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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의 미술칼럼 2] 본다는 것
본다는 것. 우리는 흔히 '본다'는 행위를 외부의 상황과 대상을 사진과 같이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 본다는 것은 지극히 능동적인 행위이며, 감상자가 살아온 전 생애의 경험이 반영되는 과정으로의 경험이다. 동일한 현장에서 같은 풍경, 같은 선과 면, 그리고 색을 마주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감흥에 젖는 이유는 우리가 물리적인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이 작용하여 작품을 읽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주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전시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작품을 마주한 어린아이의 시선은 캔버스 그려진 잔디 위를 거침없이 뛰어논다. 아이에게 초원은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풀냄새를 맡으며 숨바꼭질을 할 수 있는 역동적인 놀이터이다. 반면, 삶의 무게를 경험한 고령의 신사 분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에 시선이 멈추고 그 초원 위에서 서늘한 바람이나 고요한 고독, 혹은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평화를 읽어낸다. 이처럼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각자의 경험이 쌓여있는 인생의 지층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풍경은 단순한 객체를 넘어 감상자의 심리적 확장 판이 된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서술한 <저자의 죽음>은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의도나 배경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읽고 바라보는 감상자의 해석 속에서 새롭게 생성된다는 개념이다. 동일한 작품이라도 감상자의 경험, 기억,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이로 인해 하나의 작품은 단일한 해석이 아닌 다양한 의미를 지닌 열린 구조가 된다. 이는 작가 중심의 권위를 해체하고, 해석의 주체를 감상자로 이동시키는 사유의 전환을 의미한다. 결국 예술은 작가의 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완성된다.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작품의 완성은 감상자의 눈 즉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여러 차례 전시를 진행하며 마주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블루 컬러가 중첩되어 조형성을 강조한 작품들을 선보이던 어느 전시회였다. 적막한 화면 속에 깊은 블루만이 가득한 형상 없는 작품 앞에서, 한 관람객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서 있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작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어떤 형상도 강요하지 않았건만, 그는 무엇을 통해 작품과 합일된 감정이입을 경험한 것일까.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정답이 정해진 기호를 발견하고 해독하는 과정이 아니다. 만약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의도 안에만 갇혀 있다면, 그 예술은 박제된 유물에 불과한 효용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과정은 본래 자유로우며, 감상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리는 다양한 해석은 작품의 예술적 범위를 무한히 넓히는 촉매제가 된다. 어떤 이는 추상화의 거친 붓질에서 불안과 분노를 읽고, 어떤 이는 격정적인 생명력으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이러한 개별적 인식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쌓일 때, 작품은 비로소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예술적 유기체'로 거듭난다. 결국 작가가 캔버스에 마지막 터치를 마치는 순간은 작품의 종착역이 아니라, 감상자라는 수많은 공동 저자를 만나기 위한 출발역인 셈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이 자유로운 감성의 충돌과 융합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감상자는 종종 전시회장에서 길을 잃는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라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작품은 감상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입을 굳게 다문 채, 팔 벌려 조용히 다가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준비된 파티처럼...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전시된 작품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심연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과정이다. 작품은 그 심연으로 내려가기 위한 한 줄기 빛이자 길잡이일 뿐이다. 우리는 작품이라는 거울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감성의 바다를 발견하고 그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율은 작가의 기술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나의 본질'과 마주했을 때 터져 나오는 영혼의 울림이다. 예술은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는 교과서가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삶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묻는 질문지여야 한다. 예술의 완성은 미술관의 화려한 조명 아래가 아니라, 작품 앞에 선 당신의 고독한 시선 끝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작품을 보며 흘리는 눈물, 미소, 혹은 알 수 없는 불편함까지도 모두 예술의 일부다. 당신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당신의 시선이 자유로울수록 작품의 세계관은 당신과 함께 성장한다. 그러므로 이제 작품 앞에서 "이것이 무엇을 뜻 하는가"를 묻기보다 이것이 내 안의 무엇을 깨우는가를 질문해 보자. 작품이 당신의 심연을 건드리는 그 짧은 찰나, 예술은 비로소 완성되며 당신 또한 그 예술의 일부가 될 것이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당신이 보고 느끼는 그 모든 순간이 곧 예술의 정점이다. 눈물을 감추는 관객의 뒷모습이 창작이라는 힘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한다. : : 박종태 미술/조형 작가 : : - 영남대 조소과 졸업 - 영남대 미술대학원 박사 수료 - 영남대 입체미술 외래교수 역임 - 대한민국미술대전 조각부분 심사위원(2017년) - 현) 빈조형 대표 / 경북조각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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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의 미술칼럼 1] 일상의 감각이 예술이 되는 순간
