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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성 칼럼 21] 客窓寒燈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어머니>   에비타, 그녀는 聖女인가, 惡女인가?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 곡은, 뮤지컬 에비타(Evita)의 대표곡으로, 1996년 마돈나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에비타>의 사운드 트랙을 통해서 그녀의 목소리로 재해석된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제목에서처럼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에게 전하는 '에바 페론'의 감정이 고스란히 실려있어, 감동적인 멜로디와 진정성 있는 가사가 특징이라 하겠다. 지금도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로, 성녀(聖女)로 추앙 받고 있는 에바 페론! 그녀의 본명은 "에바 두아르테 페론(1919~1952, Eva Duarte Peron)"이다. 에바(에비타)는 1919년 유부남 '후안 두아르테'와 그의 정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사생아 중의 넷째이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고, 사생아 신분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5살 때 배우의 꿈을 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출한 후,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연극배우와 성우 등의 연기 생활을 하다, 1944년 아르헨티나의 '산후안'에서 1만명이 사망한 대지진 현장에서 지진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행사에서 이재민 구호기금을 마련하고 있는 운명의 남자인 '후안 페론(당시 노동부장관)'을 만나게 된다. 당시 후안 페론은 첫번째 아내와 사별 한 상태로, 25살의 에비타에 반해 1945년부터는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안 페론은 노동부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이듬해인 1946년 6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에바는 그후 6년 동안 영부인으로서, 주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발언을 통해, '친페론주의' 노동조합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에바는 영부인이 된 후에 후안 페론 대통령 못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는데....., 그녀는 노동부와 보건부를 통해 자선단체인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학교와 병원, 양로원 등을 세우고 각종 자선사업을 실시하면서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그녀는 병원을 직접 방문하여 나병 환자와 매독환자의 뺨에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성녀(聖女)로 추앙 받게 된다. 사실 에바 페론은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성녀형 카리스마 유혹자'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모와 함께 처세술 또한 탁월했던 것 같다. 에바는 종교와 드라마를 활용한 '성녀형 카리스마'를 가진 유혹자임이 여기 저기에서 드러난다.   드라마 전문 작가를 고용하여, 드라마틱한 포퓰리즘적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능수능란한 연설에서, 또 자신이 실제로 빈민층에게 보여지는 구제 활동에서 전문 촬영작가들을 대동하여 영상화 하고, 나병 환자나 매독 환자의 뺨에 입맞춤 하면서 성녀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는 등의 퍼포먼스가 그녀의 가려진 진면목 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부금을 거두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죽어가면서도 성녀의 이미지를 잃지 않고, 독재를 이어가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에바페론 재단은 1940년 대 후반에 약 300억 패소(한화 2,363억원)의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 자금으로 14,0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매년 40만 켤레의 신발과 50만개의 재봉틀, 그리고 20만개의 냄비를 구입하여 빈민가에 나눠주는 등 이른바 '에바 시티'를 건설하기 위한 구상을 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유럽 여행을 핑계로, 스위스에 은행 계좌를 개설하여, 페론 재단의 기금은 모두 스위스 은행 계좌로 들어 가게 했고, 에바 페론은 이를 개인 계좌처럼 사용하면서 사치를 즐기게 된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여성 참정권 옹호에도 앞장 섰으며, 여성 정당인 '여성페론주의당'을 만들기도 했다. 드디어 1951년,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페론주의' 를 발표하게 된다. '페론주의(Peronism)'로 잘 알려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의 부부정책은, 중산층을 육성하고, '개혁을 추구한 선구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독재정치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페론주의는 그녀의 정치 기반인 저소득층과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데스카미사도(descamisado), 또는 "셔츠 없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때의 산스쿨로트와 유사) 페론주의는 남미대륙의 포퓰리즘의 원조격으로,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a'vez 베네수엘라 제64대 대통령)'같은 지도자들도 페론주의에 학습된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그녀는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의 반대와 건강이 악화되자, 결국 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인 후안 페론은 1951년 연임에 성공하게 되나, 애석하게도 영부인 에바 페론은 이듬해인 1952년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게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후안 페론의 첫 부인인 '오렐리아'도 36살에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후안 페론이 자궁경부암 유발 바이러스로 알려진, HPV(인유두종 바이러스)보균자였다고는 하나, 그 상관관계는 밝혀진게 없다. 후안 페론은 에바 페론이 죽기 전에 주치의로부터 자구경부암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으나, 부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유는 성녀로 추앙 받는 에바 페론이 자신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1955년, 아르헨티나는 경제 사정이  악화됨으로 인해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후안 페론은 실각되었고, 그는 망명 생활을 전전하다 만난, 세번째 아내인 마르티네스 이사벨과 스페인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거듭되는 정정 불안과 경제난에 허덕이던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다시금 페론주의의 향수를 불러 오게 되었고, 이런 분위기 덕분에 후안 페론은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973년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974년 79세로 사망하자, 당시 부통령이던 그의 세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다 정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페론주의에 편승한 에바 페론의 성녀화는 계속되었고, 그녀가 사망한지 60주기이던 2012년에는 에바 페론이 들어간 100페소짜리 한정판 지폐가 발행되기도 했다. 그뒤 2018년부터는 아르헨티나의 100페소 지폐에 에바 페론의 얼굴이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같이  에바 페론의 행적이나 정치 이력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도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성녀로, 국모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음이 너무나 놀랍고도 부러움을 자아낸다. 우리는 언제쯤 영부인 얼굴이 들어간 지폐를 얄팍한 내 지갑에서나마 볼 수 있게 되려나!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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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8
