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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국의 대구춘추 10] 사라진 삼한사온(三寒四溫)
    이경국 칼럼니스트    요즘 젊은이들은 삼한사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무슨 사자성어나  고사성어古辭成語쯤으로 여길지 모른다. 소싯적 겨울철의 날씨는 3일은 춥고 4일은 따뜻했다. 기후에 대비하기도 좋았으며 살기에도 안성맞춤 이었다. 온대기후가 또렸했다. 겨울기후의 절묘한 조화요 궁합이었다.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날씨에 맞추어 빨래도하고 추운 날에는 방안에서 가미니를 첬다. 거의 유일한 부업이기도 했다. 겨울철 아이들의 놀이는 팽이치기나 얼음치기 정도였다. 당시 스케이트를 '시겟토'라는 일본식 발음이 잔재해 있었다. 논에 얼음이 두껍게 얼면 얼음위에서 살다싶이 했다. 손등은 때가 덕지덕지 붙어 마치 두꺼비등과 같았다. 모두가 그랬으니 당연한 것으로 알았으며 창피한 줄도 모르면서 자랐다. 어찌된 일인지 기후도 인간의 심성을 닮아서 그런지 변덕스러워 지고 말았다. 전에는 비가 내릴때 리듬을 타고 내렸다. 처음에는 새색시처럼 부끄러움을 타면서 조용하게 내려서 대지를 애무하듯 적셔 준다. 대지가 견디지 못해 물을 머금고 젖어들면 강한 빗줄기를 퍼부어 바닥으로 스며들기도 하거니와 강물도 불어나게 했다. 그러다가 격한 오르가즘의 순간처럼 물동이로 퍼붓듯이 비를 토해낸다. 온갖 잡동사니와 더러운 것들을 싹쓸이 하여 대지를 대청소하듯 맑게한다. 그러다가 물이 할퀴고 간 농토는 다음해는 옥토玉土로 변하여 풍년이 든다. 그러나 지금은 게릴라성 폭우를 시작도 끝도없이 퍼부어 대니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 흙탕물은 직행으로 바다를 향하여 흘러 버리니 대지가 촉촉하게 젖을 시간조차 없다. 겨울날씨는 겨울연가를 찬양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겨울답지도 않다. 안동역의 무릎까지 쌓이던 눈은 지금은 내리면서 거의 녹아 버린다. 인간도 눈도 성미가 여간 급해지질 않았다. 온난화가 큰 문제로 대두되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듯한 삼한사온이 연인처럼 그리워 진다. 자꾸만 더워져 가니 땀구멍의 수는 늘어나면서 벗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현실로 닥쳐 올 것이다. 벗으면 예禮가 사라지고 성범죄도 늘어날 소지가 높지 않을까 싶다. 침엽수는 단단하나 활엽수는 연하고 헤픈 모습이다. 소나무가 기후변화와 병충해로 자꾸만 죽어가고 있다. 애국가의 '남산위의 저 소나무'가 사라지면 후손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해질지 모른다. 이는 심각한 걱정거리이다. 그렇다고 화투의 1월에 있는 솔(松)을 보여 주면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후의 변화는 인간의 심성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금 삼한사온이 있다면 의복은 호화찬란해질 것이다. 여름만 있는 열대성 기후는 싫다. 그런데 그런 기후가 닥쳐오고 있다. 봄과 가을은 샌드위치가 되어 자꾸 짧아져 간다. 여름이 길어 진다는 것이다. 대구사과는 사라져 버렸고 풍기까지 북상(?)한 상태다. 남쪽에는 도서島署지방을 비롯하여 활엽수 천지인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기후는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다. 에스키모와 열대지역은 그 차이가 엄청나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열대에서는 벗고 사니까 애들을 많이 낳는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에스키모인은 두터운 옷을 벗기가 번거로워 인구가 열대에 비하여 적다는 것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문제이다. 천혜의 혜택을 받은 우리나라의 삼한사온이 사라져 버린 기후의 변화에 두려운 생각이 스친다. 포시즌에서 투시즌으로 변하는 기후를 상상해 보라! 인류는 척박한 곳에서 문화를 일구어 내긴 했지만 후손이 살기 편한 자연환경을 대물림 해야지 개발이란 미명하에 마구 파해치면 자연도 인간에게 역병으로 앙갚음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인류를 장기간 괴롭히는 코로나疫病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미래가 밝을 수 없을 것이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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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3
  • [이경국의 대구춘추 9] 運과 福: 행운과 행복
      이경국 칼럼니스트      행운幸運은 오래 된 말이다. 그러나 행복幸福 은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말인데 지금은 입에 달고 사는 어휘가 되어버렸다. 행운은 마치 요행을 바라는 말로 치부해 버린다. 어차피 인생은 운運이 삼三이요. 기氣가 칠七인 것이다. 운삼기칠運三氣七)이란 사자성어가 우연히 생겨나지는 않았다고 본다.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일본에서 번역을 하면서 당시 일본에서도 幸福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따라서 '행복'이란 말을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다. 그 때 우리나라에 전수된 것이다. 행운이 행복보다는 한 수 위의 용어다. ''행운을 빕니다''란 좋은 말이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필자는 運을 좋아한다. 그리고 믿기도 한다.   험한 세상에 운은 인간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꿈의 영역에 속한다. 현실의 고통도 꿈이 있기에 감내해 낼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설날의 복조리가 사라진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치명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기를 낳으면 금줄을 치는데 지금 시대에는 집에서 자연분만 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는 7남매를 산파도 없이 자연분만을 하셨다. 