처음 선교지를 택할 때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절친이 한국 동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소식을 듣고는, 대번에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다고 한다. 이런 결정이 어찌 쉬우랴! 젊은 나이에 자신의 절친이 낯선 이국의 전장터에서 삶을 마감했다는데....., 두봉 주교님(당시 신부)은 1955년 대전 대목구 대흥동 본당(현 대전교구 주교좌)의 보좌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한다. 그 당시 본당 주임이던 故 오기선(1907~1990)신부를 도와 10년간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폈는데, 그때 프랑스 성(姓)을 한국식으로 바꾼 '두봉(杜峰)'이란 이름도 바로 이 오기선 신부가 지어줬다고 한다. 이 두봉이란 이름은,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란 뜻을 가지기도 했다는데, 이렇게 해서 '파란 눈의 성자' 프랑스인 '뒤퐁'은 한국인 '두봉'으로 이땅에서 70년의 삶을 살게 된다. 두봉 신부! 그는 '대전교구 학생회'와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지도 신부, 교구 상서국장 등을 지내다, 1967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뒤, 1969년 5월 29일, 대구대교구가 관할하던 경북 북부지역이 새 교구로 분리, 설정되어, 한국교회 15번째 교구인 안동교구가 탄생하게 되자, 만39세의 두봉 신부가 안동교구장 으로 선임되었다. 두봉 주교님의 초대 안동 교구장 취임 일성이 더욱 놀랍다. "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논어(論語)를 인용한 두봉 주교님의 취임 일성은 유교의 본향인 안동교구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국에서 유림의 도시로 유명한 안동의 교구 특성을 고려한 두봉 주교님의 이 친근성에 안동 유림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이어서 그는, "여러분이 가꿔놓은 기름진 토양에 소담스런 꽃 한송이를 심어놓고 싶은 게 소망"이라며, "외지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이 고장 발전을 위해 필요한 종으로 생각해 달라!"는 당부의 말로 교구장으로서의 취임사를 한 것이다. 두봉 주교님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대개의 선교사들은 은퇴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곤 하는데, 두봉 주교님은 은퇴 후에도 시무했던 안동교구의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지역민과 함께 교역자로서, 지역민으로서, 고락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에 찐 사랑을 전해 준 선한 목자(牧者)두봉 주교님! 흔히 사랑의 종류가 크게 3가지라고 하는데, 쾌락주의적 사랑인 에피투미아(Epithumia)는 차치하고 라도, 이성간의 로멘틱한 사랑인 에로스(Eros)도 건전한 범위 내에선 많아야 되겠지만,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면서 이타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적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자 등대이기에, 살신성인적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아니면 결코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두봉 주교님은 70년을 하루같이 머나먼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지난 2025년 4월 10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땅, 유림의 본향 안동땅에서 선종(善終)하셨다. 곧 주교님의 일주기가 다가온다. 앞으로도 제2, 제3의 두봉 주교님이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하시기를 고대하며, 삼가 두봉주교님의 명복을 빈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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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8] 客窓寒燈 - 종교(宗敎)적 미명 하에 행악(行惡)하면 안돼!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종교(宗敎)적 미명 하에 행악(行惡)하면 안돼! > 지장보살의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배운다! "아불입지옥(我不入地獄)하면 수입지옥(誰入地獄)이리요?"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참으로 의미 있는 화두(話頭)이다. 필자는 전공이 사회복지라, 평소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농담처럼 던지던 말투가 생각난다. "나는 죽으면 지옥의 문턱에 가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client)들에게 복지전문가(worker)로써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불가(佛家)에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와같은 화두로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의 '안락행품 (安樂行品)'에서 갈(喝)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세가지 서원(誓願)을 한다. 그 첫째는, "중생도진방증보리(衆生度盡方證菩提)"이다. 이 말은 '중생을 모두 제도한 후에 비로소 깨달음을 증독하리라'는 뜻이다. 두번째는, "지옥미공서불성불 (地獄未空誓不成佛)"인데, 이 말은 '지옥이 텅비기 전에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번째가 바로, "아불입지옥 수입지옥(我不入地獄 誰入地獄)"이다.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와같이 지장보살은 자신을 제도하기에 앞서, 타인을 먼저 제도하겠다는 결연함이 엿보이는 서원을 하고 있다. 유엔(UN)통계자료(2022.11.15)에 의하면, 전세계 인구를 대략 84억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약 84,3%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고작 15.7%만이 무신론자 내지 무종교라고 한다. 따라서 종교별 비중을 보면, 범 기독교가 31.1%, 이슬람교가 24.9%, 힌두교가 15.2%, 불교가 6.6%, 민속종교가 5.6%, 그리고 기타 종교가 0.9%의 분포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전세계 인구의 약 85%가 종교를 갖고 있을까? 어떤 조사에서 종교를 믿는 이유를 이렇게 내놨다. 첫째,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이다. 즉, 종교를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다. 둘째, 종교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답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도덕적 가치와 행동지침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고, 사회의 규범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란다. 넷째로는, 어려운 시기나 고난에 처했을 때 위로와 희망을 제공한다. 이는 믿음이 힘이 되고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다수는 가족이나 사회의 전통 때문에 종교를 따르며, 이는 세대를 넘어 세대로 전해지기도 한다. 여섯째로는, 일부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서 영적 경험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 이와같은, 종교를 믿는 여러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배타성으로 인한 갈등 조장, 종교재판, 역사적인 십자군 전쟁, 이슬람극단주의 테러 등 폭력과 전쟁이 종교적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음을 부인할수 없다. 물론 종교는 인간의 깊은 존재적 갈망에서 야기된 문화이고, 사상이다. 그래서 종교가 위안을 주기도 하고, 도덕적 삶을 이끌어 내기도 하며, 때로는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다. 어쩌면 종교인들 대다수가 천국과 천당을 가고자 신앙을 가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작금의 중동 사태를 보라! 노골적인 종교적 이름은 아니지만, 분쟁 관계국들의 종교관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분명 종교의 힘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타 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핍박하고 살상한단 말인가? 확전 2주일여만에 수많은 사상자와 천문학적인 재산적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가 봄이 오는 길목임에도 불구하고, 엄동설한에 맞닥뜨린 몸살감기마냥 덜덜 떨고 있다. 어떤 명분으로든 자신의 종교가 타종교를 핍박해서도 안되고, 더더욱 행악(行惡)을 자행해서는 안된다. 25년 전, 9.11 테러를 보라! 인류 역사에서 두고두고 씻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잊지 못할 대참사를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는 인류 공멸(共滅)의 첩경이다. 하루빨리 각국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을 모색하게 되기를, 지장보살의 안락행품을 되뇌이면서 간절히 소망해 본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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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7] 客窓寒燈 -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말실수!