  • [강호성 칼럼 20] 客窓寒燈 - 고려보다 노국대장공주 왕비를 더 사랑한 공민왕
         <고려보다 노국대장공주 왕비를 더 사랑한 공민왕>   그러나 그는 지도자로는 낙제점이었다! 세계사적으로 경국지색(傾國之色:임금이 미혹되어 나라가 위기에 빠져도 모를 정도로 미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은 많았다.  하지만 대개는 군왕이나 임금이 일시적으로 여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거나, 뒤늦게 깨닫고 위기를 극복 또는 모면해 왔다. 그런데 500년 역사의 고려가 멸망하게된 단초가 되었던, 공민왕(제31대,1330~1374)과 원나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1330~1365)와의 혼인은 고려와 원나라와의 '통혼정치(通婚政治)'의 일환이었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국가 간의 외교관계에 의한 통혼은  빈번했지만, 원나라와의 경우는 원이 고려를 침탈하여 무려 80년 동안이나 세자나 왕족들을 볼모로 원나라 수도에 잡아 두고, 원나라 공주들과 혼인시켜서, 부마국(駙馬國:사위의 나라)으로 삼았기 때문에, 상호간 침략이나 전쟁 방지 차원인, 일종의 안전장치로 작용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1341년 11살 때(당시 강릉대군 신분)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이때, 강릉대군(후의 공민왕)은 원나라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원나라 공주들은 고려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서 백성들에게까지 하대(下待:낮추거나 함부로 대함)해서 민심을 잃었지만 노국대장공주는 강릉대군을 진심으로 아꼈다고 한다. 그리고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과 함께 고려로 귀국한 뒤에도 남편의 정치개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조력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정략 결혼의 차원을 넘어, 진심어린 애정과 동반자적 관계로 보여지는 부분이다. 공민왕은 즉위 초 원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이른바 친원(親元)세력들을 숙청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특히 몽골풍의 복장과 변발(辮髮)을 금지시켰고, 빼앗겼던 북방의 영토 수복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이와같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변함없는 지지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공민왕은 성격면에서 매우 우유부단했던 탓에, 결정적인 순간에 우물쭈물 하거나, 흔들릴 때가 많았다. 때문에 또한 의심이 많아서 신하를 함부로 죽이거나 숙청을 자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는 단순한 내조에 그치지 않고 남편 공민왕이 흔들릴 때마다 따뜻한 조언과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원나라 출신이었음에도 고려의 자주성을 지지하고, 고려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왕비의 태도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도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후 공민왕 재위 15년차인 1365년, 개혁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던 때, 노국대장공주가 난산(당시로는 왕비의 나이가 30대라, 노산이었다) 끝에 태아와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15년간 공민왕비로, 그리고 고려인으로 살다 간 것이다. 사관(史官)이 기록한 고려사에 의하 면, 《공민왕은 즉위 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승려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功臣)과 현신(賢臣)이 참살되거 나 내쫓겼으며, 노국대장공주의 영전 건설같은 무리한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 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수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後賜)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嬖臣아첨 잘하는 신하)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자를 죽여 입을 막아 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공민왕의 운명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1374년 9월 22일, 환관 최만생이 후궁 익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누가 아비라더냐?"   "홍륜이라 하옵니다."   이에 공민왕은 절대로 발설해선 안될 계획을 말했다.   "내일 창릉을 배알할 때 짐짓 주정을 부려 홍륜 무리를 죽여 입을 막겠다. 너도 이를 알고 있으니 면치 못할 것이다!" 몽진(蒙塵)을 결정하고 절치부심 결전을 준비하던 공민왕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었다. 판단력마저 흐려졌던 그날 밤 최만생과 홍륜은 침전으로 들어가 잠자는 공민왕을 흉기로 내리쳤다. 이때 뇌수(腦髓)가 벽에까지 튀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공민왕의 죽음과 함께 고려국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고, 18년 뒤인 1392년 고려는 패망하고 말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마땅히 아내 사랑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인(公人)이거나 일국의 왕이라면, 아내 사랑도 중요하지만, 나라 사랑과 백성 사랑에 우선 방점을 두어야 한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고려를 자멸(自滅)로 이끈 공민왕의 허망한 죽음과 말로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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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4
  • [강호성 칼럼 19] 客窓寒燈 - 드라마틱한 삶을 산 안톤 체호프
      <드라마틱한 삶을 산 안톤 체호프>   의사로서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괴짜! 우리 속담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이말은, 아마도 남의 일은 현명하게 잘 해결하면서, 정작 자기 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함을 빗댄 말일게다.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大文豪)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는 러시아의 항구도시인 '타간로그'에서 식료품가게 를 운영하는 농노 출신의 아버지 '파벨'의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농노(農奴)출신이 었으나, 할아버지 대(代)에 자수성가 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체호프가 16살 사춘기가 한창이던 무렵인 1876년 아버지 파벨은 체호프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 가족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야반도주 (夜半逃走)하였다.   왜냐하면 사기를 당해 파산했기 때문 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악성 채무자는 범죄자로, 감옥에 가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피신한 것이다. 체호프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을 마무리하게 하기 위해 남았는데, 어린 체호프는 이때부터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져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 파벨은 평소에도 폭력을 일삼는 가장으로, 아내에게는 수시로 소리를 질러 대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체호프의 뺨을 때리기도 했으며, 스프가 짜다는둥, 집 청소가 안되어 있다는둥, 집안이 온통 혐오와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곤 했다. 