그때는 다 그랬었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출산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으며 산모가 죽기까지 했었다. 별을 따기 위하여는 우선 달에 가야만 한다. 달을 따는 장대는 마음의 장대일 것이다. 운이 따르면 장대에 좋아하는 별이 걸린다고 믿고 싶다. 행운이란 용어를 많이 써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무척 많이 썼다. 福은 運이 따라야 들어 온다고 믿고싶다. 복은 작은데서 오는데 현대인은 로또같은 큰 복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한탕주의가 팽배해 있어서 그렇다고 본다. 행운과 복을 상징하는 정월 초하루 복조리가 사라진 것은 애통한 일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이고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상징인 복조리가 아니던가..... 이익이 따르는 거래만을 중시하는 세상이 이러한 인정을 앗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달보고 시를 짓지 않는다. 운석의 크기로 돈을 셈하는 데는 밝다. 저금통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통장잔고에 신경을 쓰는 기가 막히는 시대이다. 동전은 去해 버렸으며 신사임당 지폐가 來하여 성盛하도다. 집안의 수재금고는 현금으로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저금리 시대이긴 하여도 금고에 돈을 가두어 놓는 것은 망국의 병이 아닐까 싶다. 부모가 가입한 보험이나 유산을 자식이 탐내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노인은 독거로 지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잘난 자식은 해외에 있어 부모 운명의 순간도 지키지 못한다. 노인은 주로 요양원에서 혼자 죽음을 당하는 기상천외의 세상이다. 행운이나 명복을 도대체 누구가 빌어 준다는 말인가? 인생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뿌리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성교육부터 다시 시작을 하여야 한다. 돈을 밝히는 자본주의도 4.0시대를 지나 그 수명을 다하는 싯점에 와 있다. 토인비도 얘기했지만 미래는 퇴계의 '敬사상'이 아니고는 21C를 살려낼 재간才幹이 없다는데 공감共感이 간다. 우리모두 행운을 빌어 보자. 그러면 복이 저절로 찾아들 것이다. 복이 오는 길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기 때문에 먼저 행운을 비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복자福字를 파자破字하면, 단순하게는 '한 사람이 먹을 밭을 바라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복은 작으면서도 소박하다. 설사 오더라도 대낮에 신작로로 오질 않고 달밤에 오솔길로 올 것이다. 행운을 빈다는 것은 복을 불러 온다는 것인데 복만을 받으려는 현대인이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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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6
  • [이경국의 대구춘추 8] 반공일의 모습들
    이경국 칼럼니스트   우리말 같기도 하고 일제의 잔재같기도 하며 한자표기로 반공일(半空日)은 소싯적에는 토요일보다 자주 쓴 말이다. 일요일은 공일(空日)이거나 간혹 온공일이라고도 불렀다. ''온''은 순우리말로 그 의미가 좋은 용어이다.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나타내는 어휘는 지구상에 우리나라의 '누리'란 말 밖에 없다고 한다. '누리'는 영어로는 타임 앤 스페이스 (time & space)다. 기껏해야 접속사 and 정도만 8字모양으로 줄여서 쓰고 있다. 그런 면에서 새누리당은 그 당명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결국 간판을 내리게 하고 말았다. 당시 당명에 대한 풀이를 하여 보낸 적이 있다. 정당명을 살펴보면 현기증이 난다. 이는 노력하지 않는 집안이 조상탓만 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고 보여지다. 수시로 당명을 바꾸기 때문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탓하는 자는 탓으로 망한다. 국가관이 결여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사회가 지저분 해진다. 지금이 딱 그러하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 의 당명은 좋은 편이다. 더불어는 부사로 쓰이지만 '더불다'는 불구(不俱)동사라 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동사가 동사로 쓰여지지 못하니 불구란 얘기다. 국민과 그리고 야당과 더불어 정치를 해야 하는데 마치 북한과 인민과 위한 5년 동안 보잘 것 없는 치적을 남겼다. 적폐로 나리를 갈라 놓았으며 참으로 이상하고 얄궂은 자를 찾아내어 후보로 세웠다.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 모습이 정말 가관(加觀)이다. 각설하고 반공일에는 책보자기가 가볍다. 수업이 오전에만 있기 때문에 그렇다. 등교의 발길이 가볍다. 학창시절이나 직장생활 때도 토요일은 기분이 좋았다. 토요일 밤은 모두 연인(戀人)을 만나는 날이기도 하다. 그 다음 날이 뷰리플 선데이가 아닌가! 자유로운 휴일을 만끽하는 날인데 매일 놀고 있는 실업자도 더 몸이 가벼운 날이라고 한다. 당시 여고생의 자주색 가방은 늘 남학생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초등학교는 왕복 8km의 먼 거리였지만 뛰어 다닌 추억이 평생동안 뇌의 작은 분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여 미래를 잃어 버리기 위한 회상 (looking--back)이 결코 아니다. 당시는 절약(節約)을 알아서 소비(消費)보다는 저축(貯蓄)으로 살았던 시대였다. 소비를 할 건덕지가 없었던 가난의 代물림이 자그마치 5000년이나 유지되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였다. 장거리 걷기는 다리를 튼튼히 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기여를 하였다. 