박종태 작가 < 숟가락을 고르는 안목으로 미술을 본다면― 일상의 감각이 예술이 되는 순간 > 주말 오후, 큰마음을 먹고 미술관을 찾는다. 전시장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마치 공기압이 높아진 듯 보이지 않는 심리적 압력이 공간을 누르는 듯하다. 정적 속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어딘가 경건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엄숙한 분위기 뒤편에서 많은 관람객이 느끼는 감정은 사실 당혹감에 가깝다. 전시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하면 흔히 이런 말이 돌아온다.“어렵다.”“미술을 잘 모르겠다.” 때로는 거액에 낙찰되었다는 비구상 작품 앞에서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미술을 ‘공부해서 이해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고정관념과 현대미술의 낯선 형식이 결합하면서 생겨난 거리감 때문이다. 오늘날 갤러리에 전시되는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지 않는 비구상 작품이다. 익숙한 사물의 모습이나 서사를 통해 이해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쉽게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전시장 공간은 낯설고 위압적인 장소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작가의 이름값이나 작품의 낙찰가 같은 외적인 정보가 덧붙으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작품이 감각의 경험이 아니라 가격과 투자 가치의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순간, 관람객은 작품과 교감할 기회를 잃고 자연스럽게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미적 감각과 분별력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일상의 디자인과 소비 경험의 영역이다. 18~19세기 서구 민속학이 태동하던 시기, 학자들은 다양한 부족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오지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파푸아뉴기니의 한 부족에게 서구식 숟가락을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그 도구의 용도를 알지 못해 사용법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는 기록이다. 그들에게 숟가락은 낯선 물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숟가락 하나를 고를 때조차 단순한 기능만을 보지 않는다. 금속의 광택, 손에 닿는 마감의 매끄러움, 무게 중심이 주는 안정감, 심지어 브랜드와 제작 국가까지 비교하며 선택한다. 스마트폰의 미세한 곡률 차이를 느끼고, 자동차의 차체 라인이 만들어내는 속도감을 읽어내며, 가구의 비례가 공간에 주는 긴장감까지 감지한다. 박종태 작가의 작품 우리는 이미 일상 속에서 수많은 물건을 경험하며 자신만의 미적 기준과 취향을 형성해 온 감상자들이다. 숟가락 하나를 고르는 행위조차 형태와 질감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는 작은 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미술 앞에서는 갑자기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작품 속에 담긴 미세한 조형적 차이를 읽어내는 경험이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을 뿐이다. 비구상 작품을 볼 때 “무엇을 그렸는가”라는 질문을 잠시 내려놓아 보자. 대신 우리가 숟가락을 고를 때처럼 “어떤 느낌을 주는가”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 얹어진 물감의 두께가 만드는 질감, 선과 면이 이루는 비례의 균형, 작품이 전시장 조명과 만나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농도 같은 요소들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히 해석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순간, 작품의 형태와 색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리듬이 서서히 감각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때 전시장 공간을 누르던 위압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새로운 미적 경험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결국 미술 감상은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좋다’, ‘편안하다’, ‘멋있다’라는 감각은 이미 훌륭한 미적 자산이다. 제품을 선택하고 공간을 경험하며 쌓인 그 감각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미적 기준이 된다. 이제 그 안목을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오기만 하면 된다. 가장 좋은 감상은 작가의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내 감각이 작품의 어느 지점에서 반응하는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식탁에서 무심코 쥐어 드는 숟가락의 곡선 속에도, 그리고 그 곡선을 알아보는 우리의 눈 속에도 이미 예술은 시작되고 있다. : : 박종태 미술/조형 작가 : : - 영남대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 영남대 교육대학원 석사, 미술대학원 박사 수료 - 영남대 입체미술 외래교수 역임 - 대한민국미술대전 조각부분 심사위원(2017년) - 현) 빈조형 대표 / 경북조각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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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의 미술칼럼 2] 본다는 것