그럼에도 그의 부친은 그림과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어, 지역 러시아정교회의 교회성가대를 조직하고 지도하였는데, 체호프는 7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 산하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형제들과 함께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때의 경험이 훗날 체호프가 저술한 많은 작품세계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안톤 체호프에겐 이 고등학교 시절이 힘든 시련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한다. 공부하는 동안 생계를 위해 노동현장 에서 노동자들과 부대끼면서도 즉흥적 으로 떠오른 콩트를 신문사에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가기도 했다. 체호프의 삶은 마치 거친 드라마와도 같았다고 할까.   그의 문학성은 그의 거친 삶의 궤적 과도 닮아,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라기 보다는, 야생에서 자란 들풀에 가까운, 즉 바람과 비, 그리고 햇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자연 그대로의 문학이라고 하겠다. 체호프는 명문 모스크바 의과대학 입학과 동시에 러시아의 유명 신문인 '노보예 브레미야'사(社)의 사주(社主) 인 "수보린"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체호프의 삶은 의사(醫師)로서의 삶과 작가(作 家)로서의 삶이 구분되지 않았다.   환자의 몸과 인간의 심리를 보듬고 있기 때문에, 이 양자의 직업이 서로 내통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할까? 그가 펜을 들었을 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냉철한 의사였고, 하얀 가운(gown)을 입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약자(弱者)를 보듬고자 하는 문인(文人)이었다. 특히, 체호프의 여성에 대한 표현은 마치 현미경을 든 의사마냥 모든 문인들이 드러내길 주저하던 여성의 욕망이 그의 원고지 위에서는 적나라하게 그대로 구현되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약사의 아내'나 '아가피아', '불행' 등이 이런 부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러시아 문학계가 그의 작품을 놓고, '외설적이다, 소설이 아니다.' 라고 비난하자, 체호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예술문학의 사명은 절대적이고 거짓 없는 진실에 있다!"  즉 진실하기만 하다면 문학은 더 이상 도덕적 판단의 영역이 될 수 없다고 항변한 것이다. 의사로서의 체호프는 어린 시절 생활전선에서 마주한 동료들과의 연민 때문엔지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어디든지 기꺼이 찾아가 무료로 진료해 주는 등 문학인의 여리고 섬세한 감성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체호프는 1897년부터 결핵으로 인한 각혈로 고생하게 된다.   의사로서의 체호프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증상을 자각했지만 신경 쓰지 않다가 점점 상태가 악화되자, 스스로 병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같이 그는 과로한 삶으로 인해, 결핵으로 죽은 그의 형처럼 결핵에 걸렸지만, 글쓰기와 진료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노보예 브레미야'사의 사주인 후원자 '수보린'이 진료를 멈추고 글쓰기에만 집중할 것을 권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의료는 저의 아내요, 문학은 저의 애인입니다!"  이말은 둘 다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절묘한 농담이었다. 이런 가운데 체호프는 1901년, 자신의 연극에 출연했던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자녀는 생기지 않았다.  아내인 크니페르는 결혼 후에도 배우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었고, 체호프는 요양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는데, 그 시기가 오히려 그에게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시기였다. 1904년 5월!   결핵은 끈질기게 체호프를 괴롭혔다.  그리고  1904년 7월 2일 밤, 체호프가 고열 등의 증세를 보이다가 벌떡 일어나서 독일말로, "나죽네!(Ich sterbe)"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며칠 뒤 결핵은 기어이 그를 삼키고 만다.  독일 바덴 바일러에서 독일인 의사가 그를 진료했으나, 얼마 안가서 의사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하기를, "마지막 가는 길에 샴페인을 주도록 하세요!"   이 말에 아내인 '올가'가 울음을 터뜨리며 샴페인을 따랐고, 샴페인을 입에 머금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얼마만에 마셔보는 샴페인인지!"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만44세!   러시아의 소설가로, 극작가로, 의사로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문호로 불리면서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체호프가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불가(佛 家)에서는 업장소멸(業障消滅)이란 말이 있다.   이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을 때, 그 사람들과 전생, 전전생에 얽혀 있었던 악업의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원리'를 말한다고 한다. 11월 13일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미래를 좌우할 '대학입학수학능력검정시험'이 있는 날이다. 조기교육 광풍(狂風)에, 부모세대의 허리를 휘게 하는 사교육에 우리의 귀한 꿈나무와 젊은이들이 너나없이 내몰리고, 휘둘리고 있다. 언제쯤이면 우리 자녀들이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공부해서 남주는(?) 멋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그런 때가 오기를, 학(鶴)의 목은 아니지만, 없는 목이나마 한껏 길게 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련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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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0
  • [강호성 칼럼 18] 客窓寒燈 - 운명(運命)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라이너 마리아 릴케! 운명이란 무엇인가? 스토아철학자들은, "세상은 보편적 법칙인 로고스(logos)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인간은 정해진 본질이 없이 태어나기에,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불가(佛 家)에서는 업(業)과 인과법 (因果法)에 따라 삶이 전개된다고 하면서도,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서 '업'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유가(儒 家)에서는 하늘이 내린 명(命)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실천과 수양으로 그 길을 넓힐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가(道 家)에서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곧 운명과 조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심리학자인 '프로이트(S.Freud)는 무의식과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반복되는 삶의 패턴을 만든다고 했다, '융(K.G.Jung)은 인간 내면의 원형이 특정 패턴을 형성하지만, '개성화 과정'을 통해 운명을 초월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모름지기 가을이다.   난 유독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기도로 시작하는 시인 ''가을날''을 좋아 한다.  Rainer Maria Rilke  Herr: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ss,   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 und auf den Fluren  lass die Winde las,   Befiehl den letzten Freuchten voll zu sein;   gieb ihnen noch zwei suedlichere Tage,   draenge sie zur Vollendung hin, und Tage die letzte Suesse in den schweren Wein.