물질의 풍족은 영혼을 갉아 먹어서 과소비가 부채로 이어 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마이너스 통장은 인간의 심성을 공허로 채워 버린 허탈한 상황임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절약하지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감사를 모르는 북한에 마구 퍼다 주다 보니 나라꼴이 이 지경에 처한 것을 잘 모른다. 먼길의 등하교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친구는 경쟁은 하지만 지금처럼 이겨야 살아남는 상대로 여기지는 않었다. 인간은 건강이 자산이다. 이는 쾌적한 환경속에서 걸어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의 걷기의 덕이라는 생각을 한다. 산행을 할 때 나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면, ''인간은 두 다리가 고생하면 다른 한 다리가 호강을 한다''고 일갈을 펼친다. 이것은 나의 어록(語錄)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만 년전후부터 직립(直立)한 동물이다. 많이 걷는게 장수의 비결인데 자동차와 공해가 건강을 앗아가 버리고 있다. 임금의 단명도 연자를 탓기 때문이다. 육체는 고생이 되었지만 마음은 편했던 과거가 마냥 그립다. 반공일이 되니 옛 생각이 떠올라 글적거려 본 글임을 밝힌다. 동물은 많이 달려서 무병하다. 다른 요인이 있긴 하겠지만 임종이 두려운 것은 생애 가장 아프면서 눈을 감기 때문일 것이다. 고종명(考終命)이 오복(五福)의 하나인 이유가 이를 보여준다. 일생 지구의 두 바퀴반을 걸으면 소리소문 없이 눈을 감는 고종명이 가능하단다. 이는 반공일에 많이 걸을 수 있는 기회 활용에 있다. 현대인은 레져를 즐기고 있지만 사실 건강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 과식에다 과음을 즐기고 줄담배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데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실컷 먹고 사우나에 가거나 찜질방에서 살을 뺄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인간처럼 아둔한 동물은 없을 것이다. 이는 오장육부를 상하게 하는 질병의 온상인데 어떻게 건강하길 바란다는 말인가! 성공의 성패는 반공일과 공일의 활용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일반적으로 수면시간의 활용이라고 한다. 수면단축은 하마터면 건강상실로 성공이 달아 날수 있기 때문에 각별한 조심을 요한다. 시간만 나면 걸어야 한다.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요롱소리의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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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9
  • [이경국의 대구춘추 7]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이경국 칼럼니스트   주위를 말끔하게 치워두고 책상앞에 앉으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는 날이 있다. 이러한 날은 좋았던 추억을 소처럼 되새김질 하듯 뇌의 작은 분실에서 꺼내어 살펴본다. 과거를 마음의 창으로 회상(回想) 해 보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주위에 행복의 무지개를 띄워 주는 느낌이다. 무지개를 타고 당장 나타 나지는 않겠지만 저 멀리서 님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다. 이러한 행복의 순간은 일부러 만들면서 숨막히는 현실의 삶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여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추억은 아름답기 마련이다. 미래는 희망의 공간이다. 현실을 덮어 주는 이불같은 역할을 해 준다. 지금이라는 현실은 늘 거친 삶인데도 모두 현재가 중요하다면서 방점을 찍으라고 하고 있다. 현대인은 무엇에 그토록 화급하게 쫒기면서 살아 가고 있는지 제대로 된 사랑도 모르면서 그저 세랭게티의 누떼처럼 무리지어 달려가듯 살려지는 모습이 역력하다. 주인공인 자신을 망각하고 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세파(歲波)에 흔들림 없이 사랑을 교감하면서 세상을 행복의 도가니로 만들기 위하여는 무진 애를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계절은 어느 때나 좋다. 그러나 晩秋를  지난 초겨울은 해마다 그 느낌도 다르다. 최근엔 중국이 전력부족으로 공장가동을 제대로 못하여 가을 하늘이 예전처럼 높다. 구름도 하늘아래 아름다운 옛모습이 그대로다. 입동(立冬)을 지나니 조석으로 공기는 차지만 쾌적함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구름은 형상은 달라도 흰색일 때가 가장 마음을 끈다. 공기도 신선하다. 초미세 먼지에 신경쓰지 않으니 더더욱 좋다. 이때쯤이면 마스크는 얼굴을 따뜻하게 하여주니 코로나가 오히려 밀리는 것만같다. 공원이나 산속에서도 소처럼 사람에게 머그레(마스크)를 씌우는 당국의 처사는 초겨울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목동의 파리공원 벤치에도 鞍山자락 의자에도 지하철 구내역 밴치에도 위험하다는 표시로 붉은 줄을 처놓고 있다. 진심으로 국민건강이 염려가 된 방역차원인지 헷갈린다. 자연은 더없이 깨끗하고  쾌적한데 인간은 부패하여 썪은 냄새를 풍기는 세상이다. 오랜 생선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국민은 냄새를 맡을 수 없게 중독이 되고 말았다. 좌경은 뇌가 꼬여 버렸으며,  DNA도 좌경으로 굳어진 SRD4의 보유자들이 들끓고 있는 세상이다. 잠시 눈을 돌리면 저 멀리서 유리구두를 신고 소시절 맘속에 그렸던 소녀가 오는듯 하다. 어쩌면 무지개를 탄 왕자가 올 것만 같은 생각에 젖어 보아도 좋은 계절이다. 이제와서 어쩔수 없이 위드 코로나를 하고 있다. 확증자로 옥죄어 왔는데 그 숫자가 줄지도 않는데 말이다. 넉넉하고 풍부한 사유만이 각박하고 힘든 삶속의 한줄기 단비가 되어 줄 것이다. 이 무한한 우주공간에 점하나에 불과한 인간인데 바위보다 무거운 시지프스 짐을 언제까지 지고만 갈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거친 파도에도 바닷물은 일시 거품은 토해 낼지 몰라도 물은 아프지도 않다네..... 산란한 마음을 다잡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본원적 숙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눈을 감아도 아련히 떠오르는 그미를 그려본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아니지만 얼굴을 다 그릴수가 있다. 입가의 미소까지도 그리긴 했는데 도저히 마음만은 그릴수 없어서 빈 공간으로 그냥 두고 말았다. 왜 인간은 중요한 것은 묻어 두면서 걷치레로만 다투고 있을까? 이 무한한 우주의 공간을 잠시 잊어 버렸나 보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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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2