<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말실수! > '구 동독 통일사회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의 기자회견을 보며' 독일 통일! 그것은 정말 기적과 같았고, 분단국가인 우리에겐 너무나 부러운 일이자, 꿈같은 소망의 역사이다. 독일 통일에는 두가지 사건이 발단이 된다. 먼저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람으로 평가되는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전 서독 수상의 동방정책 이다. 그는 1970년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게토 희생자'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 만행에 대해 온몸으로 사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이유로는 1985년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Michail Sergeyevich Gorbachev)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 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 정책에 의해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들이 점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었지만, 유독 동독만 홀로서기에 나선 것이 동독민들의 원성을 산 것이 되어,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시위가 확산 일로가 된 것이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인 에곤 크렌츠(Egon Rudi Ernst Krenz)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시위 확산에 따른 개혁의 일환으로 1989년 11월 9일,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완화"에 대해 법령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법령은 즉시, 바로 출국 규제가 완화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으로 돌변하여 유명세를 타게 된다. 당시 휴가에서 막 돌아온 사회주의통일당(집권당)의 대변인인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1929-2015)'가 18시에 이 법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기로 하고, 크렌츠 서기장으로부터 서류를 받아 기자회견장으로 갔던 것이다. 이 새로운 법령의 내용은, "외국 여행 시 조건(여행 목적, 친척 등)을 제시하지 않고 신청할 수 있으며, 경찰의 여권 등록 부서는 모두 출국 비자를 지체없이 발급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국외 이주에 대해서 동서독 국경 혹은 동서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이 인정된다."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법률이 중앙위원회의 승인과 내각에서의 결의를 거친 뒤, 그리고 국경 경비를 강화한 뒤에야 비로소 발효되는 것인데, 휴가에서 막 돌아온 대변인 샤보프스키는 이미 다 결의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맨 앞줄에 있던 독일의 '빌트'지 기자가 "이 시행령이 언제부터 발효되는가?" 라고 질문했는데, 원래는 11월 10일 아침에 발효될 예정이었으나, 샤보프스키가 가져온 서류에는 날짜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샤보프스키는 아무 생각없이, "당장, 지체없이(sofort, unverzüglich)!"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샤보프스키의 답변을 믿은 기자들은 일제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긴급뉴스를 전세계에 타전하게 된다. 뉴스를 본 수천명의 동독인들은 즉시 서독으로 가는 검문소로 향했고, 동독의 국경 경비병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의 거센 요구에 밀려, 우왕좌왕 하다, 결국 서독으로 가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후,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늘어 나면서 동독 정권은 빠르게 무너졌고, 동독과 서독은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결국 통일에 합의하게 된다. 정치인 샤보프스키의 말실수 한마디가 28년간 독일을 양분했던 것 중의 하나인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통일이 된 후 독일 정부는 샤보프스키에게 과거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던 동독인 다수를 총살'해도 된다는 정책을 시행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하여 1999년 12월에 수감하였다가, 10개월 후인 2000년 9월에 사면된 후 석방되었다. 그후 샤보프스키는 자신의 도의적인 책임과 죄책감 등으로 인해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내다 2015년11월 1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정치인의 말실수! 최근 국내의 어떤 신뢰도 여론조사 에서, 정치인의 신뢰도가 최하위권 이라는 성적표를 내놓은 바 있다. 위정자들의 입은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중국 전한 문제文帝 때의 신하인 조조晁錯가 올린 상소문 논귀속소論貴粟疎에 실린 글로, 법령이 일정하지 않음을 역설한 글)나, 조변석개(朝變夕改)식의 말뒤집기나, "뻔뻔스런 모르쇠!"식의 말투는 결국 국민적 실망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키게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다수의 국민들은 위정자들의 처신에 의해 세뇌 당하기도 하고, 또 각성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은 자신의 말실수에 앞서, 스스로 신독(愼獨: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의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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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6] 客窓寒燈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 에 얽힌 기묘한 풍수지리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 에 얽힌 기묘한 풍수지리> '대한제국 탁지부대신(재무부장관) 어윤중(魚允中)의 졸기(卒記)를 보며!' "생거진천(生居鎭川)이오,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 (살아서는 진천이오, 죽어서는 용인이라)" 많이 들어본즉한 말인데, 이에 대한 설(說)또한 분분하나, 이 모두가 '진천의 후한 인심과 비옥한 평야, 그리고 용인의 수려한 산세가 낳은 풍수설의 뒷담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경기도 용인과 안성의 경계 지점에 있는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에 얽힌 지명은 또 어찌된건가? 물론 이곳이 바다에 인접한 곳도 아닐진대, 어떻게 이런 지명이 가능했을까? 현재의 지명이나 위치로 보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魚肥里)에 조성된 '이동저수지'가 바로 옛날의 어비울이 (魚肥鬱), 또는 어비리이다, 이동저수지는 현재 둘레길까지 조성되어, 용인 일대의 생태환경공원 및 걷기 명소로 각광 받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어비울이, 즉 어사리(魚死里)!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 이었던 어윤중(魚允中:1848~1896) 이 고향인 충북 보은으로 피신하던 길에, 성난 무리들에게 쇠도리깨로 맞아 죽은 곳이다! '을미사변(일본 공사 미우라가 주도한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으로 김홍집 내각이 시작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친일파에 반대하던 친미파와 친러파에 의해 극비리에 동소문 밖으로 빠져 나가려던 계획이 안경수, 이진호 등의 친위대 간부가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이른바 '춘생문 사건'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 석달 뒤 고종은 세자 등과 함께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 정도 있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다. 이때 고종의 명(命)에 의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었고, 이 내각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홍집(총리대신)과 정병하(농상공부 대신)는 살해 당하여 종로 네거리에 효시되었고, 김윤식(외부대신)은 제주도로 유배 되고, 유길준(내부대신) 과 조희연(군부대신)등은 체포된 후 연행되다가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나머지 대신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런데 김홍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을 맡았던 어윤중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에는 마침 낙향 중이었고, 또 평소 원만한 인품과 중도파였던 덕분에 체포나 살해 대상에서 제외되었었다. 또한 어윤중은 당시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일본측으로부터 망명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던 것인데,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고향 보은으로 피신해 가기 위해 여인이 타는 가마로 위장하여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說)에 의하면, 어윤중은 평소 점괘에 능하다고 했는데, 이때도 '동쪽으로 가면 길하다.'는 점괘를 믿고, 동대문을 빠져나와 용인쪽으로 내려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인데, 그뒤 사람들은 어윤중이 처음 들렀던 주막을 '성참주점(成讖酒店:점괘대로 이뤄진 술집)'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가 용인과 안성의 경계 지점 쯤에 있는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고, 어윤중이 마을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여기 사람들은 '어비(魚肥)울이(鬱村)'라 하고, 외지에서는 '어사리(魚死里)'라고 부른다고 했다. 원래는 '냇물(진위천:일명 어비천)이 좋아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어비울이인데, '살찐 고기가 죽는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사리(魚死里)"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어윤중은 서둘러 행장을 챙겨 지나왔던 이웃 송전리로 되돌아가서 안관현의 사랑채를 빌려 하룻밤을 묵게 된다. 어비울이 마을 사람들은 여장(女裝)한 과객이 어윤중임을 알아챘고, 이 소문은 이웃마을 송전리까지 퍼져, 그 마을에 사는 정원로(山訟:묘지소송으로 어윤중에게 원한이 있었다)와 그집에 식객으로 와 있던 유진구(궁내부 순사로 춘생문 사건 당시 거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추격을 피해 정원로의 집에 숨어지내다 어윤중의 소식을 듣게 됨)가 정원로를 꼬드겨 동네 청년들을 이끌고 어윤중의 가마를 추적하여, 마침내 어윤중 일행이 처음 묵어가려 했던 어비울이에서 어윤중 일행을 붙잡게 된다(이때부터 이곳을 어윤중을 붙잡은 곳이라 하여 魚網里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어윤중은 어사리에서 최후를 맞고 만다. 유명한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순국열사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권지이(梅泉野錄券之二)'에 이렇게 전한다. "시시김윤식, 출성대죄, 이상부지문, 고인위윤중부도, 칙역당불사운." (是時金允植, 出城待罪, 而上不之問, 故人謂允中不逃, 則亦當不死云) ''이때 김윤식은 성밖으로 나가 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므로, 어윤중도 도주하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한말, 즉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야욕에 의해 관료들은 사분오열 되었고, 이른바 친일파와 친미파, 그리고 친러파에다 중도파까지 등장한 가운데, 동학농민운동(1894, 1)을 필두로 청일전쟁(1894, 7)에 승리한 일본과 갑오경장(1894, 7~1896, 2), 그리고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 10)과 아관파천(1896, 2)까지 나라의 안위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로부터 백수십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도 그때 못지 않은 난세(亂世) 다. 친미니, 친중이니 그리고 친일 등등 우린 열강들의 틈새에서 실리적인 줄타기 외교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오직 국리민복(國利民福) 을 전제로, 당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梅泉 黃玹의 '梅泉野錄'에서처럼 왜 어윤중이 비굴(?)하게도 여인용 가마를 타고 고향으로 줄행랑치다가 지명(地名)마저 기묘한 魚死里에서 최후를 맞고 맞았을까? 죽을 때 죽더라도 결코 삶을 구차하게 구걸하지는 말자! 역사와 풍수지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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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5] 客窓寒燈 - 신 냉전시대 열강들의 첩보전략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 세기의 여간첩 마타하리를 소환하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부부를 극비리에 체포해서 뉴욕으로 압송 했다는 뉴스가 새해 벽두를 장식한다. 말띠해인 2026년, 연초부터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이 설왕설래 하고 있다. 이런저런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당시 독일측의 스파이 혐의로 인해 프랑스 정부에 체포되어 총살 당한 여간첩 '마타하리'의 활동상이 새삼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마타하리! 그녀의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리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1876,8,7~1917,10,15)로, 네델란드 프리슬란트주 레이우아르던 켈더르스의 부유한 석유 관련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으나, 부친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친척집을 전전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사망은 더욱 그녀를 어렵게 한다. 그녀는 레이덴교육대학을 나와, 1895년 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루돌프 맥클라우드 대위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낯선 객지생활과 부부관계조차 원만하지 못한 가운데 1899년 갑자기 아들이 사망하자 네델란드로 귀국하게 되었고, 결국 1902년 이혼과 함께 딸까지 남편에게 빼앗기게 된다. 