- 본다는 것. 우리는 흔히 '본다'는 행위를 외부의 상황과 대상을 사진과 같이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 본다는 것은 지극히 능동적인 행위이며, 감상자가 살아온 전 생애의 경험이 반영되는 과정으로의 경험이다. 동일한 현장에서 같은 풍경, 같은 선과 면, 그리고 색을 마주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감흥에 젖는 이유는 우리가 물리적인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이 작용하여 작품을 읽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주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전시장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작품을 마주한 어린아이의 시선은 캔버스 그려진 잔디 위를 거침없이 뛰어논다. 아이에게 초원은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풀냄새를 맡으며 숨바꼭질을 할 수 있는 역동적인 놀이터이다. 반면, 삶의 무게를 경험한 고령의 신사 분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에 시선이 멈추고 그 초원 위에서 서늘한 바람이나 고요한 고독, 혹은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평화를 읽어낸다. 이처럼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각자의 경험이 쌓여있는 인생의 지층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풍경은 단순한 객체를 넘어 감상자의 심리적 확장 판이 된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서술한 <저자의 죽음>은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의도나 배경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읽고 바라보는 감상자의 해석 속에서 새롭게 생성된다는 개념이다. 동일한 작품이라도 감상자의 경험, 기억,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이로 인해 하나의 작품은 단일한 해석이 아닌 다양한 의미를 지닌 열린 구조가 된다. 이는 작가 중심의 권위를 해체하고, 해석의 주체를 감상자로 이동시키는 사유의 전환을 의미한다. 결국 예술은 작가의 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완성된다.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작품의 완성은 감상자의 눈 즉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여러 차례 전시를 진행하며 마주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블루 컬러가 중첩되어 조형성을 강조한 작품들을 선보이던 어느 전시회였다. 적막한 화면 속에 깊은 블루만이 가득한 형상 없는 작품 앞에서, 한 관람객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서 있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작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어떤 형상도 강요하지 않았건만, 그는 무엇을 통해 작품과 합일된 감정이입을 경험한 것일까.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정답이 정해진 기호를 발견하고 해독하는 과정이 아니다. 만약 작품의 의미가 작가의 의도 안에만 갇혀 있다면, 그 예술은 박제된 유물에 불과한 효용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과정은 본래 자유로우며, 감상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리는 다양한 해석은 작품의 예술적 범위를 무한히 넓히는 촉매제가 된다. 어떤 이는 추상화의 거친 붓질에서 불안과 분노를 읽고, 어떤 이는 격정적인 생명력으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이러한 개별적 인식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쌓일 때, 작품은 비로소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예술적 유기체'로 거듭난다. 결국 작가가 캔버스에 마지막 터치를 마치는 순간은 작품의 종착역이 아니라, 감상자라는 수많은 공동 저자를 만나기 위한 출발역인 셈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이 자유로운 감성의 충돌과 융합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감상자는 종종 전시회장에서 길을 잃는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라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작품은 감상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입을 굳게 다문 채, 팔 벌려 조용히 다가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준비된 파티처럼...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전시된 작품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심연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과정이다. 작품은 그 심연으로 내려가기 위한 한 줄기 빛이자 길잡이일 뿐이다. 우리는 작품이라는 거울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감성의 바다를 발견하고 그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율은 작가의 기술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나의 본질'과 마주했을 때 터져 나오는 영혼의 울림이다. 예술은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는 교과서가 아니라, 우리가 각자의 삶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묻는 질문지여야 한다. 예술의 완성은 미술관의 화려한 조명 아래가 아니라, 작품 앞에 선 당신의 고독한 시선 끝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작품을 보며 흘리는 눈물, 미소, 혹은 알 수 없는 불편함까지도 모두 예술의 일부다. 당신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당신의 시선이 자유로울수록 작품의 세계관은 당신과 함께 성장한다. 그러므로 이제 작품 앞에서 "이것이 무엇을 뜻 하는가"를 묻기보다 이것이 내 안의 무엇을 깨우는가를 질문해 보자. 작품이 당신의 심연을 건드리는 그 짧은 찰나, 예술은 비로소 완성되며 당신 또한 그 예술의 일부가 될 것이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당신이 보고 느끼는 그 모든 순간이 곧 예술의 정점이다. 눈물을 감추는 관객의 뒷모습이 창작이라는 힘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한다. : : 박종태 미술/조형 작가 : : - 영남대 조소과 졸업 - 영남대 미술대학원 박사 수료 - 영남대 입체미술 외래교수 역임 - 대한민국미술대전 조각부분 심사위원(2017년) - 현) 빈조형 대표 / 경북조각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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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의 미술칼럼 2]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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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태의 미술칼럼 1] 일상의 감각이 예술이 되는 순간