  • [이경국의 대구춘추 6] 어느 상가(喪家)에서의 실수담
      이경국 칼럼니스트      요즘 상가(喪家)에 조문(弔問)을 간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저승길로 가는 자는 평소에 살던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싶어 하고 있지만 사실 죽는 자의 권리는 거의 없다고 본다. 아프고 의식이 없다하여 死體를 함부로 다루는 잘못된 장례문화가 정착이 되고 말았다. 사자(死者)는 대다수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으며 숨이 떨어지자 마자 팔한 지옥[八寒地獄(얼음속)] 으로 들어보내 버린다. 3일간의 생명의 골든타임은 아예 기다릴 기회조차 사라져 버린다. 예수도 3일만의 부활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환자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는 비율이 우리나라가 이외로 높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란다.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병원의 영안실에 모시는 것이 孝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弔花의 수로 성공을 나태내면서 과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례를 치루자마자 부의금 배분(?)문제로 십중팔구 형제간 다툼이 있는 것이 현실의 씁쓸한 한 단면이다. 남의 못할 세상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친구의 장모상에 조문을 가서 크게 실수한 얘기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해 본다. 그것도 혼자 간 것이 아니고 여성 이사장과 동행하여 갔던 것이다. 장례식장이 102호실인데 그만 103호실로 착각을 한 것이다. 접수대에서 ''**상가입니까?'' 물었더니 정중히 ''네 그렇습니다.'' 한다. 너무 믿은게 탈이었다. 방명록에 이름을 올리고 부의금을 전하고 식당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 입관식(入棺式)이라서 조문을 할 수가  없었다. 조문객이 많은 상가인데 코로나 때문에 조문객이 적은가 보다 내심 생각하면서 앉아 있는데 상가집의 음식이 그야말로 푸짐하게 계속 나온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조문을 온다는 친구들이 오지는 않고 먹을 거리는 계속 나와서 유이사장과 계속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실컷 먹고 보니 WC에 다녀 오는데 조화가 102호실 앞에까지 가득한게 아닌가. 그럴 수 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이해를 했다. 폰은 무음으로 하여  열어 보았더니 102호실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조문은 하지 않았지만 부의금을 되돌려 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분하게 방명록의 이름을 찾아서 접수하는 자에게 전후 사정을 이해를 시킨 후 겨우 봉투를 돌려 받았다. 하마터면 ''조의금반환 청구소송''을 할뻔 했다. 그리고 방명록에 '102호실 착오로 표기'를 해서 조의금 계산에 차질이 없도록 배려하고 바로옆 영안실로 발길을 돌렸다. 102세의 친구의 장모님의 초상에 이러한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 ''천하에 이경국이 그런 실 수를 다 한다''면서 친구들과 상가에서 함께 웃을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우를 '귀신한테 홀렸다고 한다.' 같은 시간에 같은 미션식 장례식장을 두 군데를 들렀으니 이러한 실수는 발생하기가 지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찌 좀 덜렁거리면서 꼼꼼하게 챙기지를 못하는 성미(性味)라서 발생된 일이다. 나이 때문은 아닐테고 동행하면서 서로 믿었던 것이 해프닝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이는 얼굴 뜨거운 부끄러운 실수로 아마 오랜기간 웃음거리로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劉박사님께 송구스럽긴 하지만 어쩌면 실수의 공범(共犯)이니 어쩔 수 없다고 자위(自慰)해 본다. 조문을 하면서 급한 나머지 봉투에 '祝華婚' 이라고 쓴 실수담은 더러 듣긴 하지만 남의 상갓집에서 식사를 하고 부의(訃儀)봉투를 뒤적거려 찾아 오는 실수담은 없을 것이다. 필자가 아는 분 중에서 신랑신부의 주례사를 다른 사람의 것을 하여 큰 실수를 하였다는 얘기는 주례로 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주례사를 두군데 하는 경우일 것이다. 어떤 분은 만취상태에서 자기의 아파트를 용하게 찾아가서 벨을 눌렀단다. ''이집이 누구의 아파트가 맞느냐고?'' 했다. 부인 왈 ''아닙니다. 잘못 누르셨습니다.'' 농(弄)으로 대답을 했는데 부랴부랴 도망을 나와서 아파트를 몇바퀴나 돌다가 하는수 없이 경찰의 도움으로 찾아 갔다는 실수담도 있긴하다. 인간만이 실수를 하고 얼굴을 붉힌다는데 어쩌면 실수가 삶속의 여유가 아닐까 싶다. 실수는 인간이 너무 완벽하면 숨이 막히기에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여유라는 생각이 든다. 실수를 하면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하면서 창피함을 느끼는 것이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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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춘추