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Wer jetz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    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 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 unruhig wandern,    Wenn die Blaetter treiben.    -aus:Das Buch der Bilder(1902)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녘에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감미로움이 스며 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깨어나 책을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 길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스럽게 헤맬 것입니다.   (가을날은 릴케가 1902년 27살에 파리에서 쓴 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Rainer Maria Rilke)   그의 본명은 Rene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이다. 난 학창시절 릴케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그가 여성인 줄 알았었다.   왜냐하면 서양사람들의 이름 중에 중간 이름(middle name)은 대개 종교적인 세례명을 쓰게 되는데, 릴케의 중간 이름인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에서 따온 이름이기에, 당연히 여성인 줄 오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아마 릴케의 어머니가 외아들을 유별나게 키우고자 했던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누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죽게 되자, 릴케는 여자 이름에, 여자 옷을 입고 7살때까지 인형처럼 여자아이로 길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미들 네임이 마리아로 비정해 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그의 유년시절은 고독했고, 그때의 경험들이 훗날 릴케 시의 중심 세계인 '고독'으로 자리매김했을 수도 있다. 그가 9살 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져, 황제의 궁 가까이에 있으려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살았다. 그 뒤에도  릴케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일생동안 독일, 프랑스, 러시아, 체코, 이태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를 떠돌며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조각가인 로댕(Auguste Rodin)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때 로댕에게 사사한 브레멘 출신의 조각가인 '클라라 베스토프(Clara Westhoff)'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그해 말에 헤어져 각자 서로의 길을 갔다고 한다. 이와같이 방랑시인이자 고독한(?)시인 릴케는 고독과 허무와 싸우면서도 1910년 일기 형식의 소설인 <말테의 수기(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를 발표했는데,   이는 덴마크의 젊은 시인 말테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파리에서의 죽음과 불안에 대한 생각들을 기초로 하여 쓴 일기형식의 산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그의 몸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던 것 같다.    백혈병에 걸린 것도 모르는 사이 몸은 점점 원기를 잃어 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말테의 수기'를 읽고 그를 흠모하여 찾아온 이집트 여인에게, 평소 그가 좋아하고 가꾸던 장미꽃을 꺾어주려다가 그만 장미 가시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말았다. 급기야 릴케는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스위스의 어느 호숫가 외딴집에서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나이 51세! 릴케가 장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의 '묘비명'만 봐도 짐작이 간다. "Rose, oh reiner Win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ndern."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운(運)은 사람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나야, 좋은 운이 만들어 진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직감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또한 운명을 스스로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좋은 운명으로 키워갈 수 있겠다. 릴케는 그의 시 <가을날>을 통해 우리의 삶에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이 가을에 어떤 열매를 익히고 있느냐고!' 운명은 우리의 가을을 여물게 하기도 하고, 또 후회로 남게 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운명 앞에 맞서서 묵묵히 나의 길을 가야 하겠다! "비켜라! 운명아, 내가 나간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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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7
  • [강호성 칼럼 17] 客窓寒燈 - 인간수명(壽命)150歲 시대의 유혹
      <인간수명(壽命)150歲 시대의 유혹>   "영원한 꿈일까, 현실이 될까?"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열병식과 함께 거행된 중국의 제80주년 전승절 (戰勝節:제 2차 대전 승리 기념일)에 세계 각국 26명의 국가 원수와 정부 수뇌들이 참석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탄바 있다. 이날의 으뜸 화두(話頭)는,  중국의 시진핑(XiJinping, 習近平 :1953. 6. 15)주석과 러시아 푸틴 (Vladimir Putin :1952. 10. 7) 대통령의 대화 내용이다. 물론 두사람은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사실은 hot mic:발언 당사자가 마이크가 켜진 사실을 모른채 나눈 사담이나 발언이 방송을 통해 그대로 공개되는 상황), 사적(私的)인 대화를 이어 갔다는 데....., (시진핑)"과거에는 사람들이 70세 이상을 사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70세가 되면 여전히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푸틴)"인간의 장기는 지속적으로 이식될 수 있습니다. 오래 살수록 젊어지고 (불멸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시진핑)"어떤 사람들은 금세기에 인간이 최대 150세까지 살 수 있다고 예측합니다." 위 대화 내용이 정확하게 들리진 않았다고 했지만, 핵심 내용은 '불멸과 영생'에 관련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대화의 키워드는 "장기 이식과 장수, 그리고 불멸"이었다고 한다.   푸틴은 바이오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수명과 젊음을 유지하게 만들 것이라 고 강조했고, 시주석은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며 "150세"라는 숫자를 언급 해서 화제가 된 것이다. 두 나라의 정상인 이들은 만(滿)으로는 동갑인 72세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이자 욕구이다.  그러나 이들은 왜 하필 이 중요하고도 짧은 행사 시간에 이런 류의 대화를 했을까? 이는 단순한 친교적인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두 정상이 나이와 권력을 동시에 의식한 듯한 진지한 태도가 세계적인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시주석은 2012년 이래 13년째 1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고, 푸틴 대통령 역시 2000년에 집권한 이래로, 지난 해 5연임을 확정지어, 현대판 '차르'로 군림하고 있다. 