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성 칼럼 29] 客窓寒燈 - 파란 눈의 聖者!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파란 눈의 聖者!>
"故 두봉(杜峰)주교님의 유별난 한국사랑"
2014년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My love, Don't cross that River)!" 가 가끔씩 생각 난다.
강원도 횡성 두메산골에서 76년째 부부로, 연인(?)으로 살아온, 당시 89세의 강계열(1924~)할머니와 조병만(1915~작고)할아버지의 감성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는 누적 관객 480만명을 기록한 흥행 대박으로,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부부애의 결정판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한 영화이기 이전에 실화다.
'사랑'의 주인공이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필자가 감히 '파란 눈의 성자(聖者)'라고 부르고 싶은 故 두봉 주교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두봉 주교님의 본명은, "르네 마리 알베르 뒤퐁(Rene' Marie AlbertDupont: 1929.9.2~2025.4.10, 향년 96세)" 이다.
두봉 주교님의 한국 이름이 바로 두봉(杜峰,Du Bong)으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로,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역임하였고, 2019년에는 '한국 특별국적'을 취득하여, 명실공히 한국인이 되었다.
그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두봉 주교님은 워낙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성장기 때 영양실조로 인해 신장보다 양팔을 벌린 길이가 더 길었다고 한다.
1940년 무렵, 두봉주교님의 고향인 오를레앙 지역은 제2차대전의 침략국인 독일에 의해 강제로 프랑스 군정청이 설치된 곳이라, 나치의 직접적인 전쟁 범죄에 노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집중공격지 중의 한곳이었다.
두봉 주교님은 예수님에 반해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대신학교(가톨릭계 학교)진학을 결정해야 할 무렵, 종교철학 교사였던 어떤 사제가 남긴 말에 감명 받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 나도 예수님처럼 평생 사랑을, 행복의 길을 가르치자!'
그는 대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3년 6월 29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54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12월 19일 최초의 선교지인, 6.25 동란을 겪은 한국땅을 밟았다.
그가 처음 선교지를 택할 때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절친이 한국 동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소식을 듣고는, 대번에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다고 한다.
이런 결정이 어찌 쉬우랴!
젊은 나이에 자신의 절친이 낯선 이국의 전장터에서 삶을 마감했다는데.....,
두봉 주교님(당시 신부)은 1955년 대전 대목구 대흥동 본당(현 대전교구 주교좌)의 보좌신부로 첫 사목을 시작한다.
그 당시 본당 주임이던 故 오기선(1907~1990)신부를 도와 10년간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폈는데, 그때 프랑스 성(姓)을 한국식으로 바꾼 '두봉(杜峰)'이란 이름도 바로 이 오기선 신부가 지어줬다고 한다.
이 두봉이란 이름은,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란 뜻을 가지기도 했다는데, 이렇게 해서 '파란 눈의 성자' 프랑스인 '뒤퐁'은 한국인 '두봉'으로 이땅에서 70년의 삶을 살게 된다.
두봉 신부! 그는 '대전교구 학생회'와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지도 신부, 교구 상서국장 등을 지내다, 1967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뒤, 1969년 5월 29일, 대구대교구가 관할하던 경북 북부지역이 새 교구로 분리, 설정되어, 한국교회 15번째 교구인 안동교구가 탄생하게 되자, 만39세의 두봉 신부가 안동교구장 으로 선임되었다.
두봉 주교님의 초대 안동 교구장 취임 일성이 더욱 놀랍다.
"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논어(論語)를 인용한 두봉 주교님의 취임 일성은 유교의 본향인 안동교구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전국에서 유림의 도시로 유명한 안동의 교구 특성을 고려한 두봉 주교님의 이 친근성에 안동 유림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이어서 그는, "여러분이 가꿔놓은 기름진 토양에 소담스런 꽃 한송이를 심어놓고 싶은 게 소망"이라며, "외지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이 고장 발전을 위해 필요한 종으로 생각해 달라!"는 당부의 말로 교구장으로서의 취임사를 한 것이다.
두봉 주교님의 한국 사랑은 남달랐다.
대개의 선교사들은 은퇴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곤 하는데, 두봉 주교님은 은퇴 후에도 시무했던 안동교구의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지역민과 함께 교역자로서, 지역민으로서, 고락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에 찐 사랑을 전해 준 선한 목자(牧者)두봉 주교님!
흔히 사랑의 종류가 크게 3가지라고 하는데, 쾌락주의적 사랑인 에피투미아(Epithumia)는 차치하고 라도, 이성간의 로멘틱한 사랑인 에로스(Eros)도 건전한 범위 내에선 많아야 되겠지만,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면서 이타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적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자 등대이기에, 살신성인적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아니면 결코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두봉 주교님은 70년을 하루같이 머나먼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지난 2025년 4월 10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땅, 유림의 본향 안동땅에서 선종(善終)하셨다.
곧 주교님의 일주기가 다가온다.
앞으로도 제2, 제3의 두봉 주교님이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하시기를 고대하며, 삼가 두봉주교님의 명복을 빈다!
:: 강호성 前 세계사이버대학 총장 ::
- 행정학 박사
- 前 한민대학교 부총장
- 前 한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