    2021-11-15
  • [이경국의 대구춘추 5] 어머니와 몽당연필의 추억
    이경국 칼럼니스트      누구나 몽당연필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6년의 추억이 떠 오를 것이다. 필통에 몽당연필과 지우개를 넣고 책과 함께 책보자기에 싼다. 책가방이 귀했던 60년대였다. 어께에 둘러메고 십리가 넘는 등교길에 달리면 달그락 소리도 함께 달린다. 하교길에는 여유가 있어 필통 속 몽당연필도 쉬면서 온다. 몽당 연필은 소싯적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였지만 우리에게 절약정신을 일깨워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다가 색연필 가운데 많이 쓰는 분홍색이 다 닳으면 아예 통째로 새것을 산다고 한다.  다른 색은 멀쩡한데도 말이다. 등교길에 얼마나 달렸던지 몽당연필과 지우개가 친구되어 지우개는 전신이 새까마져 버린다. 지금 과거를 회상回想해 보니 그 때가 걱정도 적었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께서도 젊은 모습이셨다. 응석을 부리면 뭐든지  다 들어주셨던 어머니셨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 밤중에 볶은 콩이 먹고 싶다고 조르면 어머니께서는 호롱불을 켜시고 부엌에 나가셔서 불을 지펴서 콩을 볶아 주셨다. 나는 콩이 먹고 싶을 때 먹지 않으면 꼭 몸이 아팠던 기억이 있었는데 아마 콩이 먹고 싶어서 꾀를 부렸을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천하의 불효였다. 대학을 보내 주지 않는다고 꼬박 4일을 단식을 하면서 버티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어머니께서 치마를 동여맨 끈을 풀어서 더 이상 밥을 먹지 않으면 먼저 떠난다고 하시면서 우셨다. 매끼마다 작은 밥상에 밥을 차려서 직접 들고 방으로 오셨던 어머니셨다. 지금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일기장 속 어머니의 사진은 나중에 영정사진으로 쓴 것이다. 후회없는 삶은 없다고 한다. 한없는 사랑으로 아껴주시던 어머니 생각에 올곧은 길을 걷기 위하여 무진 애써 왔지만 돌이켜 보면 턱없이 부족하다. 만추晩秋에 외로움을 타는지 오늘은 어머니와 필통 속의 몽당연필이 오버랩되어 나를 애잔하게 한다. 삭삭 조심조심 연필을 깎는다 서억서억 뽀족하게 심을 다듬는다 사각사각 공책에 글씨를 쓴다 삐툴빼뚤 글씨가 나를 보고 웃는다    --연필글씨 전문-- 이 시는 저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아동문학가이자 동시작가인 국중홍님의 동시이다. 이번에 ''꽃씨야, 안녕''이란 4번째 동시집을 내셨다. 내자마자 보내 주신 시집에 담겨져 있는 동시이다. 이해인의 '몽당연필'이란 동시도 가슴을 여미게 하지만 위의 동시를 읽고 먼 옛날 프라타나스 나무가 커다란 초등학교 시절이 떠 오른다. 연필을 깎는 모습, 연필심을 다듬는 모습, 공책에 연필 글씨를 쓰는 모습과 마지막은 내 글씨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면서 또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평생을 어린이처럼 살고 싶다. 몽당연필의 연필의 길이는 짧지만 심은 길게 깎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당연히 손주 승준(8살)과 승아(5살)에게 몽당연필의 소중함을 깨우쳐주면서 절약節約에 대해서도 알려줄 생각이다. 초등시절이 엊그제만 같은데 순주가 벌써 그 자리에 있다. 세월은 내게 머리엔 배꽃을 남겨 주었으며 목에는 깊은 주름을 생기게 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세월은 결이 좋은 나이테를 남기도록 애써 볼 작정이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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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8
  • [이경국의 대구춘추 4] 이 좋은 계절에
      이경국 칼럼니스트   지구상에 사계절을 모르고 사는 나라가 많다. 그들은 눈을 처음으로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동남아에서 우리나라의 눈을 보고 탄성을 지르던 모습이 떠 오른다. 지금이 계절적으로나 절후節候로도 가장 좋은 때이다. 무슨 일을 하여도 기분이 좋은 철이다. 그러다 보니 만추晩秋의 서글품을 느끼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을 표현하는 무수한 말이 있지만 필자는 한 마디로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다. 단순한 사전적 의미로 '서글프다'함은 '외로워 불쌍하거나 슬프다.'는 뜻이다. 외로움은 인간이 홀로이기 때문에 찾아드는 본원적 고독이다. 불쌍하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며, 상대에게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불쌍한 마음이 없다면 인간은 심성이 각박하여 세상은 살벌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단四端의 하나이며 깊이 생각하고 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계절보다 하늘은 더 높고 구름도 아주 하얗다. 흰색이 가장 화려하다고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제사를 올릴 때는 흰옷을 입었으며, 백의민족 白衣民族이란 말은 우연히 생긴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칼라시대이니 색채가 화려해 짐에 따라서 백색이 끼일 자리가 좁아져 가고 있다. 가을 하늘이 가슴이 저미도록 높은 것은 최근 중국이 전력사정으로 인하여 공장가동을 줄인 탓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 역병疫病이 극심할 때는 비행기가 덜 다녀 하늘이 맑다는 농담弄談을 하긴 했었다. 하늘이 높고 맑으면 구름은 온갖 유희를 하면서 지구에 있는 인간에게 눈요기를 제공해 준다. 툭하면 인생이 구름같이 뭉쳤다가 흩어져 버린다는 비유를 하는데 아마 구름도 속이 상했을지 모른다. 조석으로는 찬기운이 심하여 이불을 당겨 덮지만 한낮에는 더위가 극성을 부리기도 한다. 