- 박종태 작가 < 숟가락을 고르는 안목으로 미술을 본다면― 일상의 감각이 예술이 되는 순간 > 주말 오후, 큰마음을 먹고 미술관을 찾는다. 전시장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마치 공기압이 높아진 듯 보이지 않는 심리적 압력이 공간을 누르는 듯하다. 정적 속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어딘가 경건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엄숙한 분위기 뒤편에서 많은 관람객이 느끼는 감정은 사실 당혹감에 가깝다. 전시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하면 흔히 이런 말이 돌아온다.“어렵다.”“미술을 잘 모르겠다.” 때로는 거액에 낙찰되었다는 비구상 작품 앞에서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미술을 ‘공부해서 이해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고정관념과 현대미술의 낯선 형식이 결합하면서 생겨난 거리감 때문이다. 오늘날 갤러리에 전시되는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지 않는 비구상 작품이다. 익숙한 사물의 모습이나 서사를 통해 이해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쉽게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전시장 공간은 낯설고 위압적인 장소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작가의 이름값이나 작품의 낙찰가 같은 외적인 정보가 덧붙으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작품이 감각의 경험이 아니라 가격과 투자 가치의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순간, 관람객은 작품과 교감할 기회를 잃고 자연스럽게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미적 감각과 분별력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일상의 디자인과 소비 경험의 영역이다. 18~19세기 서구 민속학이 태동하던 시기, 학자들은 다양한 부족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오지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파푸아뉴기니의 한 부족에게 서구식 숟가락을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그 도구의 용도를 알지 못해 사용법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는 기록이다. 그들에게 숟가락은 낯선 물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숟가락 하나를 고를 때조차 단순한 기능만을 보지 않는다. 금속의 광택, 손에 닿는 마감의 매끄러움, 무게 중심이 주는 안정감, 심지어 브랜드와 제작 국가까지 비교하며 선택한다. 스마트폰의 미세한 곡률 차이를 느끼고, 자동차의 차체 라인이 만들어내는 속도감을 읽어내며, 가구의 비례가 공간에 주는 긴장감까지 감지한다. 박종태 작가의 작품 우리는 이미 일상 속에서 수많은 물건을 경험하며 자신만의 미적 기준과 취향을 형성해 온 감상자들이다. 숟가락 하나를 고르는 행위조차 형태와 질감의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는 작은 미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미술 앞에서는 갑자기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작품 속에 담긴 미세한 조형적 차이를 읽어내는 경험이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을 뿐이다. 비구상 작품을 볼 때 “무엇을 그렸는가”라는 질문을 잠시 내려놓아 보자. 대신 우리가 숟가락을 고를 때처럼 “어떤 느낌을 주는가”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 얹어진 물감의 두께가 만드는 질감, 선과 면이 이루는 비례의 균형, 작품이 전시장 조명과 만나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농도 같은 요소들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완벽히 해석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순간, 작품의 형태와 색채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리듬이 서서히 감각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때 전시장 공간을 누르던 위압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새로운 미적 경험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 결국 미술 감상은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좋다’, ‘편안하다’, ‘멋있다’라는 감각은 이미 훌륭한 미적 자산이다. 제품을 선택하고 공간을 경험하며 쌓인 그 감각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미적 기준이 된다. 이제 그 안목을 전시장으로 그대로 옮겨오기만 하면 된다. 가장 좋은 감상은 작가의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내 감각이 작품의 어느 지점에서 반응하는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식탁에서 무심코 쥐어 드는 숟가락의 곡선 속에도, 그리고 그 곡선을 알아보는 우리의 눈 속에도 이미 예술은 시작되고 있다. : : 박종태 미술/조형 작가 : : - 영남대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 영남대 교육대학원 석사, 미술대학원 박사 수료 - 영남대 입체미술 외래교수 역임 - 대한민국미술대전 조각부분 심사위원(2017년) - 현) 빈조형 대표 / 경북조각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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