게다가 이혼한 전 남편이 생활비 송금을 거부하자, 생계가 막연해진 그녀는 자바섬에 살때 배운 춤과 미모로 돈을 벌면서 파리로 옮겨가게 된다. 1905년경부터 파리에서 물랭루즈 등을 무대로 '맥클라우드'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인 춤을 선사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그 과정에서 매춘행위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그녀는 언어적 재능이 탁월해서 모국어인 네델란드어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직업 무희로 활동하면서, 곧바로 이름까지 '마타하리'로 바꾸게 된다. '마타하리'라는 이름은 인도네시아어로 '마타(mata)'는 눈, '하리(hari)'는 일(日)이라는 뜻인데, 직역하면 '일(날)의 눈'이라는 뜻이나, 일반적으로 '마타하리'는 '태양', 또는 '여명의 눈동자'로 불린다고 한다. 훤칠한 키와 미모에, 동인도의 춤까지 구사하는 그녀의 매력에, 동맹군(독일측)이나 협상군(연합국) 측의 장교들이 푹 빠졌을 법도 하다. 이와같은 연유로 마타하리가 군인들과의 교제와 만남이 첩보활동의 실마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녀의 첩보활동에 관한 사실들은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다만, 한 자료에서는 1916년 봄 그녀가 헤이그에 살고 있을 때, 독일의 영사가 찾아와서, 이후 프랑스 여행에서 어떤 정보를 얻어오면 포상하겠다는 제의를 했다는데, 유감스럽게도 마타하리는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된 뒤, 별 소용없는 낡은 정보를 독일군 장교에게 전해줬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그 전에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고, 동시에 프랑스 정보부에 독일과 접촉했던 사실도 여과없이 진술하였다. 나중에는 협상군을 위해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공작이자 영국 컴벌랜드 공작 작위의 상속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는 진술도 했다고 한다. 결국 마타하리가 헤이그에서 독일군 장교와 접촉한 사실을 알린 것은 영국쪽으로 짐작된다. 이와같이 마타하리가 연합군과 동맹군(독일)측의 이중간첩일거라는 의혹이 커지자, 프랑스군은 1917년 2월 13일 파리에서 그녀를 전격 체포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7월 24~25일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얼마 후 총살하고 말았는데, 실제로는 스파이활동 보다는 프랑스의 내부 단속용(전쟁 패전에 대한 희생양) 이라는 영국 정보부 문서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 근교 뱅센기지에서 마타하리는 독일측 간첩혐의로 총살되었다.프랑스 군사 법정이 그녀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유럽 사교계를 시끄럽게 했던 그녀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격변 속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이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팜므파탈 스파이(femme fatale:불어로 치명적인 여성이라는 의미로, 주로 남성을 유혹해서 파멸로 이끄는 강렬하고도 위험 천만인 매력을 가진 여성 스파이)로 지칭하며 여전히 전설이 되고 있다. 마타하리가 총살 당할 때의 나이가 41살이었는데, 그녀가 죽음을 직감했음인지 모든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 눈가리개조차 거부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사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서 쏴요, 그걸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지 않나요?" 라고 말할 정도로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또한 마타하리는 자기 시신을 맡아 처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테니, 그냥 인체 해부용으로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생전에 밝힌 바가 있었다는데, 사형 집행 후에 시신은 그렇게 그대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21세기 지구촌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숨가쁜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특히 경제와 자원분야의 산업스파이 활동은 보편화 되었고, 모든 국가가 희토류(말 그대로 희귀한 흙이란 뜻으로, 원자번호 57에서 71번까지의 란탄 계열 15개 원소와 스칸듐과 이트륨을 합친 17개 원소 지칭)등의 자원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와 패권주의 주장에 우방국들마저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베네수엘라 사태 이후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과도한 욕심 때문에, 그린란드에 주둔군을 보낸 나토 회원국 중 8개 국가(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델란드, 핀란드)에 대해 금년 2월1일부터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6월1일부터는 25%로 인상하겠다는, 이른바 '관세 전쟁'을 선포하자 유럽 사회가 발끈하고 나섰다. 물론 트럼프대통령이 2월부터 적용 하겠다던 관세 부과를 보류하겠다고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세기의 스파이 혐의'로 마타하리가 처형된지도 벌써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구촌 곳곳에선 일진광풍의 먹구름 속에, 영원한 우방도, 적도 분간하기 어려운 대혼돈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피부색과 언어, 그리고 역사와 문화가 다를지라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지구인데, 왜 이렇게 서로간에 티격태격 하는건지. 우리의 자랑스런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인류공영과 평화를 위해 다함께 나아갈 수는 없는걸까?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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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30] 客窓寒燈 - 삶의 지혜와 위로는 오직 順理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삶의 지혜와 위로는 오직 順理이다.> "비틀즈의 'Let it be'가 그래서 좋다!" 우리 격언에, 성질 급한 사람이 술값을 낸다! 라는 말이 있다. 70년대 대학가에 들불처럼 번져, 너도 나도 질세라, 떼창처럼 흥겹게 흥얼거리던, 록 밴드 비틀즈의 '렛잇비(Let_It_Be)'가 이제 와서 새삼 오버랩 된다. 비틀즈(Beatles)! 1960년대 영국의 리버풀에서 결성된 전설적인 록밴드다. 그 맴버로는 존 레논(John Winston Ono Lenon:1980년 작고),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1942~),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 2001년 작고), 그리고 링고 스타(본명 Richard Starkey Jr.:1940~)등 4인조로 결성된 록밴드가 바로 비틀즈다. 70년대에는, 노래가사에는 별 관심이 없이 마냥 흥에 겨워 부르곤 했었는데, 지금 와서 가사를 음미하며 불러보니, 그 내용이 이렇게 깊은 감명을 줄줄이야! 게다가 지구상에서 가장 성미가 급한 축에 속하는 민족이 우리나라 국민이 아닐까, 싶어서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이 곡 'Let_It_Be'는 1970년에 발매된 비틀즈의 마지막 정규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당시 '폴 매카트니'가 어머니 메리(Mary)의 죽음을 겪은 후, 꿈에서 들은 메세지에서 영감을 받아 쓴 곡(曲)이라, 그가 심신이 곤고(困苦)하고 힘들어 할 때, "흐르는 대로 두라!"는, 위로의 메세지로 읽힌다. Song by the Beatles (verse 1)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chorus)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verse 2)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chorus)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verse 3)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ing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chorus) And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면, 마더 메리가 다가와 지혜의 말씀을 전해줘요, 그대로 두라고! 그리고 어둠 속 시간을 보낼 때 그녀가 내 앞에 서서 지혜의 말씀을 전해주죠, 그대로 두라고!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라, 그대로 흘러가게 두라고,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마음속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공감할 때 해답이 있을거예요, 그대로 두면 돼요. 그들이 혹시 떨어져 있더라도 여전히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있어요. 해답은 있을거예요, 그대로 두면 돼요.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요, 해답은 있을거예요, 그냥 두세요.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밤이 흐리고 어두울 때도, 여전히 날 비추는 빛이 있어요. 내일까지 밝게 빛날거예요, 그대로 두면 돼요. 음악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마더 메리가 다가와서 지혜의 말씀을 들려줘요,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요,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요,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그냥 내버려둬, 흘러가게 둬요,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돼요, 지혜의 말씀을 속삭이죠, 그대로 두라고!" 록밴드 비틀즈의 4인방은 이 렛잇비(Let_It_Be)를 끝으로 해체되긴 했지만, 이들 각각은 정말 독특한 캐릭터로 유명세를 탔다.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심장'으로, 존 레논은 비틀즈의 '영혼'으로 불렸고,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의 '정신'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예명을 썼던, 링고 스타(본명은 리처드 스타키 주니어:늘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해서 링고 스타로 불림)는 비틀즈의 '몸통'으로 통했다고 한다. 비틀즈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로, 전세계적으로 6억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비틀즈는 1988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그리고 멤버전원도 1994년부터 2015년까지 개인으로서 헌액되었다고 한다. 작금의 국내외 정세가 한치 앞을 가늠 할 수 없는 위기 중의 위기 상황이다. 중동전의 장기화 조짐으로 인해 전세계 국가들이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빨간불이 켜졌다. 뉴스를 보고, 듣는 것도 이젠 겁이 난다. 하루가 다르게 춤추듯, 널뛰기 하듯 하는 고유가와 환율, 그리고 증권과 주식시세에, 자동차 부제(部制)까지 들썩인다. 대부분의 세계 역사는 순리의 역사가 아니라, 인위적, 자의적인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치 자연의 세계처럼 거대한 먹이 사슬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방정식이 인류 역사의 흔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이 1969년 6월 12일 유엔(UN)총회에서 체결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분명 불평등조약일 수 밖에 없다. 조약 체결 당시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던 러시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국과 미국 등 5개국은 핵을 더 많이 확보하거나 핵실험을 해도 되는 등의 모든 권리를 누리면서, 여타 국가들은 핵무기에 손을 대지도 못하게 한 것이 이 조약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자면, 이 조약은 핵보유국으로 올라오고자 하는 국가들의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강대국의 횡포'와 진배없다. 게다가 이들이 비핵보유국에 대해서는, 가상 적국(敵國)의 핵 공격에 대한 억제책으로 내놓은 게 바로 '핵우산(Nuclear Umbrella)' 이다. 즉, '가상 적으로부터 핵 공격이 있을 땐 우리가 우산을 씌워줄게!' 라는 식의 선심용이다. 이런 것이 비핵보유국과 약소국의 설움이 아닐까? 지금의 중동전도 이러한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간의 미묘한 갈등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핵개발은 인류공영과 평화를 위해서만 필요한 이기(利器)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취지와는 달리 가공할 만한 핵을 비밀리에 개발하고 무기화 하여, 인류공멸과 대재앙을 도모한다면 이 또한 누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어쩌다 '호르무즈(Hormuz, 또는 Ormuz)'가 이토록 금세기 최대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는가? 고대 페르시아의 신(神)'아후라 마즈다'의 그 이름, 그 명성에 걸맞는 신성함과 번영의 상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작금의 사태가 답답함을 넘어 우울해지는 기로에 서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달한다고 단기간에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는가? 흔히들 우리가 알고 있는 글귀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away)"라는 '솔로몬의 명언'(사실은 스페인 격언이다)처럼, 우리가 큰 시련에 빠졌을 때일수록 심신을 가다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로선 어쩔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럴 때일수록 조용히 침잠하면서, 비틀즈의 '렛잇비(Let_It_Be)'노래로 마음을 추스를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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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30] 客窓寒燈 - 삶의 지혜와 위로는 오직 順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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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9] 客窓寒燈 - 파란 눈의 聖者!
