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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斷想] 모과나무의 추억
    海垣 이경국   모과나무는 잘 알려진 나무이다. 모과는 생긴 모습은 울퉁불퉁하여 소싯적에 못생긴 여자를 <모과>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과가 반듯하고 아름답다. 익을수록 노란 빛을 띄면서 향내도 짙게 풍긴다. 안동지방 방언으로 모과를 <모개>라고 부른다. 이는 에너지 보음의 법칙에 의하여 발음을 할 때 힘을 덜 들이기 위함이다. 모과는 원산지가 중국이다. 익은 모습이 참외와 같다하여 목과 (木瓜)에서 모과로 바뀌게 된 것이 어원이다. 대체로 분홍꽃을 피우는 식물이 많다. 모과도 분홍색 꽃을 피운다. 핑크빛은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인의 잠옷은 핑크색이 많다. 모과나무는 단단하다. 박달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가 그러하다. 워낙 단단하여 도장을 새기는데 쓰인다. 특히 벼락맞은 대추 나무는 벽조목(霹棗木) 이라 하여 양질의 도장을 만드는데 쓰인다. 대추는 주름은 많으나 재삿상의 모든 과일 가운데 부동의 1위의 자리에 놓여진다. 조율이시(棗栗梨枾)를 제하고 나머지는 잡과(雜果)로 칭하며,  상에 올리지 않더라도 탈이 나지 않는다. 모과나무도 단단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지는 도리깨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물론 타작을 하던 도리깨가 사라지고 만 시대이다. 도리깨 질은 상대와 박자가 잘 맞아야 한다. 빨래방망이로 다듬이 질 할 때도 그러하다. 디딜방아 찧을 때 손을 다치기 쉽지만 그러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에서 난타가 나오게 되었으며, 우리가락의 노래에 세계의 젊은 이들이 빠져들고 있는 시대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묘하게 혼합된 우리민족의 정서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나무는 한해가 지나면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 간다. 그러나 유일하게 모과나무는 나이테가 생기지 않는 나무이다. 늙지 않는다 하여 <청춘나무>로 일컫고 있다. 인간은 나이테의 수를 생일케이크의 촛불의 수로 알린다. 어머니가 수고한 날인데 '귀빠진 날'이라면서 축하를 한다. 세상에 나올때는 머리부터 나오는데 귀가 나오면 다 나온다는 의미이다. 발부터 나오는 녀석은 불효이다. 어머니의 고통이 크다고 한다.   주먹을 꼭 쥐면서 나오기에 가뜩이나 좁은 産道를 쉽게 나오게 하는데 일조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은 효를 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모과는 향은 짙으나  신맛 또한 대단하다. 아마 레몬과 쌍벽을 이룰 것이다. 동리마다 한 그루의 모과나무는 있었다. 무서리가 내리면 감은 주홍색으로 변한다. 그러나 모과는 더욱 노랗게 변하여 간다. 올해 지인으로부터 모과를 선물로 받았는데 몇분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모두가 반긴다. 지금은 모과는 향기가 좋은 여자를 의미한다. 모과처럼 못생겼다는 말은 고어가 되었다. 못생기면 호박같다고도 했다. 호박은 가난한 시절 몸을 풀면 미역을 살 수가 없어서 호박을 끓여서 산후조리를 했다. 항암효과가 있는 호박은 인기도 좋다. 우리집의 브랜드는 배추전과 호박죽이다. 아내가 어머니로부터 제대로 전수받아 배운 기술이다. 시대가 변하니 장미나 모란못지 않게 작은 꽃인 들꽃이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없는 잡초지만 꽃은 雜花가 아니라면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은 워낙 작다보니 무더기로 피어서 자신을 알린다. 작은 벌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꿀을 얻어 가면서 암술과 수술이 만나는 기회를 작은 꽃이라고 피하지 않는다. 모과도 잡종교배를 시켜서 열매가 여간 아름답지 않다. 초겨울의 모과는 조금은 쓸쓸하게 매달려 있다. <母果>라고 우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릴 때 보았던 모과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모과나무에 얽힌 추억은 뇌의 작은 분실에 여전히 남아 있다. 사라진 것에 대한 추억은 강하게 남는다 했다. 떠난 그미는 <사라진 불꽃 (old--flame)>이 되고 말았다. 모과꽃이 필 때면 월광을 받으면서 만나곤 했었는데 모과향은 사라졌지만 희미한 추억은 여전히 뇌의 작은 분실에 간직되어 있다.     < 칼럼니스트 / 海垣  이경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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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5
  • [겨울 단상] 까치의 생일
    동물가운데 유일하게 생일이 있는 조류는 까치뿐이다.    해마다 설 하루 전날이 까치의 생일이니 어쩌다가 섣달이 적은 달이면 필자와 생일이 같은 날이다. 아마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알려 주기도 하고 칠석 전날은 까마귀와 은하수에 오작교를 만들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도록 봉사를 하니까 생일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백의민족은 흰색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까치는 배가 흰색이다. 까마귀는 익조이지만 울음소리가 음습하게 들린다. 평화대사 / 海垣, 이경국   돼지는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는 슬픈 축생이지만 죽어서는 인간에게 절을 받는 넷발짐승이다. 고사를 지낼 때 돼지 머리에 공손하게 절을 한다. 살아서 주등이라 하면서 많이 쳐먹는다고 해 놓고선 죽여서는 입에 고가의 지폐도 물린다. 죽어 호강은 살아 거지보다 못한데 말이다.돼지는 하나같이 웃는 모습인데 이는 약물 처리를 해서 그러하다. 펄펄 끓는 물에 머리를 통째로 넣는데 어떻게 웃는 표정을 짓는다는 말인가? 눌린 돼지머리는 새우와 음식합이 맞다. 돼지는 유일하게 뱀을 잡아 먹는다. 