하루에 사계절을 다 느낄 수가 있어 좋은 시월이다. 천혜天惠 의 혜택을 받은 우리나라이다. 금수강산錦繡江山은 사자성어만으로 보라고 만든 말이 아닐 것이다. '중국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원'이라고 했다.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참으로 멋진 말이다. 어디 금강산만 보고 싶어 했을까? 설악산, 청량산, 주왕산, 학가산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사계四季에 따른 아기자기한 변화의 모습에서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의 고유한 색채色彩를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인류문화의 중심지이고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이 공산국이란 오물을 쓰고 부터는 이상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민주民主의 요소가 없는 나라는 세계의 어디든 문제가 많은 나라이다.  중국과 근접近接하면 하나같이 못살고 예속화 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21C에 지구를 리드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철따라 다른 꽃이 피는 보기 드문 반도이기 때문이다. 흙의 질質이나 바위의 성분成分이 딴 나라와 다르다. 강화도는 땅의 기운氣運이 강하다. 마니산마尼山은 하늘과 통하는 산이다. 마니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첨성단이 백두산이나 태백산에 있지 않고 섬인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보여진다. 하늘을 믿고 자주 쳐다 보면서 생각하는 나라는 선진국이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자긍심을 깨우쳐 두뇌가 우수한 국가로 인류에 기여할 큰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노벨상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민족이 유대인보다 더 많이 수상할 날이 올것이다. 다만 이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한限으로 남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부터 1~2세기 후를 당겨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위상에 깜짝 놀랄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이나 예언가들의 예측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토질이 다른 나라와 판이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허토虛土나 가토假土가 아닌 진토眞土이다. 소싯적에 사방사업에 동원되어 식목으로 땀을 흘린 덕으로 지금 삼림森林을 이루어 양질의 산소를 뿜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나무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만추에 제대로 느껴 볼수가 있어서 좋다.      ::   이경국 칼럼니스트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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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1
  • [이경국의 대구춘추 3] 서숙(조)이삭의 매력
    이경국 칼럼니스트     서숙은 조의 다른 말이다. 방언은 아닌듯 한데 조밥은 알아도 서숙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는 오곡(五穀)가운데 조가 황혼녘의 석양을 받으면서 여물어 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뇌리에 남아 있다. 아예 각인이 되어 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서숙밭에는 초저녁에 벌써 이슬이 서려 있는데 조이삭은 다른 작물에 비하여 무척 큰 편이다. 줄기와 잎도 여간 강하지 않다. 고개를 푹 숙이고 뭔가 시름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이삭은 꽃이 남긴 유산이다. 식물은 아름다운 꽃이 만개(滿開)하고 져야만 열매를 남길 수 있으며,  그 씨앗으로 代를 잇는 숙명의 과정을 거친다. 혹자는 서숙을 남근(男根) 으로 심볼화 시키기도 한다. 모습이 많이 닮아 있긴하다. 길이는 마치 시골의 황구(黃狗, 똥개)의 꼬리만큼이나 길다. 조밥은 덩어리로 얽혀 있어서 먹을 때 목이 메이기 쉽다. 소싯적에는 딸이 조밥만 먹다가 시집을 보내면 어머니는 시집보내는 날 돌아 앉아 눈물짓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의 비극의 한 단면이다. 그토록 못살던 나라였다. 그러나 운명으로 받아드렸을 뿐 누굴 탓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사진작가는 석양 무렵의 서숙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길만한데 여지껏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조의 재배가 지극히 제한적이며, 소싯적의 기억은 까맣게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조는 쌀이 귀하던 시절에 대체작물로 경북 북부지역의 주산물이었다. 구황작물(救黃作物)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조밭에 조를 솎아내는 일은 고역인 것이다. 앉아서 호미로 솎아 가는데 강열한 태양으로 밭이 뜨거워 호미로 흙을 긁어 내고서 발을 옮겨야만 했다. 조류(鳥類)는 좁쌀은 모이로 잘 먹지만 쌀은 피하는 경향이 있다. 쌀의 귀함을 조류도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는 식량이 해결 된 드문 나라가 되었다 지구상에 10억명이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는데  비하면 더 없는 행복이다. 양식은 늘 아껴야 한다. 틈만 나면 北에다 주지 못하여 안달나 한다. 同族에 걸신(乞神)이 들린 左傾이다. 위정자에게 조밥을 먹여서 목이 메게 해 보았으면 싶다. 보리는 익으면 고개를 빳빳이 쳐들지만 벼와 서숙은 고개를 푹 숙인다. 