- <파란 눈의 聖者!> "故 두봉(杜峰)주교님의 유별난 한국사랑" 2014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My love, Don't cross that River)!" 가 가끔씩 생각 난다. 강원도 횡성 두메산골에서 76년째 부부로, 연인(?)으로 살아온, 당시 89세의 강계열(1924~)할머니와 조병만(1915~작고)할아버지의 감성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는 누적 관객 480만명을 기록한 흥행 대박으로,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부부애의 결정판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한 영화이기 이전에 실화다. '사랑'의 주인공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필자가 감히 '파란 눈의 성자(聖者)'라고 부르고 싶은 故 두봉 주교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두봉 주교님의 본명은,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Rene' Marie AlbertDupont: 1929.9.2~2025.4.10, 향년 96세)" 이다. 두봉 주교님의 한국 이름이 바로 두봉(杜峰,Du Bong)으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로,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역임하였고, 2019년에는 '한국 특별국적'을 취득하여, 명실공히 한국인이 되었다. 그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두봉 주교님은 워낙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성장기 때 영양실조로 인해 신장보다 양팔을 벌린 길이가 더 길었다고 한다. 1940년 무렵, 두봉주교님의 고향인 오를레앙 지역은 제2차대전의 침략국인 독일에 의해 강제로 프랑스 군정청이 설치된 곳이라, 나치의 직접적인 전쟁 범죄에 노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집중공격지 중의 한곳이었다. 두봉 주교님은 예수님에 반해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대신학교(가톨릭계 학교)진학을 결정해야 할 무렵, 종교철학 교사였던 어떤 사제가 남긴 말에 감명 받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 나도 예수님처럼 평생 사랑을, 행복의 길을 가르치자!' 그는 대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3년 6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54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12월 19일 최초의 선교지인, 6.25 동란을 겪은 한국땅을 밟았다. 그가 처음 선교지를 택할 때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절친이 한국 동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소식을 듣고는, 대번에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다고 한다. 이런 결정이 어찌 쉬우랴! 젊은 나이에 자신의 절친이 낯선 이국의 전장터에서 삶을 마감했다는데....., 두봉 주교님(당시 신부)은 1955년 대전 대목구 대흥동 본당(현 대전교구 주교좌)의 보좌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한다. 그 당시 본당 주임이던 故 오기선(1907~1990)신부를 도와 10년간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폈는데, 그때 프랑스 성(姓)을 한국식으로 바꾼 '두봉(杜峰)'이란 이름도 바로 이 오기선 신부가 지어줬다고 한다. 이 두봉이란 이름은,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란 뜻을 가지기도 했다는데, 이렇게 해서 '파란 눈의 성자' 프랑스인 '뒤퐁'은 한국인 '두봉'으로 이땅에서 70년의 삶을 살게 된다. 두봉 신부! 그는 '대전교구 학생회'와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지도 신부, 교구 상서국장 등을 지내다, 1967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뒤, 1969년 5월 29일, 대구대교구가 관할하던 경북 북부지역이 새 교구로 분리, 설정되어, 한국교회 15번째 교구인 안동교구가 탄생하게 되자, 만39세의 두봉 신부가 안동교구장 으로 선임되었다. 두봉 주교님의 초대 안동 교구장 취임 일성이 더욱 놀랍다. "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논어(論語)를 인용한 두봉 주교님의 취임 일성은 유교의 본향인 안동교구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국에서 유림의 도시로 유명한 안동의 교구 특성을 고려한 두봉 주교님의 이 친근성에 안동 유림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이어서 그는, "여러분이 가꿔놓은 기름진 토양에 소담스런 꽃 한송이를 심어놓고 싶은 게 소망"이라며, "외지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이 고장 발전을 위해 필요한 종으로 생각해 달라!"는 당부의 말로 교구장으로서의 취임사를 한 것이다. 두봉 주교님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대개의 선교사들은 은퇴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곤 하는데, 두봉 주교님은 은퇴 후에도 시무했던 안동교구의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지역민과 함께 교역자로서, 지역민으로서, 고락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에 찐 사랑을 전해 준 선한 목자(牧者)두봉 주교님! 흔히 사랑의 종류가 크게 3가지라고 하는데, 쾌락주의적 사랑인 에피투미아(Epithumia)는 차치하고 라도, 이성간의 로멘틱한 사랑인 에로스(Eros)도 건전한 범위 내에선 많아야 되겠지만,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면서 이타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적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자 등대이기에, 살신성인적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아니면 결코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두봉 주교님은 70년을 하루같이 머나먼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지난 2025년 4월 10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땅, 유림의 본향 안동땅에서 선종(善終)하셨다. 곧 주교님의 일주기가 다가온다. 앞으로도 제2, 제3의 두봉 주교님이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하시기를 고대하며, 삼가 두봉주교님의 명복을 빈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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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9] 客窓寒燈 - 파란 눈의 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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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8] 客窓寒燈 - 종교(宗敎)적 미명 하에 행악(行惡)하면 안돼!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종교(宗敎)적 미명 하에 행악(行惡)하면 안돼! > 지장보살의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배운다! "아불입지옥(我不入地獄)하면 수입지옥(誰入地獄)이리요?"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참으로 의미 있는 화두(話頭)이다. 필자는 전공이 사회복지라, 평소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농담처럼 던지던 말투가 생각난다. "나는 죽으면 지옥의 문턱에 가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client)들에게 복지전문가(worker)로써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불가(佛家)에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와같은 화두로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의 '안락행품 (安樂行品)'에서 갈(喝)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세가지 서원(誓願)을 한다. 그 첫째는, "중생도진방증보리(衆生度盡方證菩提)"이다. 이 말은 '중생을 모두 제도한 후에 비로소 깨달음을 증독하리라'는 뜻이다. 두번째는, "지옥미공서불성불 (地獄未空誓不成佛)"인데, 이 말은 '지옥이 텅비기 전에는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번째가 바로, "아불입지옥 수입지옥(我不入地獄 誰入地獄)"이다.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와같이 지장보살은 자신을 제도하기에 앞서, 타인을 먼저 제도하겠다는 결연함이 엿보이는 서원을 하고 있다. 유엔(UN)통계자료(2022.11.15)에 의하면, 전세계 인구를 대략 84억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약 84,3%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고작 15.7%만이 무신론자 내지 무종교라고 한다. 따라서 종교별 비중을 보면, 범 기독교가 31.1%, 이슬람교가 24.9%, 힌두교가 15.2%, 불교가 6.6%, 민속종교가 5.6%, 그리고 기타 종교가 0.9%의 분포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전세계 인구의 약 85%가 종교를 갖고 있을까? 어떤 조사에서 종교를 믿는 이유를 이렇게 내놨다. 첫째,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이다. 즉, 종교를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다. 둘째, 종교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답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도덕적 가치와 행동지침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고, 사회의 규범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란다. 넷째로는, 어려운 시기나 고난에 처했을 때 위로와 희망을 제공한다. 이는 믿음이 힘이 되고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다수는 가족이나 사회의 전통 때문에 종교를 따르며, 이는 세대를 넘어 세대로 전해지기도 한다. 여섯째로는, 일부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서 영적 경험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 이와같은, 종교를 믿는 여러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배타성으로 인한 갈등 조장, 종교재판, 역사적인 십자군 전쟁, 이슬람극단주의 테러 등 폭력과 전쟁이 종교적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음을 부인할수 없다. 물론 종교는 인간의 깊은 존재적 갈망에서 야기된 문화이고, 사상이다. 그래서 종교가 위안을 주기도 하고, 도덕적 삶을 이끌어 내기도 하며, 때로는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다. 어쩌면 종교인들 대다수가 천국과 천당을 가고자 신앙을 가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작금의 중동 사태를 보라! 노골적인 종교적 이름은 아니지만, 분쟁 관계국들의 종교관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들의 가치관과 신념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분명 종교의 힘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타 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핍박하고 살상한단 말인가? 확전 2주일여만에 수많은 사상자와 천문학적인 재산적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가 봄이 오는 길목임에도 불구하고, 엄동설한에 맞닥뜨린 몸살감기마냥 덜덜 떨고 있다. 어떤 명분으로든 자신의 종교가 타종교를 핍박해서도 안되고, 더더욱 행악(行惡)을 자행해서는 안된다. 25년 전, 9.11 테러를 보라! 인류 역사에서 두고두고 씻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잊지 못할 대참사를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는 인류 공멸(共滅)의 첩경이다. 하루빨리 각국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공존과 번영의 길을 모색하게 되기를, 지장보살의 안락행품을 되뇌이면서 간절히 소망해 본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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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8] 客窓寒燈 - 종교(宗敎)적 미명 하에 행악(行惡)하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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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7] 客窓寒燈 -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말실수!