전 세계인의 평균 수명은 2023년 기준으로 72.6세인데, 중국인의 평균 수명은 2024년 기준 78.6세(남성76,0세,여성81,4세)이고,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약 70.0세 (여성77세, 남성 62세)에 불과하다.   두 나라의 평균 수명은 우리나라 83.0세(남성80,0세, 여성86,0세)는 물론 선진국들(80세이상)보다는 훨씬 못미치는 수치이다.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최장수 기록 (기네스 북 공식 기록)은 프랑스의 잔 칼망(Jeanne Louise Calment: 1875~1997)여사로, 그는 122세 까지 살았다고 한다. 물론 , 구약 창세기 때의 '므두셀라'는 백팔십칠세에 '라맥'을 낳았고, 라맥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내면서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969세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성경상으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평균 수명은 의료기술의 발전과 영양수준의 향상, 그리고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 각국에서 '수명연장연구' 또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구글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그들이 세운 바이오 기업인 '칼리코(Calico)'에서 벌거숭이 두더지쥐(학명Heterocephalus glaben)실험을 통해 유전자를 변이시켜, 인간 수명을 12년 연장할 수 있는 연구에 성공했다는 핫 뉴스다! 문제는 수명연장 연구로 인해 사회적 부작용과 과학적, 윤리적 문제를 결코 경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화'를 없애거나 되돌릴 수는 있을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노화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라,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본다. 때문에 현재의 과학으로는 노화를 근본적으로 막거나 불로장생에 이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만약, 인간수명이 150세까지 연장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생산연령인구는 현재의 절반 이하로 감소할테고,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과 생산성 또한 급격 하게 둔화될 것이 뻔하다. 더불어 초고령화로 인한 소비 감소와 자본 생산성 저하에 따른 투자 위축 등으로, 우리 사회는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수명연장연구와는 별개로, 누구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건강수명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1601년 영국 구빈법(The Elizabethen poor law of 1601)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죽기 직전,  "나를 하루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대영제국의 절반을 주겠다!" 고까지 했다. 또한, 고대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 (不老長生)을 위해 불로초와 불사약을 구하고자 허황된 일을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생활에 중요한 것은 건강한 삶이다.   규칙적인 운동이나 균형 잡힌 식단, 그리고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스트레스 관리 등을 통해 고종명(考終命 오복의 하나)하는 것이 진정 복된 삶일 것이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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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3
  • [강호성 칼럼 16] 客窓寒燈 - 화산은 살아 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상기(想起)하자!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지난 7월 30일 진도 8,8의 초대형 강진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8월 2일에는 '크라세닌니코프' 화산이 폭발하였는데. 전문가들은 7월말의 초강진이 원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크라세닌니코프 화산은 지난 600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휴화산이었는데, 화산재가 6km 상공까지 치솟았고, 먹구름을 뭉친 듯한 거대한 잿빛 연기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초강진이 발생했던 지난 7월 30일에는 캄차카의 또 다른 화산인 '글류쳅스카야' 화산도 용암을 뿜어 냈다.  '캄차카 화산군(火山群)'은 캄차카 지방에 몰려 있는 화산대(火山帶)로, 일본 열도에서 쿠릴 열도로 이어지는, 이른바 "환태평양(環太平洋) 불의 고리(ring of fire)"이다. 인류 역사상 화산 폭발로 인한 최대의 참극은 이탈리아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을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폼페이는, 기원 전 60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로마 세계의 영웅이 되었음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탈리아 사르누스 강 하구에 자리 잡은 폼페이 도시국가는 로마보다 먼저 세워진 인구 3만여명의 계획 도시로,  천혜의 경관과 겨울이 짧은 반면 봄여름이 긴 쾌적한 기후라, 비옥한 토양과 수자원이 풍부한 덕분에 농업 또한 발달되었다. 또한 폼페이는 외지로 이어지는 바닷길 덕분에 교역이 활발했고, 그 때문에 이곳을 노리는 민족이 많아, 처음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출발한 후, 그뒤 삼니움족의 영지가 되었다가, 기원 전 89년 로마에 침략 당한 후 로마로 귀속되었다. 서기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이태리 남쪽 나폴리만 연안의 고대 도시 폼페이에 때 아닌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굉음(轟音)의 진원지는 나폴리 동쪽 12km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천년 이상동안 침묵하던 화산이 갑자기 분화한 것이다. 화산 폭발 당일, 시민들은 평소와 같은 가벼운 지진으로 생각하고 대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끼 돼지를 잡아 양념한 후 오븐에 넣으려던 여인, 밀가루 반죽을 밀어 빵을 빚던 제빵사, 해변에 누워 더위를 식히던 귀족까지도 재앙적인 화산이 폭발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위력은 40km가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연기를 내뿜으며, 용암 덩어리가 흘러내리면서 곳곳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었다. 폼페이 도시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라, 바람을 타고 온 화산재가 치명적이었다. 18시간에 걸쳐 100억톤이 넘는 화산재가 삽시간에 온 도시를 뒤덮고 말았다. 화산 폭발의 가장 큰 원인은 지구 내부의 판 구조운동 때문이라 한다.   지각은 여러개의 판(tectonic plates)으로 나누어져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들이 충돌하거나 갈라질 때 지하 깊숙한 곳의 마그마(magma)가 지표로 솟아 오르게 된다. 그 원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판의 경계 충돌이다.  해양판과 대륙판이 충돌하면 해양판이 밑으로 가라 앉아 마그마를 생성하게 된다는데, 대표적인게 일본 열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이다. 둘째로는 열정(Hot Spot)인데, 이는 지각 아래의 특정 지역에서만 뜨거운 마그마가 솟아나는 현상이다. 하와이가 이에 해당된다. 셋째로는 지각이 갈라지는 현상이다. 판이 서로 벌어지면서 마그마가 올라 오는 것을 말하는데, 아이슬란드나 대서양 중앙 해령이 해당된다. 화산 폭발은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수개월 전부터 미세한 지진이나 지반 융기, 가스 배출 등을 통해 감지되거나 예고되기도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의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화산으로는, 미국 하와이의 킬라우에아(kilauea)화산과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에트나(Etna)화산, 일본의 사쿠라지마 화산(가고시마현)은 1955년 이후 매년 수천번씩 소규모 분출을 하고 있고, 과테말라의 푸에고(Volca'n de Fuego)화산은 2018년 대규모 폭발로 수백명이 사망하고 대피한 적이 있다. 그밖에 남극대륙의 빌헬름(Mount Erebus)화산은 영구적으로 용암호(lava lake)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화산 폭발은 농작물의 피해나 항공기 운항 중단 및 인명피해와 호흡기 질환이나 피부염 같은 건강에 위험적인 영향도 초래하지만, 화산재는 시간이 지나면 비옥한 토양 으로 변하고, 지열 발전 등 에너지 자원활용과 독특한 지형으로 인한 관광자원으로 각광 받기도 한다. 최근 일본이 '난카이 대지진' 확률을 재산정 하면서, 1,000km 이상 떨어진 한반도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한다. 이와같이  화산 폭발은 파괴의 상징인 동시에 지구의 창조자이기도 하기에, 평소 재난 대비교육과 대비시스템 (화산 감시 네트워크 및 위성 기술과 드론 활용 등)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또한 우리 모두가 기후 변화와 함께 자연과의 상생 공존방법에 대한 연구와 대안(대피 경로 및 안전지대 확보와 비상 키트 준비, 그리고 대피 훈련 등)이 반드시 동시에 모색되어야 하겠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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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9