땅에 대한 고마움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만 보리는 한겨울에 동토의 쓰라린 고통을 견디어 내었기 때문에 태양이 너무나 그리웠던 나머지 그럴 것이다. 서숙이란 말은 정겹다. 조밥을 먹고 자란 60대 이상은 건강하다. 그리고 추억도 많다. 아름다운 추억은 고생하면서 싹튼다. 온실 속에서는 옹이의 아픔을 알 수 없다. 지금은 자연과 동떨어진 생활로 추억마저도 기계적으로 각인되고 마는 슬픈 시대이다. 그들이 서숙의 애환을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재산형성을 위한 수익률 계산에는 도사급이다. 아마 평생 통장의 잔고를 보면서 일희일비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돈벼락 맞는 것을 희구하면서 산다. 그것이 행복인양 착각하고 살고 있지만 욕망이 있는한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서숙이 익어가는 철이다.   좁쌀은 작지만 서숙 이삭은 여간 크지 않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면서 신비스럽다. 안동국시집에 가서 건진국시를 먹을 때는 꼭 밥공기에는 조밥이 섞인 밥이 조금 나온다. 아마 국수만 먹기에는 섭섭하여 밥을 조금은 먹도록 했는가 보다. 여름 한철 저녁은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온가족에 둘러 앉아서 국수로 한끼를 때운 시절이 있었다. 가까이서 워낭소리가 들리고 모깃불은 꼭 피워 놓았다. 모기가 연기때문에 도망을 간 것으로 알았는데 실은 모기가 연기의 냄새를 좋아하여 그쪽으로 간다는 사실은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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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4
  • [이경국의 대구춘추 2] 순종(順從)이 사라진 시대
      이경국 칼럼니스트   요즘 순종이란 말을 쓴다는 것은 마치 처녀막이 있는 신부를 찾아 나서는 신랑처럼 고리타분하다는 핀잔을 받기 십상일 것이다. 사실 순종은 겸손하면서도 자기를 낮추어 격을 높이는 좋은 말이긴 하다. 이성간에 서로 위치 다툼을 하면서 의식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본다. 어찌된 세상인지 친청 어머니가 딸의 이혼을 만류하지 않고 부추기는  세상이 되어 버리다. ''너는 시집 귀신이다. 당장 돌아 가거라!'' 이렇게 야밤에 딸을 돌려 보내 놓고는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세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상담소보다 재혼상담소가 성행하는 것이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우리나라가 더욱 심한 편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혼인식을 하는데 주례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마치 가벼운 이벤트행사같은 예식을 하고 있는 추세이다. 결혼식은 어느 정도 엄숙해야 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두번째가 혼인(婚因) 이다. 물론 축제이긴 하지만 가볍게 분위기 위주로 치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목사가 주례를 서는데 신부의 순종에 대해서는 성경말씀을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는 세태가 되다. 왜냐하면 자그마치 절반이 갈라서는 현실이 되다보니 그러한 주례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을지 모른다. 인류사는 物質보다 精神 문화가 앞설 때, 그리고 남자가 여자보다 다소 우위를 점할 때가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한다. 필자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유일하게 있는 부처다. 그렇지만 부끄러운 기록이 너무나 많다. 아예 혼인을 하지 않거나 독신으로 산다.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를 낳지 않는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바람직하지 않다. 해결책은 그저 돈을 푸는것 말고는 없다. 남녀가 자기 주장이 50%라고 서로 우긴다면 다툼이 없는 공평한 사회가 된다고 보는가? 이는 큰 오산이다. 따라서 49%대 51%의 비율이 이상적이란다. 이는 여성이 애기를 産하는 하늘같은 정신으로 남편을 어느 정도 품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여성은 남자가 작은 정자 하나만 주어도 애기로 보답해 오는 바다같은 품성을 지닌 존재이다. 연인간이나 부부 즉, 남녀는 서로 겨루어서 공간확보를 넓히는 경쟁관계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부부가 일심동체라서 무촌(無寸)인 것은 아니다. 신혼때부터 통장을 따로 쓰면서 집안의 공통비를 관리하는 등 일심동체는 커녕 이심이체로 출발을 하니 시작부터 첫단추를 잘못 꿴다는 생각이 든다. TV에도 이러한 부류의 프로가 여간 흔하지 않다. 과거에는 남자는 성주(城主)였다. 지금은 남자로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는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늘 속으로 울면서 겉으로 어흠하는 존재가 남자이다. 남녀가 혼성인 중성의 유니섹스 시대이다. 주식과 채권이 비슷해지듯 남녀도 그러하다. 사실 남자가 약해질수록 그 사회는 福은 멀어지고 화(禍)는 커져만 갈 것이다. 형편이 어려워 입하나 덜려고 딸을 시집 보내던 시절은 去하고 아들이 스스로 아침을 챙겨 먹고 서둘러 출근하는 시대가 來하고 말았다.   물론 아내는 침대에 누워서 인사를 한단다. 이는 기뻐만 할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남녀평등만 따지는 사회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한 대목이다. 대체로 화목한 가정은 아내가 남편을 섬기듯 순종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순탄한 가정은 거의 다 그러하다. 가정도 수축과 이완의 밸런스를 이루어야 건강하며 부부가 장수에 이른다고 한다. 여인들만 사는 여인천국이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무인도에서 남자가 혼자 살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지금의 本妻가 나타난다면 천사로 보이고도 남을 것이다. ''부부는 일생 손님을 대하듯 살아야 한다''는 퇴계선생의 말씀에 적극 동의하고 싶다. 