- <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말실수! > '구 동독 통일사회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의 기자회견을 보며' 독일 통일! 그것은 정말 기적과 같았고, 분단국가인 우리에겐 너무나 부러운 일이자, 꿈같은 소망의 역사이다. 독일 통일에는 두가지 사건이 발단이 된다. 먼저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람으로 평가되는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전 서독 수상의 동방정책 이다. 그는 1970년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 '유대인 게토 희생자'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 만행에 대해 온몸으로 사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이유로는 1985년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Michail Sergeyevich Gorbachev)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 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 정책에 의해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들이 점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었지만, 유독 동독만 홀로서기에 나선 것이 동독민들의 원성을 산 것이 되어,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시위가 확산 일로가 된 것이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인 에곤 크렌츠(Egon Rudi Ernst Krenz)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시위 확산에 따른 개혁의 일환으로 1989년 11월 9일,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완화"에 대해 법령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법령은 즉시, 바로 출국 규제가 완화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으로 돌변하여 유명세를 타게 된다. 당시 휴가에서 막 돌아온 사회주의통일당(집권당)의 대변인인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1929-2015)'가 18시에 이 법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기로 하고, 크렌츠 서기장으로부터 서류를 받아 기자회견장으로 갔던 것이다. 이 새로운 법령의 내용은, "외국 여행 시 조건(여행 목적, 친척 등)을 제시하지 않고 신청할 수 있으며, 경찰의 여권 등록 부서는 모두 출국 비자를 지체없이 발급하도록 지시한다. 또한 국외 이주에 대해서 동서독 국경 혹은 동서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이 인정된다."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법률이 중앙위원회의 승인과 내각에서의 결의를 거친 뒤, 그리고 국경 경비를 강화한 뒤에야 비로소 발효되는 것인데, 휴가에서 막 돌아온 대변인 샤보프스키는 이미 다 결의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맨 앞줄에 있던 독일의 '빌트'지 기자가 "이 시행령이 언제부터 발효되는가?" 라고 질문했는데, 원래는 11월 10일 아침에 발효될 예정이었으나, 샤보프스키가 가져온 서류에는 날짜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샤보프스키는 아무 생각없이, "당장, 지체없이(sofort, unverzüglich)!"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 샤보프스키의 답변을 믿은 기자들은 일제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긴급뉴스를 전세계에 타전하게 된다. 뉴스를 본 수천명의 동독인들은 즉시 서독으로 가는 검문소로 향했고, 동독의 국경 경비병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의 거센 요구에 밀려, 우왕좌왕 하다, 결국 서독으로 가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후,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늘어 나면서 동독 정권은 빠르게 무너졌고, 동독과 서독은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결국 통일에 합의하게 된다. 정치인 샤보프스키의 말실수 한마디가 28년간 독일을 양분했던 것 중의 하나인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통일이 된 후 독일 정부는 샤보프스키에게 과거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던 동독인 다수를 총살'해도 된다는 정책을 시행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하여 1999년 12월에 수감하였다가, 10개월 후인 2000년 9월에 사면된 후 석방되었다. 그후 샤보프스키는 자신의 도의적인 책임과 죄책감 등으로 인해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내다 2015년11월 1일,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정치인의 말실수! 최근 국내의 어떤 신뢰도 여론조사 에서, 정치인의 신뢰도가 최하위권 이라는 성적표를 내놓은 바 있다. 위정자들의 입은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중국 전한 문제文帝 때의 신하인 조조晁錯가 올린 상소문 논귀속소論貴粟疎에 실린 글로, 법령이 일정하지 않음을 역설한 글)나, 조변석개(朝變夕改)식의 말뒤집기나, "뻔뻔스런 모르쇠!"식의 말투는 결국 국민적 실망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키게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듯이, 다수의 국민들은 위정자들의 처신에 의해 세뇌 당하기도 하고, 또 각성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은 자신의 말실수에 앞서, 스스로 신독(愼獨: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의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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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7] 客窓寒燈 -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세기의 말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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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6] 客窓寒燈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 에 얽힌 기묘한 풍수지리
-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 에 얽힌 기묘한 풍수지리> '대한제국 탁지부대신(재무부장관) 어윤중(魚允中)의 졸기(卒記)를 보며!' "생거진천(生居鎭川)이오,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 (살아서는 진천이오, 죽어서는 용인이라)" 많이 들어본즉한 말인데, 이에 대한 설(說)또한 분분하나, 이 모두가 '진천의 후한 인심과 비옥한 평야, 그리고 용인의 수려한 산세가 낳은 풍수설의 뒷담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경기도 용인과 안성의 경계 지점에 있는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에 얽힌 지명은 또 어찌된건가? 물론 이곳이 바다에 인접한 곳도 아닐진대, 어떻게 이런 지명이 가능했을까? 현재의 지명이나 위치로 보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魚肥里)에 조성된 '이동저수지'가 바로 옛날의 어비울이 (魚肥鬱), 또는 어비리이다, 이동저수지는 현재 둘레길까지 조성되어, 용인 일대의 생태환경공원 및 걷기 명소로 각광 받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어비울이, 즉 어사리(魚死里)!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탁지부대신 이었던 어윤중(魚允中:1848~1896) 이 고향인 충북 보은으로 피신하던 길에, 성난 무리들에게 쇠도리깨로 맞아 죽은 곳이다! '을미사변(일본 공사 미우라가 주도한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으로 김홍집 내각이 시작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친일파에 반대하던 친미파와 친러파에 의해 극비리에 동소문 밖으로 빠져 나가려던 계획이 안경수, 이진호 등의 친위대 간부가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이른바 '춘생문 사건'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 석달 뒤 고종은 세자 등과 함께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 정도 있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다. 이때 고종의 명(命)에 의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었고, 이 내각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홍집(총리대신)과 정병하(농상공부 대신)는 살해 당하여 종로 네거리에 효시되었고, 김윤식(외부대신)은 제주도로 유배 되고, 유길준(내부대신) 과 조희연(군부대신)등은 체포된 후 연행되다가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나머지 대신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런데 김홍집내각에서 탁지부대신을 맡았던 어윤중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에는 마침 낙향 중이었고, 또 평소 원만한 인품과 중도파였던 덕분에 체포나 살해 대상에서 제외되었었다. 또한 어윤중은 당시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일본측으로부터 망명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던 것인데,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고향 보은으로 피신해 가기 위해 여인이 타는 가마로 위장하여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說)에 의하면, 어윤중은 평소 점괘에 능하다고 했는데, 이때도 '동쪽으로 가면 길하다.'는 점괘를 믿고, 동대문을 빠져나와 용인쪽으로 내려 갔다가 변을 당한 것인데, 그뒤 사람들은 어윤중이 처음 들렀던 주막을 '성참주점(成讖酒店:점괘대로 이뤄진 술집)'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가 용인과 안성의 경계 지점 쯤에 있는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고, 어윤중이 마을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여기 사람들은 '어비(魚肥)울이(鬱村)'라 하고, 외지에서는 '어사리(魚死里)'라고 부른다고 했다. 원래는 '냇물(진위천:일명 어비천)이 좋아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어비울이인데, '살찐 고기가 죽는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사리(魚死里)"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어윤중은 서둘러 행장을 챙겨 지나왔던 이웃 송전리로 되돌아가서 안관현의 사랑채를 빌려 하룻밤을 묵게 된다. 어비울이 마을 사람들은 여장(女裝)한 과객이 어윤중임을 알아챘고, 이 소문은 이웃마을 송전리까지 퍼져, 그 마을에 사는 정원로(山訟:묘지소송으로 어윤중에게 원한이 있었다)와 그집에 식객으로 와 있던 유진구(궁내부 순사로 춘생문 사건 당시 거사에 참여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추격을 피해 정원로의 집에 숨어지내다 어윤중의 소식을 듣게 됨)가 정원로를 꼬드겨 동네 청년들을 이끌고 어윤중의 가마를 추적하여, 마침내 어윤중 일행이 처음 묵어가려 했던 어비울이에서 어윤중 일행을 붙잡게 된다(이때부터 이곳을 어윤중을 붙잡은 곳이라 하여 魚網里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어윤중은 어사리에서 최후를 맞고 만다. 유명한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순국열사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매천야록권지이(梅泉野錄券之二)'에 이렇게 전한다. "시시김윤식, 출성대죄, 이상부지문, 고인위윤중부도, 칙역당불사운." (是時金允植, 出城待罪, 而上不之問, 故人謂允中不逃, 則亦當不死云) ''이때 김윤식은 성밖으로 나가 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므로, 어윤중도 도주하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한말, 즉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야욕에 의해 관료들은 사분오열 되었고, 이른바 친일파와 친미파, 그리고 친러파에다 중도파까지 등장한 가운데, 동학농민운동(1894, 1)을 필두로 청일전쟁(1894, 7)에 승리한 일본과 갑오경장(1894, 7~1896, 2), 그리고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 10)과 아관파천(1896, 2)까지 나라의 안위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그로부터 백수십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도 그때 못지 않은 난세(亂世) 다. 친미니, 친중이니 그리고 친일 등등 우린 열강들의 틈새에서 실리적인 줄타기 외교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오직 국리민복(國利民福) 을 전제로, 당당하고 떳떳해야 한다. 梅泉 黃玹의 '梅泉野錄'에서처럼 왜 어윤중이 비굴(?)하게도 여인용 가마를 타고 고향으로 줄행랑치다가 지명(地名)마저 기묘한 魚死里에서 최후를 맞고 맞았을까? 죽을 때 죽더라도 결코 삶을 구차하게 구걸하지는 말자! 역사와 풍수지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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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6] 客窓寒燈 -어사리(魚死里)와 어망리(魚網里) 에 얽힌 기묘한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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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5] 客窓寒燈 - 신 냉전시대 열강들의 첩보전략