  • [강호성 칼럼 15] 客窓寒燈 - 실패한 쿠데타(coup d'e'tat)의 교훈
      실패한 쿠데타(coup d'e'tat)의 교훈 '금성대군과 정축지변(丁丑之變)'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의 전쟁 아닌 전쟁이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적인 지향점이 달라서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같은 국민이면서도 종족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과 질시만 으로도 모자라, 오랜 기간 숱한 인명을 앗아가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 전기의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이 누구이던가?   세종의 아들로, 큰형 문종(文宗)과 둘째 형인 세조(世祖), 셋째 형인 안평대군(安平大君), 넷째인 임영 대군(臨瀛大君)과 다섯째인 광평대군 (廣平大君) 다음의 여섯째 아들이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이된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 사건)이후 모반혐의로, 경기도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배(移配) 되었다. 그뒤, 성삼문(成三問)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경상도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이 거주하는 집 울타리에 탱자나무를 둘러쳐, 일체의 바깥 출입을 막는 중죄인을 벌하는 형벌 가운데 가장 무거운 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노비들과 풍기 군수 및 기천 현감의 고변으로, 단종 복위 거사가 좌절되어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경상도 순흥부에서 금성대군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여 순흥부가 해체된 사건을 역사서에는 '정축지변(丁丑之變)'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에 관한 민담에 의하면, 원래 사약(死藥)을 받을 때 죄인은 죽기 전에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네번 절(북읍사배:北揖四拜)을 해야 하는데, 금성대군은,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고 하며, 한양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이로 인해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순흥 안씨(順興 安氏) 가문이 졸지에 평민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며, 살아 남기 위해 전국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정축지변으로 인해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의 다른 이름이 '피끝마을'이라 하는데, 그 유래는, 당시 무참하게 처형 당한 "마을 주민 들의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 멈춰 끝난 곳"이라는 데서 '피끝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순흥 청다리 아래에 목이 잘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나 흘러 가다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 라고 전해지고 있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성공했더 라면, 조선의 역사는 또 다른 모습이었 겠지만, 역사의 물줄기는 무심하게도 도도히 흘러 가고 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켜켜히 쌓인 역사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고하고 고귀한 인명을 무참하게 살상하는 전쟁이나 쿠데타가 정당화 될수도,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성공한 쿠데타라 할지라도, 이 또한 국민들의 안위와 삶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된다.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온 인류가 손에 손잡고 다함께 평화와 번영을 외치자고 감히 제안한다면, 이 또한 필자만의 부질없는 바램일까.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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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15
  • [강호성 칼럼 14] 客窓寒燈 - '기러기의 리더십' 지도자(指道者)의 덕목(德目)삼아야 !
    어떤 지도자상이 가장 이상적일까? 약자와 함께 걷는 따뜻한 리더로 유명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은,  "국민과 함께 하고, 국민을 위한 공감능력 및 포용과, 진정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지도자는 사자처럼 용감해야 하고, 때론 여우처럼 교활 해야 한다!"로 이름을 떨친, 군주론(君主論)의 저자 '마키아벨리(N.B.Machiavelli:1469~1527)'는 현실 정치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는, 통찰력과 전략적 사고를 주창하면서,  "사랑 보단 두려움을, 이상 보단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런가 하면, 공자(孔子,孔邱:BC.551~479)는, "덕과 인으로 백성을 이끌라!" 그리고 "군자는 덕으로 다스리고, 예(禮)로 질서를 잡는다!"고 하며, '도덕성과 백성 사랑, 그리고 모범으로 감화'되는 리더론을 강조했다. 인도의 무저항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마하트마 간디(M.K.Gandhi. Mahatma:1869~1948)는, "비폭력과 자기 절제의 아이콘"으로, "당신이 세상에서 보고 싶은 변화가 되어라!"고 강조했고, "청렴과 절제를 통해 평화로 이끄는 도덕적 리더론"을 강조하였다. 성녀(聖女)로 추앙받는 마더 테레사 (Mother Teresa:1910~1948)는,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한 리더로,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세요!"라고 설파하면서, '헌신과 겸손으로 봉사의 리더십'을 앞세웠다. 철새인 기러기는,  장장 40,000km를 한달음에 이동하는 조류로 유명하다. 이때 기러기는 리더를 중심으로 'V'자 대형을 유지하면서, 머나먼 여행을 하게 된다. 맨 앞에서 날아가는 리더(leader)의 날개짓은 기류에 양력(揚力)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뒤에 따라오는 동료 기러기들은 혼자 날 때보다 71% 정도 쉽게 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먼길을 날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낸다. 이 울음 소리는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면서 힘들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라고 한다. 이와 같이 기러기는 40,000km의 기나긴 여정을 옆에서 함께 날개짓 하는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면서 날아 간다. 