인간이 직립하기 전에는 기어 다녔는데 뱀에게 물려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연간 3만명이 뱀때문에 죽는다. 원두막을 지어서 밑에는 돼지를 키웠다. 냄새는 나겠지만 뱀으로부터 목숨은 구할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인간의 침은 독사의 독이나 사막의 전갈의 독보다 더 독하다고 한다. 따라서 키스는 엄청스러운 보약이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 안사람이 거부한다. 이는 보약을 엎지르는 무모한 짓이다. 손이라도 꼭 잡고 자면 몇 볼트의 전력이 생긴다고 하니 이는 마음의 때를 벗기고 실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까치 설날은 동요를 부른다. 까치집은 예술이다. 태풍에도 끄떡이 없고 비도 스며들지 않는다고 한다. 발과 부리로 짓는데 탄성이 나오게 한다. 아무도 모르게 교미하여 알을 낳아서 부화시키는 까치는 주택 가까이 사는 친근한 조류이다. 최근에는 전설줄을 끊으면서 말썽을 일으키니 길조에서 흉조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까치 설날의 동요를 들을 수 없다. 모두 제 자식이 천재라면서 학원을 몇군데나 보내기 때문이다. 가족간 대화도 없이 세뱃돈만 두둑이 주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자라면 정치를 지금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인성교육의 부재는 천민자본주의에 빠져들게 하는 지름길이다. 공부, 일등, 돈의 중독에서 벗어나야만 세상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 올 것이데 큰 일이다.     ::  평화대사 / 海垣, 이경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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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이경국의 겨울斷想] 어쩌다 생각나는 사람
    이경국 칼럼니스트   최근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 패티김 (81세)은 ''어쩌다 생각나는 사람''인 '이별'이란 가요가 히트를 치면서 그만 작곡가요, 색스폰 연주의 전문가인 남편 길옥윤과 헤어지게 되었다. 길옥윤의 주벽(酒癖)이 극심한 것이 사유였다. 헤어진 후 길옥윤은 심한 병마에 시달렸다. 그러나 패티김은 ''길옥윤의 이별 콘서트''에 함께하여 전 남편이 만든 '이별'을 불렀다. 그후 길옥윤은 재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 것이다. 슬프거나 애절한 노래를 절규하듯 부르면 노래의 가사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는 논문이 나오기도 했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순탄한 길만을 걸을 수는 없다. 생은 파고(波高)가 생기기 마련이다. 인생살이는 주먹과 손바닥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손은 주먹도 되고 손바닥도 되는 동전의 양면같다. 흔히 인생은 別것 아니라고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애증(愛憎)은 아미새같다. 사랑하지만 언제 또 미운 마음이 생길지 모른다. 情人사이는 향수보다 짙은 體臭에 취해 있다가도 마음이 변해지면 군둥네를 풍기니 이는 인간의 잘못이라기 보다 조화주(?)의 창조 과정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뇌의 작은 분실 한켠에는 어쩌다 생각나는 사람이 숨어 있을 것이다. 지나간 불꽃(old- flame) 은 잊혀진 연인을 일컫는다. 잊혀진 사이지만 어쩌다 생각은 날 것이다. 불씨는 꺼져 버리면 회색의 재를 남긴다. 무지개 사랑도 소멸이 되면 어쩌다 생각이 나는 사람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틈이 생기면 물이 새기 마련이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는 사람은 적어도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전도몽상 같은 말처럼 실제 흔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촌수가 無寸인 부부사이는 갱년기나 남편이 무능해지면 황혼이혼으로 치닫기 쉽다. 그럴 때는 남편의 발뒷꿈치도 보기 싫어진다하니 그 마음을 어찌 알 수가 있을까 싶다. 이러한 변죽이 죽끓듯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장단을 맞추고 살아가기란 여간 쉽지 않는 것이다. 한 때 없으면 숨넘어 간다고 법석을 떨면서 부등켜 안았다. 그러나 수틀린 別離를 하고 나면 마치 훈련소 처다보듯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냉혹함의 절정이 이럴 때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신묘하고도 묘유하다.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깊은 바다는 그 높낮이가 같다. 밀물과 썰물은 인간으로 말하면 타인사이가 아니라  연인관계가 아닐까? 어쩌면 파도가 남긴 거품은 밀물과 썰물이 사랑한 흔적일지 모른다.   마치 나뭇잎과 실뿌리가 아무도 모르게 속삭이듯 '어쩌다 생각나는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이 스친다.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를 잃어 버리는 것이 인간이긴 하지만 아픈 기억보다 차라리 망각이 더 좋다. 인연이 다하면 마음의 끈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미치도록 아픈 것은 사랑이 남기고 간 휴유증일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별리의 아픔은 창자를 끊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    이는 평생 단 한번만으로 끝나야 한다. 그 아픔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사랑한 결과가 이토록 아픈 상처를 남기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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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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