-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 세기의 여간첩 마타하리를 소환하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부부를 극비리에 체포해서 뉴욕으로 압송 했다는 뉴스가 새해 벽두를 장식한다. 말띠해인 2026년, 연초부터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이 설왕설래 하고 있다. 이런저런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당시 독일측의 스파이 혐의로 인해 프랑스 정부에 체포되어 총살 당한 여간첩 '마타하리'의 활동상이 새삼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마타하리! 그녀의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리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1876,8,7~1917,10,15)로, 네델란드 프리슬란트주 레이우아르던 켈더르스의 부유한 석유 관련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으나, 부친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친척집을 전전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사망은 더욱 그녀를 어렵게 한다. 그녀는 레이덴교육대학을 나와, 1895년 네델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루돌프 맥클라우드 대위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낯선 객지생활과 부부관계조차 원만하지 못한 가운데 1899년 갑자기 아들이 사망하자 네델란드로 귀국하게 되었고, 결국 1902년 이혼과 함께 딸까지 남편에게 빼앗기게 된다. 게다가 이혼한 전 남편이 생활비 송금을 거부하자, 생계가 막연해진 그녀는 자바섬에 살때 배운 춤과 미모로 돈을 벌면서 파리로 옮겨가게 된다. 1905년경부터 파리에서 물랭루즈 등을 무대로 '맥클라우드'라는 이름으로, 선정적인 춤을 선사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그 과정에서 매춘행위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그녀는 언어적 재능이 탁월해서 모국어인 네델란드어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직업 무희로 활동하면서, 곧바로 이름까지 '마타하리'로 바꾸게 된다. '마타하리'라는 이름은 인도네시아어로 '마타(mata)'는 눈, '하리(hari)'는 일(日)이라는 뜻인데, 직역하면 '일(날)의 눈'이라는 뜻이나, 일반적으로 '마타하리'는 '태양', 또는 '여명의 눈동자'로 불린다고 한다. 훤칠한 키와 미모에, 동인도의 춤까지 구사하는 그녀의 매력에, 동맹군(독일측)이나 협상군(연합국) 측의 장교들이 푹 빠졌을 법도 하다. 이와같은 연유로 마타하리가 군인들과의 교제와 만남이 첩보활동의 실마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녀의 첩보활동에 관한 사실들은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다만, 한 자료에서는 1916년 봄 그녀가 헤이그에 살고 있을 때, 독일의 영사가 찾아와서, 이후 프랑스 여행에서 어떤 정보를 얻어오면 포상하겠다는 제의를 했다는데, 유감스럽게도 마타하리는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된 뒤, 별 소용없는 낡은 정보를 독일군 장교에게 전해줬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그 전에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했고, 동시에 프랑스 정보부에 독일과 접촉했던 사실도 여과없이 진술하였다. 나중에는 협상군을 위해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공작이자 영국 컴벌랜드 공작 작위의 상속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는 진술도 했다고 한다. 결국 마타하리가 헤이그에서 독일군 장교와 접촉한 사실을 알린 것은 영국쪽으로 짐작된다. 이와같이 마타하리가 연합군과 동맹군(독일)측의 이중간첩일거라는 의혹이 커지자, 프랑스군은 1917년 2월 13일 파리에서 그녀를 전격 체포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7월 24~25일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얼마 후 총살하고 말았는데, 실제로는 스파이활동 보다는 프랑스의 내부 단속용(전쟁 패전에 대한 희생양) 이라는 영국 정보부 문서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 근교 뱅센기지에서 마타하리는 독일측 간첩혐의로 총살되었다.프랑스 군사 법정이 그녀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유럽 사교계를 시끄럽게 했던 그녀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격변 속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이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팜므파탈 스파이(femme fatale:불어로 치명적인 여성이라는 의미로, 주로 남성을 유혹해서 파멸로 이끄는 강렬하고도 위험 천만인 매력을 가진 여성 스파이)로 지칭하며 여전히 전설이 되고 있다. 마타하리가 총살 당할 때의 나이가 41살이었는데, 그녀가 죽음을 직감했음인지 모든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면서 눈가리개조차 거부하고 미소를 지으면서 사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서 쏴요, 그걸 계속 들고 있는 것도 힘들지 않나요?" 라고 말할 정도로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또한 마타하리는 자기 시신을 맡아 처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테니, 그냥 인체 해부용으로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생전에 밝힌 바가 있었다는데, 사형 집행 후에 시신은 그렇게 그대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21세기 지구촌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숨가쁜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특히 경제와 자원분야의 산업스파이 활동은 보편화 되었고, 모든 국가가 희토류(말 그대로 희귀한 흙이란 뜻으로, 원자번호 57에서 71번까지의 란탄 계열 15개 원소와 스칸듐과 이트륨을 합친 17개 원소 지칭)등의 자원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와 패권주의 주장에 우방국들마저 우려와 비판을 쏟아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베네수엘라 사태 이후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과도한 욕심 때문에, 그린란드에 주둔군을 보낸 나토 회원국 중 8개 국가(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델란드, 핀란드)에 대해 금년 2월1일부터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6월1일부터는 25%로 인상하겠다는, 이른바 '관세 전쟁'을 선포하자 유럽 사회가 발끈하고 나섰다. 물론 트럼프대통령이 2월부터 적용 하겠다던 관세 부과를 보류하겠다고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세기의 스파이 혐의'로 마타하리가 처형된지도 벌써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구촌 곳곳에선 일진광풍의 먹구름 속에, 영원한 우방도, 적도 분간하기 어려운 대혼돈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피부색과 언어, 그리고 역사와 문화가 다를지라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지구인데, 왜 이렇게 서로간에 티격태격 하는건지. 우리의 자랑스런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인류공영과 평화를 위해 다함께 나아갈 수는 없는걸까?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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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5] 客窓寒燈 - 신 냉전시대 열강들의 첩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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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4] 客窓寒燈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독일판, 클라라와 브람스의 음악같은 사랑' 청마(靑馬)유치환(柳致環)과 정운(丁芸)이영도(李永道)의 사랑이야기는 한국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아름다운 연애사건(?)이다. 이토록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놀음이 또 있을까? 청마는 그가 숨지기 전까지 20년 동안 무려 5,000통의 연서(戀書)를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정운에게 보냈다. 유치환(1908~1967)은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고, 1931년 23살 때 '문예 월간'에 <정적>이란 시로 등단했으나, 일제의 검속 대상을 피해 만주로 올라가, 형의 농장일을 돕다가 해방이 되자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영도(1916~1976)는 경북 청도에서 군수를 지낸 부잣집에서 태어나, 21살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고 살던 중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홀로 살다 1945년 가을 통영여중에 가사교사로 부임하면서 유치환과의 운명적인 조우(遭遇)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서른 일곱과 스물 아홉의 나이로, 같은 통영여중에 근무하면서 서로에 대한 연정(戀情)이 뭉개구름 처럼 피어 올랐고,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의 청마였지만, 유교적 가풍( 家風)에 길들여진 청상과부(靑孀寡婦) 정운은 그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기에, 고통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는 가슴 앓이 사랑으로 살아가야 했다. 유치환은 부산 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인 1967년 2월 13일 저녁, 예총 일로 문인들과 어울린 후 집으로 돌아가다 시내버스에 치어 59세에 사망하면서 정운과의 20년간의 끝 모르던 사랑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만다. 두사람 간 수천통의 편지 속에 남겨진 가장 대표적인 시가 바로 청마의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어디 우리나라 뿐이었겠는가? 서양 음악사에 깊고도 아련한 선율로 남아 있는 '클라라와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도 마치 한 곡의 아름다운 음악 같다고나 할까. 이보다 더 멋진 세레나데(serenade)가 또 어디 있으랴! 브람스(Johannes Brahms : 1833~1897)가 클라라(Clara Schumann : 1819~1896)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클라라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고, 또한 슈만(Robert Schumann:1810~1856)의 아내 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슈만은 젊은 브람스를 만나보고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음악계에 소개했고, 클라라 또한 남편 곁을 지키면서 브람스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브람스는 클라라를 음악의 뮤즈(Muse: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9명의 학문과 예술의 여신)로, 삶의 등대로 여겼다고 한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클라라. 하지만 그 사랑은 음악 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클라라는 워낙 빼어난 미모와 기품 있는 태도에, 음악적 재능까지 특출했기 때문인지, 일찌감치 14살 무렵부터 9살 연상인 로베르트 슈만과 사귀기 시작했는데, 이를 눈치 챈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 하고 1840년 21살의 나이에 슈만과 결혼하게 된다. 이는 공교롭게도 시대는 달라도 정운 이영도 역시 클라라와 같은 21살의 나이에 결혼했던 것이다. 클라라와 브람스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음악과 인생을 나누게 되었고, 다만 어떤 순간에도 그 경계를 허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브람스는 독신으로 살았고, 클라라 역시 남편 슈만이 죽은 이후에도 브람스를 '영혼의 친구'로 간직하며 살게 된다. 브람스는 슈만이 양극성 장애(조울증) 로 입원해 있을 때도 슈만의 가정을 돌보면서 클라라와 아이들을 지원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브람스와 클라라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좋은 감정을 품게 되었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 면서 존경과 애정을 담았다고 한다. 그뒤, 슈만이 죽은 뒤 두사람은 수십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음악에 대해 공유하고 응원 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음악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두사람의 관계가 '깊은 우정이었는지, 연애였는지' 에 대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브람스는 클라라를 '내 영혼의 빛'이라고 부르 면서 애정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클라라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는데, 아쉽게도 슈만 사후 몇년간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는 불태워지고 없고, 일부만 남아 있는 편지에서 이들의 사랑이 깊은 신뢰와 애정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람스의 음악에는 클라라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그중 <인터메초 OP, 118-2>는 세간에서도 공공연하게 '브람스의 러브레터'라 할 정도로 클라라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나는 곡이다. 클라라 역시 브람스의 음악을 누구 보다 잘 이해했고, 곡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연주했다고 한다. 클라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음악은 말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에 이르러 있군요! 당신의 마음이 그대로 흐르고 있어요!" 이들의 사랑은 끝내 닿지 못했기에, 더욱 절절했고, 가슴 깊이 음악인의 내면에 녹아 있는 듯하다. 