이때, 만약 무리 중의 동료 기러기가 총에 맞는다든지, 아프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다른 동료 기러기 두마리가 함께 대열에서 이탈하여, 지친 동료가 원기를 회복 하여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료와 함께 하다가, 무리로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의 반투족(Bantu:중앙 및 남부 아프리카에 주로 분포되어 사는 종족)에게는,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있다. 어떤 백인 인류학자가 이 반투 부족 아이들에게 게임을 하자고 제안 했는데,  그는 근처 나무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매달아 놓고,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말하고는, "시작!"을 외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은 아무도 먼저 뛰어가지 않고, 모두 손에 손을 잡고 같이 가서 그 음식을 함께 먹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1등으로 먼저 가면 그 음식을 다 차지할 수 있는데, 왜 함께 손 잡고 뛰어 갔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우분투(UBUNTU)!"  고 외치면서,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1등 한명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 라고 대답했다. 아아, 그렇다! 이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우분투(UBUNTU)"는 반투족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you are)"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저 유명한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1918~2013) 남아프리카 전 대통령이 자주 강조 해서 널리 알려진 말이기도 하다. 지금 지구촌은 신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듯,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조치도 불사할 듯한,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과 대결의 분위기이다! 21세기는 세계화(globalization)시대이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기에,  서로서로 돕지 않으면 미래가 안 보일 수 밖에 없다. 우리도 '반투족(BANTU)'의 "우분투 (UBUNTU)"에서 배우고, '기러기의 리더십'에서 배워야 한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래야 반드시 상생한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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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성 칼럼
    2025-08-31
  • [강호성 칼럼 13] 客窓寒燈 - "미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 유감"
      "올드 블랙 조" 노래를 통해서 본  "미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 유감" 미국의 '제2기 트럼프 정부'가 '미국 국익 우선주의'를 외치고 있다. "올드 블랙조(Old Black Joe)"는 필자가 학창시절 떼창 아닌 떼창을 하면서 즐겨 불렀던 팔러송(palor song:경쾌한 노래)이다! 스티븐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1826-1864)가 작곡한 이 노래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불리어 온 '팔러 송' 장르라, 가정의 방이나 거실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주로 솔로로 부르는 노래이다. 미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스티븐 포스터는 작곡가 겸 작사가와 시인으로, 미국 민요의 아버지라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포스터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주로 독학으로, 기타 반주로 노래하면서 작곡도 하고, 기악과 가곡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닥터 맥도웰'의 딸 제인(Jane)과 결혼 했으나, 고정된 수입이 없어 늘 가난 하게 살았다. 남북전쟁(1861-1865)이 터지면서 수입이 더 줄어 들었고, 아내와의 관계도 멀어져, 1860년 뉴욕으로 나와 별거하면서 술과 함께 방랑 생활을 전전하였다. 급기야 맨하탄 근처의 호텔방에서 1864년 1월 10일 과음으로 얻은 병으로 쓰러지면서, 세면대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세면대의 파편이 머리에 박히는 중상 을 입었는데, 이로 인한 과다출혈로 3일만에 서른 일곱살(3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올드 블랙 조(Old Black Joe)'는 포스터가 1860년에 자작한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로, 이듬해인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 하던 해에 출판되었다. 포스터의 아내인 제인(Jane)의 친정에는 10여년 전부터 집안 일을 하는 "조(Joe)"라는 흑인 노예가 있었는데, 조는 포스터와 제인이 타는 마차의 마부 노릇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포스터와는 친했다. 포스터는 언젠가 늙은 조(Joe)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고,  그 뒤, 포스터는 그 약속을 지켜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는 이미 늙은 조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한다. 《Old Black Joe》   By Stephen Foster  1. "Gone are the days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Gone are my friends from the cotton field away      Gone from the earth to a better land I know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chorus)      I'm coming, I'm coming, for my head is bending low     I hear those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2. Why do I weep when my heart should feel no pain?   Why do I sigh that my friends come not again?   Grieving for froms now departed long ago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Chorus)   I'm coming, I'm coming, for my head is bending low    I hear those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3. Where are the hearts once so happy and so free?   The children so dear that I held upon my knee   Gone to the shore where my soul has longed to go    I hear their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Chorus)   I'm coming, I'm coming, for my head is bending low   I hear those gentle voices calling 'Old Black Joe' " 1. "내 가슴이 젊고 즐거웠던 날들은 지나갔네   목화밭에서 함께 일하던 내 친구들도 떠나 갔네   지상에서 내가 아는 더 좋은 세상으로 갔네   난 그들이 부드럽게 "올드 블랙 조"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네   나도 곧 가리라, 내 머리가 아래로 숙여 지고 있으니   난 그들이 부드럽게 "올드 블랙 조"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네 2. 난 왜 울고 있나, 내 가슴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을텐데?   난 왜 한숨 쉬고 있나, 내 친구들이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고,   오래 전에 떠난 모습들을 슬프게 그리워 하며?   난 그들이 부드럽게 "올드 블랙 조"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네    나도 곧 가리라, 내 머리가 아래로 숙여지고 있으니,   난 그들이 부드럽게 "올드 블랙 조 " 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네  3. 한 때 그렇게 행복하고 자유롭던 가슴들은 어디에 있나?   