무촌인 부부이긴 하지만 평소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 간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물욕(物欲)이 정신세계를 삼켜버린 결과가 빚어낸 우리사회의 슬픈 모습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한집건너 한집씩 헤어져 버린 가정의 실체다. 40%가 혼자사는 독신가정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혼자라고 자유롭다는 생각은 자유가 아니다.   이는 기권이 자유의 일종이라고 항변하는 경우와 같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서 함께 살다가 떠날 때는 혼자 가는 존재이다. 이를 거역하는 삶이 결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순종의 미덕에 대하여 곱씹어 본다. 세상은 흐르는 대로 두고 보는 것만이 아니다. 어른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도 허리가 굽은 어른은 힘이 없고 장유유서가 사라진 세상에 어른이 설 자리가 없다. 전철에서도 별도의 경로석에서 조용히 가야하는 신세다. 좌석은 등이 굽은 모습에 지팡이가 표시로 그려져 있다. 이를 예쁜 장미꽃 두송이로 경로석 표시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긴한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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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8
  • [이경국의 대구춘추 1] 가을비 우산속
    = 편집자 주 = 대구저널이 새로운 Opinion 칼럼 '대구춘추'를 선보입니다.  '대구춘추'는 사계 속 일어나는  현재의 다양한 이야기들, 또는 흐른 시간속에 묻어뒀던 나만의 스토리들을 꺼집어 내 독자들과 공유해보는 정다운 장입니다. '대구춘추' 첫  기고가는  이경국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대구저널의 첫 Opinion 고정란 '이경국의 경제칼럼' 을 인기리에 집필한 이경국 프리랜서가 새 칼럼 '대구춘추'를 통해서 다시 독자들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총 56회, 1년이라는 결코 짧지않은 시간동안  일선 현장의 살아있는 체험을 바탕으로 경제이야기를 재밌게 풀어주신 이경국 프리랜서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앞으로도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해봅니다.  '대구춘추'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합니다.    이경국 칼럼니스트   계절이 더위를 먹었는지 가을에 장맛비가 내리더니 晩秋인데도 최근에는 진종일 비가 내린다. 가랑비인지 이슬비인지 헷갈린다. 시어머니가 얼른 떠나 가라는 가랑비인지 아니면 친정 어머니께서 더 있으라고 내리는 이슬비인지 당체 종잡을 수가 없다. 자연도 인간의 성미(性味) 를 닮아서 시도 때도 없이 기후가 변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높은 하늘에 비늘구름이 반짝이면서 허공에는 고추잠자리가 가득한 연중 가장 살기가 좋은 만추지절이다. 고추잠자리가 어찌나 귀해져 버렸는지 보호곤충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강남갔던 제비도 발길을 돌려 버렸는데 흔한 고추잠자리가 씨를 말릴까 저으기 걱정이 따른다. 비가 내리면 설사 아픈 기억일지라도 뇌의 작은 분실에서 소환을 해 보다. 사실 이런 날은 주식이니 비트코인 아니면 아파트 시세상승 등에 신경쓰지 말고 따뜻한 온돌방에 동리 처녀들과 모여서 정담(情談)을 나누던 것이 생애 최고였던 소시절을 연상해 본다. 얇은 홑이불에 여럿이 발을 묻고 있어도 누구의 발인지 다 알았던 순진한 시절이 있었다. 군것질이 귀하던 시절 볶은 콩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자고로 볶은 콩과 이쁜 처녀와 주식을 살 돈 (예탁금)은 가까이 있으면 손이 자꾸만 간다는 말이 있다. 옛 이야기가 꽃을 피우던 소싯적 처녀들이 벌써  初老의 할미 (할머니)가 되어 더러 안부 전화가 오는데 내용이 한결같다. ''별일 없지?'' 더 다른 말은 사실 필요가 없다. 조선시대 임금의 평균 연령이 47세였는데 친구들이 훨씬 더 오래 살면서 안부를 전해 주고 있어 마냥 행복하다. 가랑비가 내리든 이슬비가 오든 관여할 바 아니다. 방안에 행복의 쌍무지개가 뜨는 기분이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의 오후가 이렇게 감미로울  수 없다.   ''가을비 우산속에 이슬 맺힌다.'' 故人이 된 최헌의 노래 한 소절을 흥얼거려 본다.  이슬은 어쩌면 그미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집집마다 신발과 우산이 넘쳐 나고 있다. 신은 종류마다 신발장이 미어터지고, 우산은 비닐우산 부터 커다란 골프우산에 이르기 까지 아예 묶음으로 있다. 적절한 소비는 미덕(美德) 이지만 과소비는 가정경제의 밸런스를 무너지게 한다. 한계소비성향은 한번 길들어 버리면 고대광실에 살다가 다시 전세살이 하는 것만큼 줄여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평소의 습(習)이 중요하다. 절약하여 저축을 하는 사람이 IMF 때 큰 고비 없이 잘 지내온 것을 많이 보아온 경험이 있다. 신작로가 아닌 좁다란 학교길이지만 우산 세개 가운데는 찢어진 우산도 있었다. 가난의 상징이라기 보다 절약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외국인은 우리나라의 비닐 우산을 보고 극찬을 한다. 저렴하고 편리하다는 것이다. 찢어진 우산에 괜히 정이 가는 오늘이다. *그미는 문학작품에 쓰는  그녀의 우리말입니다.     ::   이경국(프리랜서 작가) 약력   ::    --  대구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1974)    --  프리랜서 작가(현) --  사) 박약회 운영위원(현) --  사) 국어고전문화원 이사(현) --  사)한국생활문학회 이사(전) --  진성이씨 서울화수회 사무국장(전)  --  (주)동서증권 영업부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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