브람스는 그의 63번째 생일에 베이스 성부와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änge>를 완성 했는데, 이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에서 가져 온 가사로, 모든 세속적인 일의 허망함을 다루면서 근심과 고통의 구원자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관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다. 다만,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가사를 따온 마지막 노래에서 브람스는 사랑의 힘을 열광적으로 찬양했는데, 이 작품은 병세가 심각해진 클라라 슈만에 대한 사려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무렵 브람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친한 벗(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인 그녀와의 만남은, 브람스에게 "가장 커다란 풍요와 가장 고귀한 만족을 가져다 준,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경험"이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녀를 잃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나 할까. 결국 1896년 5월 20일, 클라라는 죽음을 맞았는데, 브람스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무리하게 밤 열차로 가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열차를 놓치는 바람에 장례식 참석을 포기하고, 클라라가 남편 슈만과 나란히 묻힌 본(Bonn) 으로 갔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 이후 브람스 역시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을 자주 찾아야 했으며, 심각한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합창 전주곡 Eleven Chorale Preludes> 곡을 작곡했는데, 그 마지막 곡은 판타지아 <오 세상이여, 나는 그대를 떠나야만 하네, O, Welt, ich muss dich lassen>이다. 브람스는 그 이듬해인 1897년 3월, 연주회에 마지막 모습을 드러낸 후 4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결코 표현될 수 없을 법한 두사람의 감정, 음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랑보다 더 진솔한 고백!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한번도 '사랑' 이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그 절제된 감정이입 그 자체가 오히려 더 숭고한 사랑의 결정체가 아니었을까? 작금의 세태에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고, 막장 드라마가 독버섯처럼, 마약과도 같이 공공연하게 번지고 있다. 이 모두가 사랑과 믿음이 없는 불신의 소산일 것이다. 성경에서도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다. 그렇다! 그 많은 사랑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랑은 역시 나라 사랑일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의 노래가사처럼, 오로지 나라사랑, 겨레사랑 애국심으로 해란강가를 누비던 고귀한 선열들! 올 한해 우리 사회 전반에 사랑의 향기가 이른 아침 물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나길 고대해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는 왜 또 그렇게 오버랩 되는지! '클라라와 브람스', 그리고 '청마와 정운의' 플라토닉하고도 절제된 종류의 사랑 또한 많아지기를 갈망해 봄은 필자만의 과욕일까?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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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4] 客窓寒燈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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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3] 客窓寒燈 -후회는 결코 앞서지 않는다
- <후회는 결코 앞서지 않는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를 되새기자! 어느 고등학교의 교실 벽에 걸린 급훈! "후회는 앞서지 않는다!" 우리가 학창시절에는 늘 그러하듯, 무심코 지나칠 법한 글귀건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가지 선택을 해야 되고, 또 그에 대한 결과를 경험하다 보니, 이 급훈의 의미가 다시한번 무겁게 뇌리에 맴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이 말은 "돌아오는 빛이 다시 비친다!"는 뜻으로, 중국 고전이나 문학 작품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빛남'을 상징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석양(夕陽)이 지기 직전에 잠깐 반짝이는 하늘 빛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해질녘에 붉게 물든 석양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음이라.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이나, 신라의 경애왕 등은 국운이 기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쾌락과 허영에 탐닉하다 패망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이 말 또한 한마디로,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나부터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옛 선현들은 자주 이 사자성어로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과 같은 신독(愼獨: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감) 으로 삼았다고 한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조고각하(照顧脚下)! 그래서 회광반조는 삶의 매순간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자신을 돌아 보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하겠다. 그리고 해질녘 노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또 불가(佛 家)에선 '밖으로 향한 시선을 안으로 돌린다!'라는 뜻으로, 옛 선승들이 제자를 가르칠 때, "세상 사람들은 눈을 뜨고 바깥 세상의 현상만 쫓느라 정신이 없구나! 그러니 번뇌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회광반조는 자아에 대한 성찰적 의미이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거나 세상의 문제를 비판하는데 익숙하던 것을, 자신을 돌아 보라는 의미로,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등 끊임없는 자기 질문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겠다. 조고각하(照顧脚下)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 때 '오조법연(五祖法演1024~1104, 중국 선종 제 47대 조사)'이 제자 셋과 함께 밤길을 걷는데, 갑자기 들고 있던 등불이 꺼졌다. 이때 오조법연은 세사람의 제자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첫번째 제자 曰, '채색 바람에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출 것이다."라고 했고, 두번째 제자는, '쇠뱀이 옛길을 건너 가네(?)'라는 답을 했다 하고, 마지막 제자가 바로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이 꺼져서 어두워진 김에, 이참에 자신의 과오를 천천히 되돌아 보라!'는 의미가 되겠다. 이말 또한 불가(佛 家)에서 수행의 기준으로, 끊임없이 나의 과오를 돌아보며 정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말이다. 필자도 한때 '국궁(國弓)'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는데, 활쏘기, 특히 국궁에는 집궁 8원칙(執弓8原則)이 있다. "선관지형(先觀地形) / 후찰풍세(後察風勢) / 비정비팔(非丁非八) / 흉허복실(胸虛腹實) 전추태산(前推泰山) / 발여호미(發如虎尾) / 발이부중(發而不中) / 반구제기(反求諸己)"라. "먼저 지형지물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바람의 방향을 살펴라. 자세는 고무래 정자도 아니고 여덟 팔자도 아닌 어깨 넓이만큼 적당한 자세를 취하라. 먼저 활 시위를 당길 때는 태산을 밀듯한 기세로 잡아 당기고, 화살을 놓을 때는 무서운 호랑이 꼬리를 내치듯 부지부식간에 놓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녁에 명중하지 않았다면, 네 자신에게서 그 잘못을 찾아 보라!" 이 마지막 구절의 반구제기(反求諸己)는 맹자(盟子)의 공손추(公孫추)편에 나오는 말이다. 또 우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수원수구(誰怨誰咎)'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도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스스로를 돌아 보며 책임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가톨릭에서도 이런 류의 글귀가 시선을 끌게 한다. "mea culpa, mea culpa, mea maxima culpa!" 이 말은, 원래 가톨릭 미사(참회의 기도)에서 유래한 경건한 고백문으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사용하는 라틴어의 표현으로, 단순한 사과를 넘어 깊은 반성과 책임의식을 담고 있기에, 정치, 종교, 그리고 대중문화 등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정치인이든, 기업가이든, 상대가 비난 받는 일에 쌍수 들고 앞장설 게 아니라, 나부터 돌아 보며 자기 반성의 자세를 보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작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한 책임 전가나 위선(僞善)행위들이 도를 넘은 것 같아 심히 안타깝다. 또한 개인이나 조직 그리고 국가 또한 성공이나 흥함이 영원하지 않기에, 늘 경각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올해는 丙午年 붉은 적토마의 해이다. 석양 녘에 잠깐 반짝하는 삶이 아니라, 매순간을 마지막처럼 여기고, 돌다리를 건너듯 자신을 돌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후회함이 덜한 한해가 되길 염원해 본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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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3] 客窓寒燈 -후회는 결코 앞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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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2] 客窓寒燈 - 조선시대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럽다?
- < 조선시대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럽다? 장애인도 당당하게 정승 반열에 올라! > 유교(儒敎)와 성리학(性理學)으로 길들여진 조선(朝鮮). 서얼차대(庶孼差待:서출자를 정실자와 차별)와 반상(班常)의 관계 등 신분 사회로 알려진 조선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러움을 자아낸다. 물론 이는 양반계층에 집중된 것이기는 하지만, 장애의 유형에 관계 없이 능력과 의지만 있으면 과거시험 을 통해서, 말단(末端)인 종9품에서 정승 벼슬인 정1품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례를 보면, 황희(黃喜:1363~1452)정승과 허조(許稠:1369~1439)정승은 조선시대를 통털어서 모두 세종을 섬기면서 정사를 도와 태평성대를 이룬 명재상들이다. 허조는 척추장애인(꼽추)으로, 오늘날 휠체어를 타거나 시각장애를 가진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은 드물게 있지만, 척추장애나 왜소장애를 가진 고위 공직자는 보기가 어렵다. <광해군 일기>1609년(광해1)2월 18일 기록에, "국가에서 정승을 두는 것은 오직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데 있을 뿐, 다리 힘의 강약은 본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보행장애(걷지 못하는)를 가진 심희수(沈喜壽:1548~1622)는 선조와 광해군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 그리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기까지한 장애인이었다.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심희수와 기생 일타홍(一朶紅:한떨기 꽃)의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이렇게 전한다. "기생 일타홍은 장애로 인해 방황하던 심희수를 학문에 매진하도록 해서 과거에 급제까지 시켰지만, 그녀는 일찍 죽어, 뒷날 심희수 부부 옆에 묻혔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심희수와 부인 광주 노씨의 쌍분(雙墳)좌측에, '일타홍금산이씨지단(一朶紅錦山李氏之壇)'제단이 있다. 심희수에 관한 기록으로는, <광해군 일기 중초본>1613년(광해5)5월 18일에, "심희수가 입시하였으나, 앉은뱅이 증세가 있어 왕이 중관(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오르내리도록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뒤 심희수는 장애를 핑계로 5차례나 사직서를 올렸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 때 소론의 영수였던 파평 윤씨 윤지완(尹趾完:1635~1718)은 한쪽 다리가 없어 '일각정승(一脚政丞)으로 불렸다. 그는 동상(冬傷)이 악화되어 다리를 절단했고, 걸을 수가 없어 사직을 원했지만, 그를 신임했던 숙종은 부축을 받아서라도 속히 입궐하라고 했다 한다. <숙종실록>1694년(숙종20)윤5월 28일 기록에, 우의정 윤지완이 상소를 올려, "다리의 병이 심하여 대궐의 섬돌에 오르내리며 출입하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면직시켜 주소서!" 라고 아뢰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 "이미 출입할 때 부축받으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어찌 사양하기를 이렇게 까지 하는가? 경은 내일 아침에 나오라!" 고 재촉했다.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조부인 홍현보(洪鉉輔:1680~1740)는 말못하는 언어장애인(벙어리)이었다. 