내가 무릎에 앉혔던 그 소중한 아이들은    내 영혼이 가기를 갈망했던 그 해변으로 갔네,   난 그들이 부드럽게 "올드 블랙 조"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네    나도 곧 가리라, 내 머리가 아래로 숙여 지고 있으니,   난 그들이 부드럽게 "올드 블랙 조"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네 "   남북전쟁에서 링컨 대통령이 주도한 북군의 승리로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이 된 미국. '조(Joe)'와 같은 유색 인종들이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미합중국이 오늘날과 같은 부국(富國)으로, 대국(大國)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미국 트럼프 정부의 독단적인 미국 우선주의 경제와 관세 정책 때문에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당연히 더 가진 자가 베풀면서, 나누면서 함께, 더불어 가는게 도리요, 미래를 있게 하는 비전이다. 아흔아홉개를 가진 자가 한개 밖에 없는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백개를 채우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이웃도, 우방도 멀어진다. 갑자기 "흥부전"의 우화가 생각 난다.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분질러서 고쳐주고는, 부자 되는 박씨를 물고 오게 하는, 그런 놀부의 심사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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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8
  • [강호성 칼럼 12] 客窓寒燈 - 우단동자(羽緞童者)꽃이 된 동자승(童者僧)의 전설
      '꽃이름에 담긴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여염(閭閻)집 꽃밭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꽃, 우단동자(羽緞童者)!   하지만, 그 이름의 유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단동자꽃은,  줄기와 잎에 부드럽고 고운 털이 나 있어서, 우단(羽緞, 영어로는 벨벳 velvet, 포르투갈어로는 비로드 veludo)이란 이름이 붙은 여러해살이 풀이다.   꽃은 6~8월에 주로 붉은 색(드물게 선홍색과 자홍색, 그리고 흰색도 있다) 의 꽃이 핀다. 우단동자는, 석죽과(石竹科)의 여러해살이 풀로, 원산지가 주로 유럽 남부와 서아시아 지역이고, 햇볕을 좋아하고, 추위(내한성)에 강하며, 키는 대개 50~80cm 정도이다. 특히 강한 생명력과 내건성(耐乾性)이 있으며, 뽀송뽀송한 모직을 닮았다 하여, 영어권에서는 일명 '플란넬(Phlannel:대개 보풀을 일으킨 실을 사용하여 평직이나 능직으로 짠 직물)초(草)'라 부르는 데,  우단동자꽃은 주로 관상용으로 쓰이지만, 씨앗은 허브약재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이와같이 우단동자는 쉽게 키울 수 있는 꽃이다.   다만 햇볕을 좋아하기 때문에(하루 최소 6시간 이상)충분한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심어야 하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과, 물빠짐이 좋은 모래가 섞인 흙이 적합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꽃의 이름이 지어졌을까?   일명, 비단(緋緞)이라 하는, 벨벳(velvet, veludo)은 이탈리아의 벨루티가(Velluti家)의 발명(發名)품인데서 유래되었다고 하여, 이태리어로 벨루토(Velluto)라 하였으며, 14~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복식재료로 생산되어, 유럽 각국으로 보급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벨벳 직물은 특이한 광택과 촉감, 그리고 외관 등으로 진귀하게 여겨져, 종교적 의복에 많이 쓰였다고 하며, 특히 왕이나 귀족들의 의상이나 실내 장식용으로 귀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뒤, 일반인들에게도 점차 보급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고급직물로 취급되고 있으며, 여성이나 아동의 옷감, 모자, 실내장식, 의자 덮개 등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그래서 우단동자꽃의 속명이 ''아그로스테마 (Agrostema)''로, 이는 라틴어로 '밭'을  뜻하는 '아그로(Agro)'와 '왕관'을 뜻하는 '스테마 (Stemma)'의 합성어로, '밭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벨벳같이 고운 털을 가진 꽃이라는 것이다. 우단동자 꽃을 일본에서는 취선옹(醉仙翁), 또는 수선옹(水仙翁)이라고도 하는 데, 이는 잎이 푹신푹신 하여 촛불의 심지로 알맞다고 해서 '램프꽃'이라는 별명도 있고, 영어 이름으로는, Dusty miller, 'mullein pink' 등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저런 설화가 많은 나라라서 그런지, 우리 말로 꽃 이름이 '우단동자'인걸 보면 분명 사연이 있을 법 한데, '우단동자 꽃' 이름도 그렇게 태어났다. "강원도 어느 작은 암자에 노승과 동자승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동자승은 부모님이 병으로 모두 돌아 가시자, 혼자서 암자를 지키던 노승이 동자승을 데려 와서 같이 살았다. 어느 해 겨울이 되어, 노승이 마을로 월동준비 차 내려가고 암자에는 동자승이 혼자 남았는데, 마을로 내려 간 노승이 겨울채비를 끝내고 부랴부랴 암자로 돌아가기 위해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 쳐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동자승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지만, 노승은 어쩔 수 없어 폭설이 멈추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동자승은 마을로 내려간 노승을 기다리며 폭설에 파묻힌 암자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면서 긴긴 시간을 버텼지만, 결국 저체온증으로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폭설이 그치고 눈이 조금씩 녹아 길이 보이기 시작하자, 노승은 서둘러 암자로 올라 갔으나, 동자승은 이미 온몸이 꽁꽁 얼어, 싸늘한 시신만이 노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노승은 동자승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에 잠겨 동자승을 양지 바른 곳에 고이 묻어 주었다.  이듬해 여름이 되자,  동자승의 무덤가에 붉은 빛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를 노승은 죽은 동자승의 혼이 꽃이 된 것이라고 여겨, '동자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우단동자는 얼어서 죽은 동자승의 혼이, 몸 전체를 우단(벨벳)으로 감싸, 저승에서나마 동자승이 춥지 않게 하기 위해 포근한 우단으로 덮혀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우단동자꽃의 꽃말은 '영원한 기다림', 또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등이라고 한다. 우단동자꽃은 제비동자꽃, 가는동자꽃, 흰동자꽃, 털동자꽃 등 여러종류가 있다. 인류는 유사 이래로 기후와 환경변화에 따라 사시사철 대비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인해, 예측불허의 기상 이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미국 독립기념일인 지난 7월 4일, 텍사스주의 과달루페강가에서 캠프 수련을 하던 아동들을 비롯한 100여명의 사람들이 기습 폭우에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100명 가까운 실종자에 대한 수색 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일본 열도의 지진 징후와 중국 내륙의 때 아닌 물 난리, 알프스 서쪽 유럽국가 들의 40도를 웃도는 살인적 폭염 사태 등 이 모두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대재앙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오와 남용이 부메랑 되어 오는 것 같다. 어찌 우단동자의 설화에서 동자승을 살리지 못한 노승만을 탓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갖고, 이 무더위 의 폭염 사태에 대비해야 하겠고,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원리가 깨어진 겨울나기에도, 정부를 비롯한 모든 국민이 '환경지킴이'로써 만반의 대비태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게 하고 있다. 정녕 이대로 가다간 우리 모두가 우단동자 꽃의 전설로 오버랩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 같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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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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