홍현보는 1718년(숙종44)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으나, 풍산홍씨 집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외손인 정조(正祖)와 맞섰고,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부친인 홍봉한 (洪鳳漢:1713~1778)과 숙부 홍인한(洪麟漢:1714~1775)은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극렬하게 반대하다 홍인한은 정조가 즉위하자 처형 당했다. <영조실록>에는 홍현보를 낮게 평하고 있다. 1740년(영조16)윤 6월 10일 기록에, "홍현보는 젊어서 급제하였으나, 병을 앓다가 언어장애(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했고, 재능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전주 이씨 이민서(李敏敍: 1633~1688)는 정신착란을 일으켰지만, 벼슬에서 쫒겨나기는커녕 오히려 중용되었다. <현종개수실록>1670년(현종11) 10월 23일 기록에, "이민서를 고양군수로 삼았다. 옥당(玉堂:홍문관)에 근무할 때 여러날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미치광이 병이 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해괴했다는 말을 들어 조정에 있다가 불안하여 외직을 맡았다!"고 했다. 지조가 곧고 문장이 탁월했던 그는 곧 다시 서울로 불려왔다. <숙종실록>1688년(숙종14)2월 2일 이민서 졸기(卒記)에는,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던 자라도 정직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왕들도 장애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도 많았다. 숙종(재위1674~1720)은 시각장애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숙종실록>1717(숙종43)7월19일 기록에, "지금 왼쪽 안질(眼疾)이 더욱 심하여 전혀 물체를 볼 수가 없고, 오른쪽 눈은 물체를 보아도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 소장(疏章:상소)의 잔글씨는 마치 백지를 보는 것과 같고, 비망기(備忘記:임금이 명령을 적어 승지에 전하는 문서)의 큰 글자도 가까이에서 봐야 겨우 판별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분명히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소연 했다. 선조(재위 1567~1608)도 정신병으 로 고통 받았다고 한다. <선조실록>1598년(선조31)2월 5일 기록에 선조는 비망기를 통해, "심질(心疾:정신병)이 더욱 심해져 전광증(顚狂症:조현병)으로 크게 부르짖으며, 사람과 사물을 살피지 못하니 놀라 탄식 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의 장애인은 자신만의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고 결혼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다만, 왜소한 신장을 가진 장애인이나 팔다리가 없는 지체장애인 그리고 신분이 낮고 재력이 없는 장애인은 혼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가족 부양을 원칙(자급자족의 가족사회) 으로 했으나, 국가 차원의 장애인복지 정책으로, 군역 등 국가의무 면제(독질 및 폐질자 신역 면제)와 장애인이 중범죄를 범했더라도 정상을 참작 (살인자도 형벌 등급을 낮추어 유배형으로 하고, 역모죄에 연루되더라도 처벌 면제)하도록 했다. 최근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길 시위로, 지하철4호선 혜화역 하행선이 무정차 통과'라는 뉴스가 뇌리를 맴돈다. 내용인즉 '장애등급제 폐지 촉구와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 촉구(예산 없이 권리없다)'를 위한 지하철 선전전 (宣傳으로 서로 자기편의 이익을 꾀하거나 주의 및 주장을 펴기 위한 경쟁)시위인데, 이날로 벌써 973일째라고 한다.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것은 결코 바람직 하진 않지만, 무대책으로 방관하는 당국의 자세도 또한 결코 온당하지 못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GDP 대비 장애인 복지예산이 OECD국가의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평생을 복지 전문가로 살아온 필자이기에, 더더욱 할말을 잃게 한다. 미국은 복지국가의 반열에 들지도 못하지만, 록키산 중턱에 장애인 전용 낚시터가 있다. 물론 장애인이 이곳에 와서 낚시를 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는 장애인의 니드(need)에 대한 접근권의 보장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식도 심각한 수준이다. 언제까지 장애인들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시위에 나서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조선시대로 돌아가 사는게 장애인들에겐 더 합당한 복지가 되지 아니할까? 범 국가차원의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장애인 복지대책이 시급하고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원문대로 옮기기 위해 장애인에 대한 용어를 비속어로 표기해서 유감임을 밝힙니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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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2] 客窓寒燈 - 조선시대의 장애인 복지 수준이 오히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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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1] 客窓寒燈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에비타, 그녀는 聖女인가, 惡女인가?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 곡은, 뮤지컬 에비타(Evita)의 대표곡으로, 1996년 마돈나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에비타>의 사운드 트랙을 통해서 그녀의 목소리로 재해석된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제목에서처럼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에게 전하는 '에바 페론'의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있어, 감동적인 멜로디와 진정성 있는 가사가 특징이라 하겠다. 지금도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로, 성녀(聖女)로 추앙 받고 있는 에바 페론! 그녀의 본명은 "에바 두아르테 페론(1919~1952, Eva Duarte Peron)"이다. 에바(에비타)는 1919년 유부남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사생아 중의 넷째이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고, 사생아 신분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5살 때 배우의 꿈을 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출한 후,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연극배우와 성우 등의 연기 생활을 하다, 1944년 아르헨티나의 '산후안'에서 1만명이 사망한 대지진 현장에서 지진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행사에서 이재민 구호기금을 마련하고 있는 운명의 남자인 '후안 페론(당시 노동부장관)'을 만나게 된다. 당시 후안 페론은 첫번째 아내와 사별 한 상태로, 25살의 에비타에 반해 1945년부터는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안 페론은 노동부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이듬해인 1946년 6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에바는 그후 6년 동안 영부인으로서, 주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발언을 통해, '친페론주의' 노동조합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에바는 영부인이 된 후에 후안 페론 대통령 못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는데....., 그녀는 노동부와 보건부를 통해 자선단체인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학교와 병원, 양로원 등을 세우고 각종 자선사업을 실시하면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그녀는 병원을 직접 방문하여 나병 환자와 매독환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성녀(聖女)로 추앙 받게 된다. 사실 에바 페론은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성녀형 카리스마 유혹자'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모와 함께 처세술 또한 탁월했던 것 같다. 에바는 종교와 드라마를 활용한 '성녀형 카리스마'를 가진 유혹자임이 여기 저기에서 드러난다. 드라마 전문 작가를 고용하여, 드라마틱한 포퓰리즘적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능수능란한 연설에서, 또 자신이 실제로 빈민층에게 보여지는 구제 활동에서 전문 촬영작가들을 대동하여 영상화 하고, 나병 환자나 매독 환자의 뺨에 입맞춤 하면서 성녀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는 등의 퍼포먼스가 그녀의 가려진 진면목 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부금을 거두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죽어가면서도 성녀의 이미지를 잃지 않고, 독재를 이어가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에바페론 재단은 1940년 대 후반에 약 300억 패소(한화 2,363억원)의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자금으로 14,0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매년 40만 켤레의 신발과 50만개의 재봉틀, 그리고 20만개의 냄비를 구입하여 빈민가에 나눠주는 등 이른바 '에바 시티'를 건설하기 위한 구상을 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유럽 여행을 핑계로, 스위스에 은행 계좌를 개설하여, 페론 재단의 기금은 모두 스위스 은행 계좌로 들어 가게 했고, 에바 페론은 이를 개인 계좌처럼 사용하면서 사치를 즐기게 된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여성 참정권 옹호에도 앞장 섰으며, 여성 정당인 '여성페론주의당'을 만들기도 했다. 드디어 1951년,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페론주의' 를 발표하게 된다. '페론주의(Peronism)'로 잘 알려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부부정책은, 중산층을 육성하고, '개혁을 추구한 선구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페론주의는 그녀의 정치 기반인 저소득층과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또는 "셔츠 없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때의 산스쿨로트와 유사) 페론주의는 남미대륙의 포퓰리즘의 원조격으로,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a'vez 베네수엘라 제64대 대통령)'같은 지도자들도 페론주의에 학습된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그녀는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의 반대와 건강이 악화되자, 결국 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후안 페론은 1951년 연임에 성공하게 되나, 애석하게도 영부인 에바 페론은 이듬해인 1952년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후안 페론의 첫 부인인 '오렐리아'도 36살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후안 페론이 자궁경부암 유발 바이러스로 알려진, HPV(인유두종 바이러스)보균자였다고는 하나, 그 상관관계는 밝혀진게 없다. 후안 페론은 에바 페론이 죽기 전에 주치의로부터 자구경부암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으나, 부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유는 성녀로 추앙 받는 에바 페론이 자신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1955년, 아르헨티나는 경제 사정이 악화됨으로 인해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후안 페론은 실각되었고, 그는 망명 생활을 전전하다 만난, 세번째 아내인 마르티네스 이사벨과 스페인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거듭되는 정정 불안과 경제난에 허덕이던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다시금 페론주의의 향수를 불러 오게 되었고, 이런 분위기 덕분에 후안 페론은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973년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974년 79세로 사망하자, 당시 부통령이던 그의 세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다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페론주의에 편승한 에바 페론의 성녀화는 계속되었고, 그녀가 사망한지 60주기이던 2012년에는 에바 페론이 들어간 100페소짜리 한정판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그뒤 2018년부터는 아르헨티나의 100페소 지폐에 에바 페론의 얼굴이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같이 에바 페론의 행적이나 정치 이력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성녀로, 국모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음이 너무나 놀랍고도 부러움을 자아낸다. 우리는 언제쯤 영부인 얼굴이 들어간 지폐를 얄팍한 내 지갑에서나마 볼 수 있게 되려나!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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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성 칼럼 21] 客窓寒燈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